전쟁

행주대첩

행주대첩 幸州大捷 · 일본어 幸州山城の戦い(고슈산조 전투)

1593년

처음 게시 2026년 10월 11일 ·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2일 · 편집 테라 스크립타

AI 작성 · AI 사실 검수

Claude가 쓰고 Codex(gpt-6.1-sol)가 공개 출처와 대조해 사실·연대·인용과 영어·한국어판을 독립 검수했습니다. 사람 전문가의 검토는 거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AI 검수: 2026-10-11. 찾아서 고친 문제 12건.

한 문장으로

1593년 음력 2월 12일(양력 3월 14일),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한양 서쪽 한강 가의 작은 산성인 행주산성에서 훨씬 큰 일본군의 거듭된 공격을 하루 종일 막아 냈고, 여러 장수가 다친 일본군은 한양으로 물러났어요.

행주대첩
이미지: IRTC1015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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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인 1592년, 일본의 대군이 조선에 쳐들어왔어요. 일본군은 아주 빠르게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을 차지했어요. 그러자 중국의 명나라가 조선을 도우려고 군대를 보냈고, 1593년 초에는 일본군이 남쪽의 한양까지 밀려났어요.

권율이라는 조선의 장수는 수도를 되찾는 일을 도우려고 전라도에서 군사를 이끌고 올라왔어요. 그는 한양에서 멀지 않은, 넓은 한강 옆의 낮은 산 행주에 진을 쳤어요. 군사들은 그곳에 튼튼한 나무 울타리를 두 겹으로 두르고 그 뒤에 자리를 잡았어요.

1593년 3월의 어느 이른 아침, 아주 많은 일본군이 한양에서 몰려나와 공격해 왔어요. 일본군은 한 무리씩 번갈아 하루 종일 산을 기어올랐어요. 조선 군사들은 군사가 된 스님들과 함께 활과 화살, 대포, 여러 개의 총을 실은 ‘화차’라는 무기 수레, 그리고 돌까지 써서 맞서 싸웠어요.

한때는 일본군이 바깥 울타리를 뚫고 들어왔고, 조선군은 화살이 떨어져 가고 있었어요. 그때 배가 강을 따라 화살을 싣고 왔어요. 일본군은 여러 장수가 다쳤고, 끝내 싸움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돌아갔어요.

행주의 여인들이 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고, 그래서 부엌에서 두르는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이 낱말은 전투보다 더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름이 전투에서 생긴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승리는 진짜였고, 한국 사람들은 이 싸움을 임진왜란의 3대 대첩 가운데 하나로 기억해요.

한눈에 보기

날짜
1593년(선조 26) 음력 2월 12일(조선·일본 역법 모두) = 양력 1593년 3월 14일(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표 기준). 싸움은 새벽 무렵부터 늦은 오후 또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장소
행주산성.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한강 북쪽 기슭의 낮은 산 덕양산에 있으며, 한양에서 서쪽으로 약 14km
전쟁
임진왜란(1592–1598)의 첫 번째 침략 시기, 1593년 초 조명 연합군의 반격 국면
지휘관
조선: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권율,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 / 일본: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이시다 미쓰나리·구로다 나가마사·깃카와 히로이에·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병력
조선: 『선조실록』과 1602년 대첩비에 따르면 정병 2,300명(홀리도 이 숫자를 따름). 다른 자료는 2,800명, 3,400명, 3,800명, 4,000명 또는 ‘1만 명이 못 되는’ 규모로 적는다 / 일본: 승전을 보고한 신경희는 ‘3만에 불과’하다고 답했고, 현대 한국 서술은 일곱 부대 3만여 명으로 적는다
피해
일본: 조선군이 벤 머리 130급, 일본군이 불태운 시체 외에 남겨진 시체 200여 구. 후대 저작의 추산은 이보다 훨씬 크다 / 조선: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결과
조선의 승리. 일본군은 한양으로 물러났다. 권율은 곧 더 유리한 파주로 진을 옮겼고, 일본군은 강화 교섭 끝에 1593년 5월 18일 한양에서 철수했다
주요 사료
『선조실록』(신경희의 보고와 전투 기록, 2월 24일), 『선조수정실록』, 유성룡의 『징비록』, 1602년 행주대첩비, 현대 백과사전이 따르는 후대의 편찬물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행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행주대첩은 1592년에 시작된 일본의 조선 침략, 곧 임진왜란 때의 전투이다. 1593년 음력 2월 12일에 벌어졌다. 한국천문연구원(KASI)의 음양력 변환표로 바꾸면 1593년 3월 14일이다. 일본 측 기록도 2월 12일로 적는다.

싸움터는 조선의 수도 한양 서쪽, 한강 북쪽 기슭의 낮은 산 행주였다. 한양은 1592년 6월부터 일본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은 명나라 군대가 한양을 되찾는 것을 도우려고 정예 군사와 승병으로 이루어진 작은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진을 쳤다. 한양의 일본군 장수들은 이 부대가 위협이 되기 전에 없애기로 했다.

새벽 무렵부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끈 일본군이 차례로 산을 공격했다. 조선군은 목책 뒤에서 활과 화포를 비롯한 화약 무기, 그리고 돌로 맞섰다. 날이 저물 무렵, 우키타 자신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다치자 일본군은 공격을 그만두고 한양으로 물러났으며, 가는 길에 많은 전사자를 불태웠다.

한국에서는 이 싸움을 1592년의 한산도 대첩·진주대첩(제1차 진주성 전투)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는다. 행주대첩은 방어전의 승리였다. 일본군을 수도에서 몰아낸 것은 아니었고, 권율 자신도 곧 행주를 떠나 더 유리한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명군의 진격이 멈춘 시점에 조선군이 수도 가까이에서 버틸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아래에서는 사료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어디에서 서로 엇갈리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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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권율의 길: 이치에서 한강까지

권율(1537–1599)은 직업 군인이 아니라 문신이었다. 1582년에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고, 1592년 전쟁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 목사가 되었다. 1592년 여름에는 전라도 군대의 한양 수복 북진에 참여했는데, 이 북진은 용인 부근에서 패배로 끝났다. 그는 그 패배를 부른 공격에 반대했었다. 이어 1592년 음력 7월, 황진과 함께 금산에서 전주로 넘어오는 길목인 이치(배티) 고개를 지켜 이름을 떨쳤다. 이 방어는 전주와 조선 최대의 곡창인 전라도 대부분을 일본군의 손에서 지키는 데 이바지했고, 권율은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593년 1월 무렵(1592년 음력 12월), 권율은 수도를 되찾는 일을 돕기 위해 1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용인의 패배를 거울삼아 곧장 한양으로 가지 않고 수원 부근의 독성산성(독산성)에 들어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우키타 히데이에는 배후의 이 군대를 걱정해 한양의 군사를 내보내 권율을 성 밖으로 끌어내려 했으나, 권율이 성을 굳게 지키며 그 진영을 기습하자 한양으로 물러났다.

권율은 수도에 더 가까이 다가가 명군의 한양 진격에 합세하려고, 조방장 조경을 보내 한양 서쪽에서 진을 칠 곳을 찾게 했다. 조경은 양천에서 한강을 건넌 곳에 있는 행주를 골랐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조경은 이틀 만에 목책을 완성했고, 권율은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 남겨 대군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꾸민 뒤 몰래 군사를 옮겼다. 그는 군사의 상당수를 전라병사 선거이에게 맡겨 강 남쪽의 별도 진영에 두고 한양의 일본군을 견제하게 했다.

그사이 북쪽의 전황은 바뀌어 있었다. 이여송이 이끈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1593년 2월 8일 평양을 되찾았다. 이여송은 한양으로 진격했지만 2월 27일 한양 북쪽 벽제관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패해 개성으로, 이어 평양으로 물러났다. 『징비록』은 이여송이 물러날 때 권율이 이미 행주에 있었다고 적는다. 명군이 떠나자 권율의 작은 군대는 수도 가까이에서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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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하루 동안의 공방: 1593년 3월 14일

행주는 높이 125m쯤 되는 작은 산 덕양산이다. 남쪽으로 한강이 흘러 조선군은 강을 등지고 있었고, 달아날 곳이 없었다. 뒤에 임금에게 전투를 보고한 신경희는 이곳을 “일면은 강가이고, 삼면은 구릉”이라고 설명했다. 조선군은 먼저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엮은 녹각을 설치한 뒤 흙과 돌로 성을 쌓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여기에 더해 성책을 안팎 두 겹으로 둘렀고, 조총 탄환을 피하도록 흙둑을 쌓았다고 적는다.

12일 새벽, 척후는 일본군이 좌우 두 날개로 나뉘어 붉은 깃발과 흰 깃발을 들고 한양 서북쪽 홍제원 쪽에서 오고 있다고 알렸다. 선봉 기병 100여 명이 먼저 다가왔고, 『선조실록』의 전투 기록에 따르면 곧이어 “1만여 기병”이 들을 뒤덮고 와서 산을 에워싸고 한꺼번에 돌격했다. 일본군은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올라왔고, 조선군은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화포와 각종 화약 무기를 쏘아 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한 현대 한국 서술은 일본군이 일곱 부대로 나뉘어 공격했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제1대는 고니시 유키나가, 제2대는 이시다 미쓰나리, 제3대는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끌었는데, 구로다는 높은 누대를 만들어 성 안으로 조총을 쏘게 했다. 이어 우키타 히데이에가 직접 제4대를 이끌고 나섰고, 그의 군사는 바깥 목책을 넘어 안쪽 목책까지 다가갔지만 우키타가 다쳐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물러났다. 이시다도 부상을 입었다. 깃카와 히로이에가 이끈 제5대는 목책에 불을 지르려 했으나 조선군이 미리 준비한 물로 껐고, 깃카와도 다쳤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승군이 지키던 서북쪽 자성(子城)에서 찾아왔다. 일본군이 그곳 목책 한 칸을 허물자 승군이 조금 물러났고 적이 밀려 들어왔다. 권율은 칼을 뽑아 물러나는 군사 몇 명을 베고 독전했으며, 목책을 다시 세웠다. 화살이 떨어져 갈 무렵 배가 새 화살을 싣고 왔다. 『선조수정실록』과 백과사전은 수사 이빈이 화살 수만 개를 배에 싣고 한강을 거슬러 왔다고 적는다. 늦은 오후 또는 저녁 무렵 일본군은 공격을 멈추었다. 그들은 전사자를 네 무더기로 모아 불태웠고,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날이 저물자 한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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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누가, 무엇으로 산을 지켰나

수비군은 여러 갈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심은 전라도의 관군으로, 『선조수정실록』은 이들을 “호남의 씩씩한 군사들”이라 부르며 모두 활을 잘 쏘았다고 적는다. 여기에 의병과, 승려들에게 무기를 들라고 호소한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 처영이 이끈 승병이 함께했다. 처영은 1592년부터 권율과 함께 싸워 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처영의 승병을 「행주대첩」 항목에서는 1,000명, 「처영」 항목에서는 700명으로 적는다. 조정 기록은 승군이 전선이 무너질 뻔했던 서북쪽 자성을 지켰다고 전한다.

수비군의 주무기는 활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일본군이 올려다보며 쏘아야 했기 때문에 탄환이 제대로 맞지 않은 반면, 조선의 궁수들은 쏘는 대로 맞혔다고 강조한다. 『선조실록』의 전투 기록은 화약 무기도 적는다. 크고 작은 승자총통, 폭발하는 포탄인 진천뢰, 그리고 그 밖의 화약 무기들이다. 신경희는 임금에게 싸움에는 돌이 가장 좋은데 그곳에 돌이 많아 모든 군사가 다투어 돌을 던졌다고 아뢰었다.

현대 서술은 화차에도 중요한 자리를 준다. 화차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는데, 앞선 형태는 수십 발의 화살이나 신기전을 한꺼번에 쏘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변이중이 1592년에 만든 화차는 승자총 40자루를 싣고 심지를 이어 차례로 쏘게 한 것이었다. 백과사전은 변이중의 화차와 권율의 지시로 만든 돌 던지는 장치(수차석포)가 행주에서 쓰였다고 적고, 영어 위키백과의 화차 항목은 화차 40대를 말한다. 이 글이 참고한 1593년의 조정 기록에는 화차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으므로, 그 수와 비중을 이 기록들로 확인할 수는 없다. 변이중의 수레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선조수정실록』은 같은 달 기사에서 변이중이 죽산의 일본군 진영을 공격했을 때 소가 끄는 그의 전차가 불타고 군사가 무너졌다고 적고, 신경희는 변이중이 수레를 만든다며 백성들에게 소를 내놓으라고 다그친다고 임금에게 호소했다.

권율의 군대는 바깥의 도움에도 기대고 있었다. 강 남쪽의 선거이 부대와 그 일대의 다른 조선군은 한양의 일본군을 견제하도록 배치되어 있었고, 배로 온 화살은 결정적인 순간에 도착했다. 그러나 모든 장수가 도운 것은 아니었다. 신경희는 양천 건너편과 다른 곳의 조선 장수들이 배를 타면 올 수 있었는데도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고 보고했고, 임금은 한강 이남의 장수들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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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전투 뒤: 파주, 칭송, 그리고 일본군의 한양 철수

권율은 행주에 머물지 않았다. 『징비록』에 따르면 그는 일본군이 다시 나와 반드시 보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책을 헐고 임진강 쪽으로 가서 도원수 김명원에게 합류했다. 유성룡은 큰길의 요충이면서 지세가 험해 지킬 만하다고 본 파주산성을 권율에게 지키게 했다. 『징비록』은 뒤에 일본군 한 부대가 파주산성 몇 리 앞까지 왔다가 공격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적는다.

승리는 곧바로 인정받았다. 조정은 권율의 품계를 자헌대부(정2품)로 올리고 조경 등 장수들에게 상을 주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튿날 명나라 장수 사대수가 싸움터를 보고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고 했으며, 이여송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전한다. 음력 3월에는 명의 경략 송응창이 조선에 자문을 보내 권율을 충신이자 명장이라 칭송하고 붉은 비단과 은 50냥을 상으로 보냈다. 권율은 같은 해(1593) 뒤에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가 되었다.

행주대첩 뒤 두 달 가까이 두 진영은 개성과 한양 사이에서 서로 노려보았다. 『선조수정실록』은 권율의 군대를 비롯한 경기의 조선군이 들락날락하며 공격해 일본군이 멀리 나가 땔나무를 할 수 없었고, 조선 수군은 한강 어귀까지 나아갔다고 적는다. 벽제관 전투 무렵 한양의 일본군은 5만 명가량이었다고 하는데, 일본군 진영은 식량 부족과 전염병에 시달렸고, 명군의 기습 부대가 용산의 일본군 곡식 창고를 불태웠다는 기록도 있다.

결국 일본군은 한양에서 직접 쫓겨난 것이 아니라, 교섭으로 맺은 합의에 따라 철수했다. 명의 사신 심유경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교섭했고, 1593년 5월 18일(음력 4월 18일) 일본군은 수도에서 철수해 남해안의 성들로 옮겨 갔다. 행주대첩은 평양 상실, 보급난, 강화 교섭과 함께 이 결정에 작용한 여러 압박 가운데 하나였다.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그 비중을 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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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같은 해 세계에서는(1593)

유럽에서 1593년은 새로운 전쟁과 전환의 해였다. 1593년 6월 22일, 합스부르크 군대가 크로아티아의 시사크를 포위한 오스만 군대를 무찔렀다. 이어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사이에 1606년까지 이어진 ‘장기 튀르크 전쟁’이 벌어졌다. 프랑스에서는 오랫동안 가톨릭 동맹과 싸워 온 개신교도 왕 앙리 4세가 왕위를 굳히려고 1593년 7월 25일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잉글랜드에서는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가 잉글랜드의 율리우스력으로 1593년 5월 30일(그레고리력 6월 9일)에 죽임을 당했고,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장시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펴냈다. 이 시는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 인쇄된 것으로 보이며, 런던의 극장들이 역병으로 문을 닫았을 때 쓰였다. 일본에서는 1593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났다. 후계자의 탄생은 이후 몇 해 동안 일본 정치를 좌우하게 된다.

이 사건들은 행주의 싸움과 아무 관련이 없다. 나란히 놓아 보면, 행주대첩이 있던 해가 유럽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바뀌던 해였고 잉글랜드에서는 새 문학이 나오던 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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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여인들, 돌, 그리고 ‘행주치마’

행주대첩에 얽힌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성 안의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입고 거기에 돌을 담아 군사들에게 날랐으며, 그래서 부엌에서 두르는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행주대첩」 항목은 부녀자들이 치마를 잘라 입고 돌을 날랐다는 일을 전투 서술의 일부로 적고, 여기서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명에는 “~고 한다”는 단서를 붙인다.

국어학자 조항범은 2006년 국립국어원의 『새국어생활』에 실린 글에서 이 낱말이 전투에서 나올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행주치마’의 옛 어형은 1593년보다 수십 년 앞선 16세기 문헌 『사성통해』에 이미 나온다. 그 앞부분은 무언가를 닦는 천을 가리키던 옛말로, 오늘날 ‘행주’(그릇 닦는 천)의 조상인데, 지명 행주(幸州)와 소리가 같아졌을 뿐이다. 이 낱말의 원래 뜻이 잊히자, 앞치마가 유명한 전투와 연결된 것이다.

그렇다고 행주에서 군사만 싸웠다는 뜻은 아니다. 1593년의 조정 기록은 군사들이 직접 돌을 던졌다고 적고, 영어 위키백과의 권율 항목 같은 현대 서술은 성 안에 백성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다만 그 조정 기록에는 여인들이 돌을 날랐다는 말이 없다. 행주치마 이야기는 전투의 증거가 아니라, 전투를 둘러싸고 나중에 자라난 전설로 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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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행주대첩을 기억하는 방식

기념은 거의 곧바로 시작되었다. 1602년 권율의 옛 막료와 군사들이 행주에 대첩비를 세웠다. 비문은 문장가 최립이 짓고 명필 한호(한석봉)가 썼으며, 뒷면의 글은 권율의 사위 이항복이 지었다. 비문은 권율이 정예군 2,300명을 거느렸다고 적는데, 지금은 마멸이 심해 부분적으로 수십 자밖에 알아볼 수 없다.

권율은 1599년에 세상을 떠났다. 1604년 전쟁의 공으로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1712년(음력 12월)에는 시호가 ‘충장(忠莊)’으로 고쳐 내려졌다. 19세기에는 행주에 그를 모시는 사당 기공사가 세워졌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841년), 1845년에는 대첩비가 새로 하나 더 세워졌다.

대한민국에서 행주산성은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같은 해 산 정상에 새 기념비가 세워졌다. 1970년에는 정화 사업으로 권율의 사당 충장사 등이 지어졌다. 2017년 이후의 발굴 조사로, 이 산이 1593년보다 훨씬 전부터 요새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처음 쌓은 돌 성벽은 7세기의 것이고, 흙 성벽은 고려 시대에 쌓은 것이다.

행주대첩은 나라 밖의 기억에도 자리를 잡았다. 『선조수정실록』은 만력제가 관원을 보내 칭찬하는 말을 전했으며, 권율의 많은 전과를 보니 조선의 백성이 아직 떨쳐 일어날 수 있겠다고 했다고 기록한다. 영어 위키백과에서 행주대첩은 무엇보다 화차가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한 싸움으로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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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병력과 전사자 세기: 사료가 말하는 것

수비군의 숫자는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선조실록』의 전투 기록은 권율이 군사 4천 명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선거이에게 맡겨 양천 강가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행주로 옮겼다고 적는다. 1602년 대첩비도 2,300명이라 하고, 새뮤얼 홀리의 책도 이 숫자를 따른다. 수십 년 뒤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권율이 정병 4천 명을 뽑아 강을 건넜고 선거이에게 나머지 전군을 맡겨 금천에 주둔하게 했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권율이 4,000명을 선거이에게 떼어 주었고 행주의 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고 하며, 「처영」 항목에서는 3,800명으로 적는다. 위키백과는 또 다른 숫자를 든다. 영어판 권율 항목은 2,800명, 영어판 화차 항목은 3,400명, 한국어판 행주대첩 항목은 의병 6,000명을 포함한 9,000명가량이다. 일부 숫자는 떼어 놓은 부대나 승병·의병·백성처럼 셈에 넣는 집단이 다르지만, 정병의 수 자체도 기록마다 엇갈리며,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각 숫자를 서로 맞출 수 없다.

공격군에 대해, 신경희는 임금의 물음에 “3만에 불과하였다”고 답했고 『선조수정실록』은 “수만 명”이라 적는다. 현대 한국 서술은 3만여 명으로 적는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동원령의 병력 수와 몇 주 뒤 한양에서 실시한 점호 수로 각 부대를 나열하고, 일본 역사가 와타나베 도스이가 실제로 공격한 병력을 1만 명 이하로 추정했다고 인용한다. 산이 작아 한꺼번에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었으므로, 현장에 온 병력과 실제로 싸운 병력은 크게 다를 수 있다.

일본군의 피해도 불확실하다. 조정 기록은 조선군이 벤 머리가 130급이라 하고, 『선조실록』의 전투 기록은 세 차례 공격 동안 일본군 전사자 수십 명, 부상자 100여 명을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불태운 시체 말고도 버려진 시체가 200구가 넘었고, 깃카와의 부대에서만 160명이 죽었다고 덧붙인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뒷날 일본 측 사신이 전사자를 약 400명이라고 밝혔다는 보고를 인용한다. 후대의 저작은 훨씬 큰 숫자를 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처영」 항목은 사상자 2만 4천 명, 영어 위키백과의 권율 항목은 사상자 1만 명 이상이라 적는다. 기록에는 수백 명 규모의 집계나 추산이 나오지만, 많은 시체가 불태워지거나 옮겨졌으므로 전체 전사자 수를 확정할 수는 없다. 훨씬 큰 후대의 추산도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확인할 수 없고, 부상자 수는 알 수 없다. 조선군의 피해는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 나오지 않는다. 신경희는 전사자를 거두어 장사 지냈고, 거둘 사람이 없는 이는 묻고 나무를 꽂아 표시했다고만 아뢰었다.

전투의 모습조차 기록마다 다르다. 현대 서술은 일곱 부대를 말하지만,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이 세부의 최초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 신경희는 임금에게 일본군이 8–9차례 진격했다 물러났다고 아뢰었고, 『선조실록』의 전투 기록은 세 번 진격하고 세 번 물러났다고, 『징비록』은 세 진이 번갈아 공격했다고 적는다. 싸움은 신경희의 말로는 묘시(오전 5–7시)부터 신시(오후 3–5시)까지, 다른 기록으로는 유시(오후 5–7시)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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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사료와 그 한계

가장 이른 기록은 전투 12일 뒤인 2월 24일 자 『선조실록』에 실린 신경희의 구두 보고이다. 사건과 가깝지만 짧고 개인적이다. 신경희는 임금의 물음에 답하며 권율의 통솔을 칭찬하고, 이 자리를 빌려 다른 관리들을 비판한다. 같은 날의 기사에는 더 긴 전투 기록도 있는데(3월의 자문을 인용하므로 얼마 뒤에 정리된 것이다), 2,300명의 병력, 일본군의 진격 순서, 무기, 시체를 불태운 일과 함께, 구원하지 않은 장수들을 조사하라는 임금의 명령이 실려 있다.

기록은 세부에서 서로 어긋난다. 『선조수정실록』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수사 이빈이 화살을 날라 왔다고 하지만, 신경희는 임금에게 화살을 날라 온 사람이 그가 충청 병사라고 부른 정걸이었다고 아뢰었고(다른 기록은 정걸을 충청 수사로 적는다), 일본군이 물러갈 때 전라도 조운선 40여 척이 양천 포구에 나타난 것을 때맞춘 성원으로 보았다. 이빈의 이름도 기록에 따라 두 가지 한자(李蘋, 李薲)로 적히는데, 『징비록』은 뒤의 글자를 당시 파주에 있던 다른 인물, 순변사 이빈에게 쓴다. 신경희는 또 편전(조선식 짧은 화살)에 맞은 자가 많았으니 일본군 안에 조선 사람이 끼어 싸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뒤에 쓰인 유성룡의 『징비록』은 짧고 영웅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전한다. 군사들은 겁에 질려 흩어지려 했지만 강이 뒤에 있어 싸울 수밖에 없었고, 일본군은 세 진으로 나뉘어 번갈아 공격했다가 모두 패했으며, 권율은 분을 풀려고 일본군 시체를 찢어 숲의 나무에 걸게 했다는 것이다. 현대 서술의 생생한 세부, 곧 이름이 붙은 일곱 부대, 누대 위의 조총수, 허리에 찬 재 주머니, 돌을 나른 여인들은 이 글이 참고한 조정 기록이나 『징비록』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세부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현대 서술에 나오는데, 이 백과사전은 당대 사람이 남긴 사찬 기록 『난중잡록』과 훨씬 뒤의 편찬물 『연려실기술』 등을 참고문헌으로 든다.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각 세부가 어디에서 왔는지, 목격 증언에 근거했는지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일본군 부대의 편성도 한국 측과 일본 측 서술이 서로 다르다.

일본 측 사료는 더 빈약하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3만여 명이라 적은 요시미 가문의 조선 일기 같은 종군 기록과, 일본군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조선역』을 인용한다. 이것들은 조선 기록과 나란히 놓고 볼 수 있지만,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그 신빙성을 자세히 판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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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행주대첩은 얼마나 중요했나

한국의 전통적 평가는 행주대첩을 한산도·진주와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는다. 까닭은 분명하다. 명군의 도움 없이 작은 조선군이, 총대장이 이끈 한양의 일본군 주력을 물리쳤고, 일본의 주요 장수 여럿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그것도 명군이 벽제관에서 패해 연합군의 진격이 멈춘 지 몇 주 뒤의 일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명나라 장수들의 칭찬은 당대 사람들이 이를 큰 성과로 보았음을 보여 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승리가 권율이 도원수가 되는 데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당대 사람들은 이 승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신경희가 보고하는 자리에서 심희수는 이 승리를 “천행”이라 했다. 전군이 거의 무너질 뻔했고, 가까운 장수들은 구원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이튿날 다시 오지 않은 것도 사방에 조선군이 진을 치고 있어 명군이 이미 물러간 것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율 자신도 행주가 지키기에 너무 노출된 곳이라 보고 곧 옮겨 갔다.

두 달 뒤 일본군의 한양 철수에 이 전투가 얼마나 이바지했는지에 대해서도 역사가들의 견해는 갈린다. 한국 측 서술은 일본군의 땔감·식량 수집을 막은 습격과 함께 이 전투를 수도를 지킬 수 없게 만든 압박의 하나로 본다. 명의 역할에 더 무게를 두는 이들도 있다. 케네스 스워프의 연구는 명의 지상 개입, 무엇보다 평양 탈환이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다고 본다. 한양을 떠나기로 한 결정 자체는 명과 일본의 교섭을 통해 이루어졌다. 식량 부족과 전염병, 곡식 창고 소각도 일본군을 압박했으며,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한 전투의 효과를 이것들과 떼어 낼 수 없다.

사료들이 함께 말하는 것은 더 좁다. 1593년 3월의 하루, 강을 등진 요새화된 산 위에서 규모에 이견이 있는 조선군이 훨씬 큰 일본군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 냈고, 일본군이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혔으며, 수도 가까이에 조선군을 온전히 남겨 두었다. 이 승리는 북쪽의 명군, 보급난, 강화 교섭과 더불어 일본군이 1593년 5월 한양을 포기하게 된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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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강을 등진 싸움
행주는 한강을 등지고 있었다. 조정 기록과 『징비록』은 달아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수비군이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높이와 방어 시설
녹각·목책·흙둑으로 둘러싼 산 위의 작은 군대는 훨씬 큰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공격군은 비탈을 번갈아 올라와야 했고, 조총의 효과도 떨어졌다.
여러 갈래의 싸움꾼
전라도 관군, 의병, 승병이 함께 싸웠고, 승병은 가장 위험한 구역 가운데 하나를 지켰다.
화살, 돌, 그리고 화약
기록은 화포나 진천뢰 못지않게 활과 돌을 강조한다. 화차는 현대 서술에서 두드러지지만, 이 글이 참고한 조정 기록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강을 통한 보급
결정적인 순간 배로 온 화살은 한강이 수비군을 가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돕기도 했음을 보여 준다.
방어전의 승리
행주대첩은 공격을 막아 냈지만 수도를 되찾지는 못했다. 일본군은 두 달 뒤 여러 방향의 압박 속에서 교섭을 통해 한양을 떠났다.
전설과 기록
행주치마 같은 대중적인 이야기는 전투를 둘러싸고 자라났다. 이른 조정 기록과 후대 편찬물을 비교하면 어떤 세부가 기록으로 뒷받침되는지 알 수 있다.

기록

  1. 1592년 — 음력 7월(양력 8월): 권율과 황진이 전주로 가는 길목인 이치를 지킨다. 권율은 전라도 관찰사가 된다.
  2. 1593년 — 1월 무렵(1592년 음력 12월): 권율이 1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해 수원 부근 독성산성에 들어간다.
  3. 1593년 — 2월 8일: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되찾는다.
  4. 1593년 — 2월 27일: 이여송의 명군이 벽제관 부근에서 패해 물러난다.
  5. 1593년 — 3월 14일(음력 2월 12일): 행주대첩.
  6. 1593년 — 3월 26일(음력 2월 24일): 신경희가 선조에게 승첩을 보고한다.
  7. 1593년 — 5월 18일(음력 4월 18일): 일본군이 교섭 끝에 한양에서 철수한다.
  8. 1593년 — 권율이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가 된다.
  9. 1599년 — 권율이 세상을 떠난다.
  10. 1602년 — 권율의 막료와 군사들이 행주대첩비를 세운다. 비문은 최립이 짓고 한호가 썼다.
  11. 1963년 — 행주산성이 사적으로 지정되고, 산 정상에 새 기념비가 세워진다.
  12. 1970년 — 정화 사업으로 사당 충장사가 지어진다.
  13. 2006년 — 국어학자 조항범이 ‘행주치마’라는 낱말이 전투보다 오래되었음을 밝힌다.

용어 풀이

행주산성
지금의 고양시 한강 가 덕양산에 있는 산성으로, 행주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목책과 녹각
목책은 말뚝을 잇대어 박은 울타리이고, 녹각(사슴뿔)은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엮어 늘어놓은 장애물이다. 둘 다 공격군의 발을 묶어 수비군이 쏘아 맞힐 수 있게 했다.
화차
여러 자루의 총이나 화살·신기전 발사틀을 실은 조선의 무기 수레로, 형태가 여러 가지였다. 변이중이 1592년에 만든 화차는 승자총 40자루를 싣고 차례로 쏘게 한 것이다.
진천뢰
화포로 쏘거나 던지면 떨어진 뒤 터지는 조선의 폭발 포탄.
의승군(승병)
임진왜란 때 무기를 든 승려들로, 상당수가 휴정의 호소에 응했다. 행주에서는 처영이 이끌었다.
수사
조선의 도(道)별 수군 지휘관인 수군절도사. 예를 들어 경기수사 이빈.
도원수
전시에 조선군 전체를 지휘하던 총사령관. 권율이 행주대첩 뒤 이 자리에 올랐다.
행주치마
부엌일을 할 때 두르는 앞치마. 흔히 전투와 연결되지만 낱말이 전투보다 오래되었으며, 앞부분은 닦는 천을 뜻하던 옛말이다.
3대 대첩
한산도 대첩(1592), 진주대첩(1592), 행주대첩(1593). 전통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가장 큰 승리로 꼽힌다.
음력(태음태양력)
조선이 쓴 역법. 달은 달의 차고 기움을 따르고, 해의 운행과 맞추려고 이따금 윤달을 넣는다. 날짜를 양력(그레고리력)으로 바꾸어야 한다.

묻고 답하기

행주의 여인들이 치마로 싸움을 이겼나요?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행주치마’라는 낱말은 전투보다 오래되었어요. 그래서 앞치마 이름이 전투에서 온 것은 아니에요. 1593년의 조정 기록은 군사들이 돌을 던졌다고 적지만, 여인들이 돌을 날랐다는 말은 없어요.

몇 명이 싸웠나요?

정확히는 아무도 몰라요. 조정 기록과 1602년 대첩비는 행주의 권율 군을 정병 2,300명으로 적고, 다른 자료는 3,800명, 4,000명, ‘1만 명이 못 되는’ 규모라고 해요. 일본군은 3만 명까지로 보고되었는데, 한 일본 역사가는 실제로 공격한 병력이 1만 명 이하였을 것이라고 보았어요.

일본군은 왜 행주를 공격했나요?

권율의 군대가 일본군이 차지한 수도 가까이에 있어서, 특히 명군이 다시 오면 큰 위협이 될 수 있었어요. 일본군 장수들은 명군이 없는 틈에 단번에 이 군대를 없애려 했어요.

권율은 이기고 나서 왜 행주를 떠났나요?

더 큰 공격이 다시 올 것으로 보고, 작은 산성인 행주가 너무 노출되어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북쪽의 더 험한 파주산성으로 옮겼는데, 일본군은 뒤에 그곳 가까이 왔다가 공격하지 않고 돌아갔어요.

날짜는 2월 12일인가요, 3월 14일인가요?

둘 다 같은 날이에요. 기록에 적힌 날짜는 음력 2월 12일이고, 이를 양력으로 바꾸면 1593년 3월 14일이에요. ‘양력 2월 12일’처럼 쓰면 음력 달을 양력에 섞은 것이 돼요.

행주대첩 때문에 일본군이 서울에서 물러났나요?

그것만으로는 아니에요. 일본군은 두 달 더 한양에 머물다가, 식량 부족과 전염병, 조선군의 습격, 명군의 압박 속에서 1593년 5월 교섭 끝에 떠났어요. 행주대첩은 그 압박들 가운데 하나였어요.

승병은 누구였나요?

큰스님 휴정의 호소에 응해 무기를 든 승려들이에요. 행주에서는 휴정의 제자 처영이 이끌었고, 전선이 무너질 뻔했던 서북쪽 자성을 지켰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이장희, 행주대첩(幸州大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 권율(權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종익, 처영(處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4. 고양 행주산성(高陽 幸州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5. 행주대첩비 <구비>(幸州大捷碑 <舊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6. 화차(火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7. 벽제관 전투(碧蹄館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8. 이장희, 임진왜란(壬辰倭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9.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24일 1번째 기사: 신경희가 권율의 행주 산성 대첩을 보고하자 인견하고 전투 상황을 상세히 묻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0.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24일 2번째 기사: 권율이 접전할 때 구원하지 않은 장수를 조사하여 추고하라고 전교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1.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24일 6번째 기사: 평양 수복 후에 여러 장수가 경성으로 모인 일과 행주 산성의 대첩에 대한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2.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2월 1일 8번째 기사: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3.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2월 1일 9번째 기사: 권율의 품계를 자헌으로 올리고 무장 조경 등에게 차등 있게 직책을 주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4.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2월 1일 10번째 기사: 관군의 공격으로 기세가 꺾인 적을 치고자 하였으나 제독이 따르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5.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2월 1일 12번째 기사: 소모사 변이중이 죽산의 적둔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6. 숙종실록 52권, 숙종 38년(1712) 12월 25일 1번째 기사: 황흠·신심·권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권율의 시호를 충장으로 고쳐 내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7. 유성룡(柳成龍), 『징비록(懲毖錄)』 권2(한문 원문). 위키문헌(중국어판)
  18. 조항범, 잘못 알고 있는 어원 몇 가지(7), 『새국어생활』 16권 3호. 국립국어원, 2006
  19. Battle of Haengju. 위키백과(영어)
  20. 행주대첩. 위키백과(한국어)
  21. 幸州山城の戦い. 위키백과(일본어)
  22. Kwŏn Yul (general). 위키백과(영어)
  23. 권율. 위키백과(한국어)
  24. 고양 행주산성. 위키백과(한국어)
  25. Hwacha. 위키백과(영어)
  26. Battle of Byeokjegwan. 위키백과(영어)
  27. 새뮤얼 홀리(Samuel Hawley),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2005
  28. 케네스 스워프(Kenneth M. Swope), A Dragon’s Head and a Serpent’s Tail: Ming China and the First Great East Asian War, 1592–1598.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09
  29.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30. Battle of Sisak. 위키백과(영어)
  31. Henry IV of France. 위키백과(영어)
  32. Christopher Marlowe. 위키백과(영어)
  33. Venus and Adonis (Shakespeare poem). 위키백과(영어)
  34. Toyotomi Hideyori. 위키백과(영어)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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