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십자군 전쟁

라틴어: iter, peregrinatio, passagium / 아랍어: al-ḥurūb al-ṣalībiyya(후대의 용어)

1095–1291년 ·

한 문장으로

십자군 전쟁은 1095년 교황의 호소로 시작되어 서유럽 가톨릭 세계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그 주변 땅을 차지하고 지키려 한 일련의 종교 전쟁으로, 정복과 폭력, 교류와 쓰라린 기억을 남겨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예루살렘은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 세 종교 모두에게 소중한 도시였어요.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가 그곳에서 죽고 다시 살아났다고 믿었고, 많은 사람이 예수의 무덤까지 순례 가기를 꿈꾸었지요. 그때 예루살렘은 무슬림 통치자들이 다스리고 있었어요.

1095년, 가톨릭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이 프랑스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어요. 기사들에게 동쪽으로 가서 그곳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돕고 예루살렘을 되찾으라고 했지요. 이 길고 위험한 여행을 떠나면 지은 죄를 크게 씻어 준다고 약속했어요. 수많은 사람이 옷에 천으로 된 십자가를 꿰매 달았어요. 그래서 이들을 ‘십자가 표시를 한 사람들’, 곧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첫 번째 큰 군대는 3년 가까이 걸어서 이동했어요. 가는 길에 일부는 독일 지방 도시의 유대인 가족들을 공격했는데, 이것은 끔찍한 범죄였어요. 1099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그 뒤 지중해 동쪽 해안을 따라 작은 그리스도교 나라들을 세웠지요.

무슬림 통치자들은 조금씩 반격했어요. 그중 가장 유명한 살라딘은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았어요. 유럽은 그 뒤 200년 동안 여러 번 십자군을 더 보냈지만, 1291년 마지막 큰 십자군 도시 아크레가 무너졌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십자군을 아주 다르게 기억해요. 예전에는 용감한 모험 이야기로 전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은 침략과 학살로 기억하지요. 역사가들은 그리스도교인, 무슬림, 유대인, 비잔티움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두 들으면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한눈에 보기

시기
지중해 동부를 향한 십자군은 보통 1095/1096~1291년으로 본다. 다른 적을 겨냥한 십자군은 15~16세기까지 이어졌다
주요 무대
레반트(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튀르키예 남동부), 이집트,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지나는 경로
호소한 이
로마 교황들.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가 처음 호소했다
주요 상대
셀주크 튀르크, 파티마 왕조, 시리아·이집트의 장기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 이후 맘루크 왕조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
주요 전환점
예루살렘 점령(1099),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상실(1187),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1204), 아크레 함락(1291)
사상자
알 수 없다. 중세의 숫자는 흔히 과장되었다. 병사·순례자·도시 주민·유대인 공동체의 피해가 매우 컸던 것은 분명하다

쉬움

십자군 전쟁이란 무엇인가

십자군 전쟁은 가톨릭교회가 거룩하고 공덕이 되는 일이라고 선포한 전쟁이다. 참가하는 사람은 서약을 하고 옷에 십자가를 달았다. 교회는 그 대가로 영적인 보상, 무엇보다 죄에 따르는 벌을 면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떠나 있는 동안 가족과 재산을 보호해 주었다.

가장 잘 알려진 십자군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성지’라고 부른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목표로 했다. 제1차 십자군(1096~1099)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지중해 동부 해안에 라틴 그리스도교 국가 네 곳을 세웠다. 이후 두 세기 동안 이 나라들을 지키거나 되찾기 위해 수많은 원정이 이어졌으나, 1291년 마지막 거점 아크레가 맘루크 왕조에 함락되었다.

‘십자군’이라는 말 자체는 첫 참가자들이 쓴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정’, ‘순례’, ‘십자가를 지다’라고 했다. 당시 무슬림 저술가들은 침입자들을 그저 ‘프랑크인(알이프랑지)’이라 불렀고, 이 전쟁들을 특별한 범주로 보지 않았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이름과 제1차·제2차 같은 번호는 후대 역사가들이 붙인 것이다.

[1][2][8]

쉬움

왜 시작되었나

11세기에 셀주크라는 튀르크계 전사 집단이 중앙아시아에서 중동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그리스어권 그리스도교 제국, 곧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를 무찔렀고, 곧 튀르크계 세력이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차지했다. 예루살렘은 셀주크와 이집트에 근거를 둔 시아파 왕조인 파티마 왕조 사이를 오갔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서방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 요청을 훨씬 큰 일로 키웠다.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그는 서유럽 기사들에게 동방의 그리스도교인을 돕고 예루살렘을 해방하라고 호소했다. 공의회의 공식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기록된 여러 판본의 연설만 전하는데 그 내용이 서로 똑같지 않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응했을까? 역사가들은 여러 이유를 함께 든다. 깊은 신앙심과 죄에 대한 두려움, 순례의 유행, 교회 개혁 운동이 기사들의 폭력을 ‘정당한 목적’으로 돌리려 한 점,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끌려는 교황의 뜻, 형제와 사촌이 함께 떠나게 만든 가문 관계망, 그리고 일부에게는 땅과 재물과 모험에 대한 기대 등이다. 예전 연구는 탐욕이나 ‘땅 없는 차남들’을 강조했지만, 최근 많은 역사가는 십자군 참가 비용이 워낙 컸기 때문에 종교적 동기가 매우 중요했을 것이라고 본다.

[3][1][8][9]

쉬움

누가 싸웠나

십자군 쪽에는 프랑스, 독일 지역, 이탈리아, 잉글랜드, 플랑드르, 뒤에는 스칸디나비아와 헝가리의 기사와 영주들이 있었고, 귀족이 아닌 순례자와 성직자, 일부 여성도 많이 따라갔다. 베네치아·제노바·피사 같은 이탈리아 해상 도시는 특권을 얻는 대가로 배와 교역을 제공했다.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뒤이어 튜턴 기사단 같은 기사 수도회는 십자군 국가의 상설 방어군이 되었다.

맞은편에 하나의 ‘이슬람 세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로 경쟁하는 튀르크계 군주들, 셀주크 술탄, 카이로의 파티마 칼리프,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 그리고 때로는 서로를 견제하려고 프랑크인과 손잡은 도시 통치자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장기, 누르 앗딘, 살라딘 같은 지도자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합했고, 마침내 맘루크 술탄들이 프랑크인을 몰아냈다.

그 사이에 낀 사람도 많았다. 아르메니아인, 시리아 그리스도교인, 그리스 정교회 신자 같은 동방 그리스도교인, 유럽과 레반트의 유대인, 그리고 대부분 무슬림이거나 동방 그리스도교인이면서 프랑크인 영주 아래에서 계속 농사를 지은 농민들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처음에는 십자군의 동맹이었다가 경계하는 이웃이 되었고, 1204년에는 스스로 피해자가 되었다.

[1][9]

중급

제1차 십자군과 십자군 국가(1096~1149)

1096년 봄, 제후들의 본대가 떠나기 전에 흔히 은자 피에르와 연결되는 민중 무리가 먼저 출발했다. 그중 에미코 백작이 이끈 무리를 비롯한 일부는 라인란트의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등지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개종을 강요했다. 히브리어 연대기는 세례 대신 죽음을 택한 가족들을 전한다. 이 민중 십자군은 1096년 10월 아나톨리아에서 튀르크군에게 거의 전멸했다.

제후들의 본대는 1096~10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였다. 이들은 비잔티움군과 함께 니케아를 함락하고(1097) 도릴라이온에서 셀주크군을 무찔렀으며, 굶주림과 질병으로 많은 이가 죽은 안티오키아 포위전(1097~1098)을 견뎠다. 불로뉴의 보두앵은 에데사를 차지해 첫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라틴 사료와 무슬림 사료 모두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의 학살을 전한다. 희생자 수는 논쟁 중이다. 13세기 역사가 이븐 알아시르는 7만 명이라고 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지나치게 많다고 보며, 카이로 게니자에서 발견된 편지 등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거나 살아남은 주민도 있었음을 보여 준다.

승자들은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에데사 백국을 세웠다. 이 나라들은 소수의 프랑크인 지배층, 이탈리아 상인, 성채와 기사 수도회, 그리고 유럽에서 끊임없이 오는 증원에 기대어 유지되었다. 1144년 튀르크계 통치자 장기가 에데사를 점령하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독일 왕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1147~1149)이 일어났다. 이 원정은 1148년 다마스쿠스 포위를 포기하면서 참담하게 실패했다.

[5][6][1]

중급

살라딘, 이후의 십자군, 아크레 함락(1169~1291)

유럽에서 살라딘으로 알려진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는 1169~1171년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아 파티마 칼리프 왕조를 끝내고 점차 시리아까지 지배를 넓혔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주력군을 섬멸했고, 10월에는 협상 끝에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1099년과 달리 도시의 그리스도교 주민은 대부분 몸값을 내고 떠날 수 있었지만, 몸값을 내지 못한 많은 사람은 노예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그리고 도중에 물에 빠져 죽기 전까지는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이끈 제3차 십자군(1189~1192)은 아크레와 해안 대부분을 되찾았으나 예루살렘은 되찾지 못했다. 1191년 아크레 함락 뒤 몸값 협상이 틀어지자 리처드는 연대기에 따르면 약 2,700~3,000명의 무슬림 포로를 처형하게 했다. 1192년의 휴전으로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베네치아에 큰 빚을 진 제4차 십자군(1202~1204)은 그리스도교 도시 자라로, 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방향을 틀어 1204년 4월 그 도시를 약탈했다. 십자군은 그곳에 라틴 제국을 세웠고, 비잔티움은 1261년에야 수도를 되찾았다. 이후 원정은 이집트를 노렸다(제5차 십자군 1217~1221, 루이 9세의 십자군 1248~1254).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29년 큰 전투 없이 조약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았으나 1244년 다시 잃었다. 맘루크 술탄들, 특히 바이바르스와 뒤이은 알아슈라프 할릴은 남은 프랑크인 도시를 하나씩 점령했고, 1291년 5월 아크레가 함락되었다.

십자군은 다른 대상을 향하기도 했다. 이베리아반도의 무슬림, 발트해 주변의 이교도 민족, 남프랑스의 카타리파 ‘이단’(알비파 십자군, 1209~1229), 심지어 교황과 정치적으로 대립한 그리스도교 세력까지 겨냥했다. 이 모두를 ‘진짜’ 십자군으로 셀지를 두고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1][10]

중급

희생자와 평범한 사람들

믿을 만한 전체 사망자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와 무슬림을 막론하고 중세 연대기 작가들은 효과를 노려 큰 어림수를 썼고,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다만 인명 피해가 매우 컸다는 것은 분명하다. 군대 전체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고, 예루살렘(1099), 콘스탄티노폴리스(1204), 아크레(1291) 같은 도시는 학살이나 대규모 노예화를 겪었으며, 포로가 처형되기도 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동방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피해를 입었다. 1096년 라인란트 학살에 이어 제2차 십자군 설교 때, 그리고 1189~1190년 무렵 잉글랜드의 요크 등지에서도 공격이 있었다. 유대인에게 이 시기는 히브리어 연대기와 전례시에 기록된 오랜 박해의 기억이 되었다.

십자군 국가에서도 농촌 주민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나 동방 그리스도교인이었다. 이들의 경험은 추적하기 어렵지만, 시리아 귀족 우사마 이븐 문키드의 회고록 같은 사료는 멸시와 약탈, 포로 생활과 함께 일상적인 접촉, 교역, 의술 교류, 때로는 우정까지 보여 준다. 동방 그리스도교인은 양쪽 모두에게 의심받기도 했다. 비잔티움 사람들은 1204년을 같은 그리스도교인의 깊은 배신으로 기억했다.

[5][7]

중급

단기적·장기적 영향

단기적으로 십자군은 200년 가까이 존속한 라틴 국가들을 만들었고, 베네치아와 제노바에 새로운 부와 힘을 주었으며, 교황권의 위신을 높였다. 무슬림 쪽에서는 오랜 싸움이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지하드 이념을 강화했고, 누르 앗딘, 살라딘, 맘루크 같은 통치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204년의 약탈은 비잔티움을 영구히 약화시켜 훗날 오스만 제국이 유럽으로 진출하기 쉽게 만들었다.

장기적으로 십자군은 성지 상실 이후에도 살아남은 제도를 발전시켰다. 대사(大赦), 전쟁 비용을 위한 성직자 과세, 그리고 뒤에 프로이센·로도스·몰타를 다스린 기사 수도회가 그것이다. 성전(聖戰) 관념은 이베리아의 레콩키스타를 형성했고, 일부 역사가는 뒷날 유럽의 해외 팽창의 언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라틴 교회와 정교회의 관계는 크게 손상되었다.

십자군이 아랍의 학문과 사치품을 유럽에 가져왔다고들 하지만,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주장에 신중하다. 학문 전달의 상당 부분은 십자군 국가보다 에스파냐와 시칠리아를 통해 이루어졌고, 지중해 교역은 어차피 늘어나고 있었다. 십자군은 여러 접촉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1][8][9]

중급

사람들은 십자군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서유럽에서 십자군은 오랫동안 고귀한 모험으로 기억되었다. 토르콰토 타소는 『해방된 예루살렘』(1581)에서 이를 서사시로 만들었다. 볼테르나 에드워드 기번 같은 계몽주의 작가들은 광신이라고 비판했고, 19세기 낭만주의·민족주의 작가들은 특히 프랑스와 영국에서 십자군 왕들을 국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크루세이드(crusade)’라는 말은 도덕적 운동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은 이 용법을 불편하게 여긴다.

아랍어와 튀르크어권에서 중세 저술가들은 프랑크인을 여러 적 가운데 하나로 다루었고, 몽골이 더 큰 위협으로 여겨질 때가 많았다. 캐럴 힐렌브랜드 등 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가리키는 별도의 아랍어 용어와 강한 집단 기억이 특히 19세기 말, 유럽 식민주의 시대에 자리 잡았다고 지적한다. 이때 작가들은 십자군을 서구 침략의 초기 형태로 보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정치 언어에서 저항과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에게 1204년은 아픈 기억으로 남았고,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무엇보다 라인란트 학살을 통해 십자군을 기억한다.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1983)은 많은 서구 독자에게 무슬림의 시각을 소개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여러 극단주의 집단이 십자군 이미지를 악용해 왔는데, 이 점 때문에라도 역사가들은 정확하고 균형 잡힌 교육을 강조한다.

[4][10]

심화

1차 사료

제1차 십자군에 관한 라틴어 서술로는 작자 미상의 『프랑크인의 업적(Gesta Francorum)』, 샤르트르의 풀셰, 아길레르의 레몽, 그리고 이를 고쳐 쓴 로베르 르무안, 돌의 발드리크, 노장의 기베르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여럿이 클레르몽 연설의 판본을 전한다. 티레의 기욤은 12세기 후반 예루살렘 왕국의 대표적 역사서를 썼다. 십자군 참가자의 편지, 출발과 재산 담보를 기록한 증서, 교황 칙서와 법률 문서는 더 개인적인 다른 시각을 준다.

비잔티움의 시각은 무엇보다 안나 콤니니가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의 생애를 쓴 『알렉시아스』, 그리고 1204년에 대해서는 니키타스 코니아티스에게서 얻는다. 아랍어 사료로는 이븐 알칼라니시의 다마스쿠스 연대기, 이븐 알아시르의 세계사, 살라딘의 측근 바하 앗딘 이븐 샷다드와 이마드 앗딘 알이스파하니가 쓴 살라딘 전기, 우사마 이븐 문키드의 회고록이 있다. 히브리어 연대기는 1096년의 박해를 서술한다. 에데사의 마테오스, 시리아인 미카엘 같은 아르메니아·시리아 연대기 작가들은 동방 그리스도교인의 경험을 기록했다.

사료마다 목적이 있다. 신의 역사(役事)를 찬양하거나, 후원자를 칭송하거나, 재난을 애도하거나, 정책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서로 비교하고, 성채와 도시에 대한 고고학 증거와 맞대어 읽으며, 특히 숫자와 연설은 매우 비판적으로 다룬다.

[3][4][7]

심화

역사가들의 논쟁

첫째 논쟁은 정의에 관한 것이다. 이른바 ‘전통주의자’는 동방과 예루살렘을 향한 원정만을 십자군으로 본다. 조너선 라일리스미스와 밀접하게 연결된 ‘다원주의자’는 교황의 승인, 서약, 십자가, 대사 같은 법적·영적 특징으로 십자군을 정의하므로 에스파냐, 발트해, 이단을 향한 십자군도 포함한다. 그 밖에 민중의 열광이나 성전 일반을 강조하는 더 넓은 관점도 있다.

둘째 논쟁은 동기에 관한 것이다. 19~20세기 저술가들은 흔히 경제, 인구 압력, 식민 야심으로 십자군을 설명했고, 일부는 십자군 국가를 초기 유럽 식민지로 보았다. 1970~1980년대 이후 라일리스미스와 제자들의 증서 연구는 신앙심과 참가자들이 치른 막대한 비용을 강조했다. 크리스토퍼 타이어먼 등은 각 원정이 조직·재정·정치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강조하며 단일한 설명을 경계한다.

셋째는 라틴 세계 바깥의 시각에 대한 연구다. 캐럴 힐렌브랜드, 폴 M. 콥 등의 연구는 십자군을 이슬람 중동의 더 넓은 역사 속에 놓고, 당대 많은 무슬림에게 프랑크인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지역적 문제였음을 보여 주었다. 역사가들은 젠더, 동방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의 경험, 십자군 기억의 현대 정치적 이용, 그리고 ‘십자군’이라는 말을 계속 써야 하는지의 문제까지 살피고 있다.

[4][8][9][10]

주요 전투 (40)

  1. 크세리고르돈 공방전1096년
  2. 안티오키아 공방전1097–1098년
  3. 도릴라이움 전투1097년
  4. 니케아 공방전1097년
  5. 마라 공방전1098년
  6. 예루살렘 공방전1099년
  7. 아스칼론 전투1099년
  8. 멜리테네 전투1100년
  9. 하란 전투1104년
  10.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1119년
  11. 아자즈 전투1125년
  12. 에데사 공방전1144년
  13. 리스본 공방전1147년
  14. 도릴라이온 전투1147년
  15. 다마스쿠스 공방전1148년
  16. 이나브 전투1149년
  17. 아스칼론 공성전1153년
  18. 몽기사르 전투1177년
  19. 마르지우윤 전투1179년
  20. 하틴 전투1187년
  21. 예루살렘 공방전 (1187년)1187년
  22. 크레송 전투1187년
  23. 티레 공방전1187–1188년
  24. 아크레 공성전 (1189년~1191년)1189–1191년
  25. 이코니움 전투1190년
  26. 아르수프 전투1191년
  27. 야파 전투1192년
  28. 자라 포위전1202년
  29.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 (1203년)1203년
  30.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204년)1204년
  31. 뮈레 전투1213년
  32. 다미에타 공성전1218–1219년
  33. 린다니세 전투1219년
  34. 페이푸스호 전투1242년
  35. 예루살렘 공방전1244년
  36. 포르비 전투1244년
  37. 파리스크르 전투1250년
  38. 만수라 전투1250년
  39. 베젠베르크 전투1268년
  40. 아크레 공방전1291년

핵심 개념

십자가를 지다
십자군 참가는 엄숙한 서약을 하고 천 십자가를 다는 것을 뜻했고, 이로써 십자군으로서 법적·영적 지위를 얻었다.
대사(大赦)
십자군에 참전하거나 후원한 이에게 죄에 따르는 잠벌을 면해 준다는 교회의 약속. 중요한 동기였고 뒷날 논란의 씨앗이 되었다.
무장 순례
초기 십자군은 자신을 성지로 가는 순례자로 여겼지만, 무기를 들고 도중에 싸우는 순례자였다.
지하드와 반(反)십자군
누르 앗딘과 살라딘 같은 통치자들은 성전의 이상을 되살리고 널리 알려 무슬림을 프랑크인에 맞서 결집시켰다.
변경 사회
십자군 국가는 무슬림과 동방 그리스도교인 다수 속의 소수 지배층이었고, 충돌과 공존이 함께 나타났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은 십자군이 같은 그리스도교인을 향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라틴 교회와 정교회의 분열을 깊게 했다.
다투는 기억
십자군의 의미는 낭만주의·민족주의·식민주의·반식민주의 시대를 거치며 거듭 다시 만들어졌고, 지금도 정치적으로 민감하다.

기록

  1. 1071년 — 셀주크 튀르크가 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티움군을 격파하다.
  2. 1095년 —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호소하다(11월).
  3. 1096년 — 민중 십자군이 라인란트의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하고, 제후들의 본대가 출발하다.
  4. 1098년 — 십자군이 긴 포위 끝에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에데사가 첫 십자군 국가가 되다.
  5. 1099년 — 7월 15일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주민을 학살하다.
  6. 1144년 — 장기가 에데사를 점령해 제2차 십자군(1147~1149)의 계기가 되다.
  7. 1187년 — 살라딘이 하틴 전투(7월 4일)에서 이기고 10월 예루살렘을 차지하다.
  8. 1191년 — 제3차 십자군이 아크레를 되찾고, 리처드 1세가 아르수프에서 살라딘을 물리치다.
  9. 1204년 —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다.
  10. 1229년 — 프리드리히 2세가 조약으로 예루살렘을 되찾다. 1244년 다시 잃다.
  11. 1250년 — 루이 9세의 이집트 원정이 패배와 국왕 포로로 끝나고, 맘루크가 권력을 잡다.
  12. 1291년 — 맘루크가 아크레를 함락해 본토의 십자군 국가가 끝나다.

용어 풀이

십자군(crucesignatus)
십자군 서약을 하고 ‘십자가 표시를 받은’ 사람.
프랑크인(알이프랑지)
아랍어·그리스어 사료에서 서유럽 출신 십자군과 정착민을 통틀어 부른 이름.
셀주크 왕조
11~12세기에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나톨리아의 많은 지역을 다스린 튀르크계 왕조.
파티마 왕조
969년부터 1171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시아파 이스마일파 왕조. 1099년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이유브 왕조
살라딘이 세운 왕조. 12세기 말부터 1250년 무렵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다스렸다.
맘루크
노예 출신 군인들. 1250년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아 술탄국을 세우고 십자군 국가를 끝냈다.
기사 수도회
성전 기사단·구호 기사단처럼 수도 서원을 하고 십자군 국가를 위해 싸운 기사들의 수도회.
우트르메르
프랑스어로 ‘바다 건너’라는 뜻으로, 십자군 국가를 부르던 중세의 이름.
비잔티움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로마 제국의 그리스어권 동방 계승 국가.

묻고 답하기

왜 ‘십자군’이라고 불렀나요?

참가자들이 옷에 십자가를 달았기 때문이에요. 이 말은 ‘십자가 표시를 한’이라는 뜻의 후대 라틴어·로망스어 표현에서 왔어요. 첫 십자군들은 스스로를 순례나 여정에 나선 사람이라고 했어요.

십자군이 이겼나요?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십자군 국가는 200년 가까이 버텼어요. 하지만 1187년 예루살렘을 잃었고 1291년에는 본토에서 완전히 밀려났어요. 긴 눈으로 보면 주된 목표는 실패했지요.

살라딘은 영웅인가요, 악당인가요?

당대 무슬림과 그리스도교 저술가 모두 그의 관대함과 용기를 칭찬했지만, 그 역시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포로를 처형했어요. 유럽 전설에서도 존경받았고, 현대 아랍인과 쿠르드인의 기억에서는 영웅이 되었지요. 역사가들은 그를 상징이 아니라 12세기의 노련한 통치자로 보려 해요.

십자군 전쟁으로 몇 명이 죽었나요?

아무도 몰라요. 중세의 숫자는 믿기 어렵고 흔히 과장되었어요. 병사, 순례자, 점령된 도시의 주민,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안전해요.

십자군은 서구 식민주의의 초기 형태였나?

일부 역사가와 많은 현대 저술가는 그렇게 보았다. 반면 중세의 종교 전쟁과 정착은 근대 식민 제국과 매우 달랐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 비교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중세 무슬림은 십자군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았나?

대체로 그렇지 않았다. 중세 아랍 역사가들은 프랑크인과의 전쟁을 지역 정치의 일부로 서술했다. ‘십자군 전쟁’을 하나의 긴 서구의 공격으로 보는 관념은 주로 19세기 이후 아랍어 저술에서 널리 퍼졌다.

1204년이 정교회 신자들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서방 그리스도교인 군대가 동방 최대의 그리스도교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교회를 털었으며, 수십 년 동안 비잔티움의 지배를 끝냈기 때문이다. 이 일은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을 깊게 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Crusades. Wikipedia
  2. 십자군 전쟁. 위키백과
  3. Medieval Sourcebook: Urban II (1088–1099): Speech at Council of Clermont, 1095 — 연설의 다섯 판본. Internet Medieval Sourcebook, Fordham University
  4. Historiography of the Crusades. Wikipedia
  5. Rhineland massacres. Wikipedia
  6. Siege of Jerusalem (1099). Wikipedia
  7. Usama ibn Munqidh. Wikipedia
  8. Jonathan Riley-Smith, The Crusades: A History. Bloomsbury, 2014 (3rd ed.)
  9. Christopher Tyerman, God’s War: A New History of the Crusades. Allen Lane, 2006
  10. Carole Hillenbrand, The Crusades: Islamic Perspectives.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9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 지도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