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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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 오늘날 북한과 중국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 북쪽에는 여진이라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은 사냥과 농사를 하고 말을 기르며, 당시 명나라가 다스리던 중국과 모피와 인삼을 사고팔았다.
1583년 누르하치라는 젊은 여진 사람이 명나라 군대가 얽힌 싸움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었다. 훗날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갑옷 열세 벌만 가지고 자기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 여진의 여러 무리를 하나씩 하나로 모았다. 자기 사람들의 말을 적을 새 글자를 만들게 했고, 모든 사람을 저마다 색깔이 다른 깃발을 가진 여덟 무리, 곧 팔기로 나누었다.
1616년 그는 황제와 같은 임금인 칸이 되었다. 1618년 명나라와 전쟁을 시작했고, 1619년 사르후라는 곳에서 조선 군사까지 함께한 명나라의 큰 군대를 물리쳤다.
누르하치는 1626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고, 청나라는 1644년 베이징에 들어가 1912년까지 중국을 다스렸다.
한눈에 보기
- 생애
- 1559년 ~ 1626년 9월 30일(천명 11년 음력 8월 11일). 건주여진에서 태어나 심양에서 40리쯤 떨어진 애계보(靉雞堡)에서 죽었다. 당시 나이로 68세
- 이름과 칭호
- 누르하치(努爾哈赤). 명의 관직은 도독첨사(1589)와 용호장군(1595년 무렵). 1616년 2월 17일 칸에 올랐다. 청 기록은 그의 치세를 '천명(天命)'으로 적지만, 천명이 당시 연호로 쓰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만주어 자료는 그를 겅기연 한(Genggiyen Han, 밝은 칸)이라 부른다. 사후 청 태조. 조선 기록은 노을가적(老乙可赤) 또는 그냥 '노추(奴酋)'라고 적었다
- 근거지
- 퍼알라(1587~), 허투알라(1603~, 1616년 이곳에서 즉위), 계번(자이피얀, 1619), 사르후(1620), 요양(1621), 요양 옆 동경성(1622), 심양(성경, 1625년 4월~)
- 주요 업적
- 건주여진과 해서여진(훌룬) 네 나라, 곧 하다(1599/1601)·호이파(1607)·울라(1613)·예허(1619)를 아울렀다. 몽골 문자로 만주 문자를 만들게 했고(1599), 사람들을 니루와 팔기로 편성했으며(1615), 금나라, 흔히 말하는 후금을 세웠다(1616)
- 명과의 전쟁
- 칠대한과 무순 함락(1618년 5월), 청하(1618년 9월), 사르후 전투(1619년 4월 14~18일), 개원·철령(1619), 심양·요양(1621년 5월), 광녕(1622년 3월), 영원성 공격 실패(1626년 2월)
- 조선과의 관계
- 1592년 건주 사신들이 명을 통해 그의 군대가 왜군과 싸울 수 있다고 제의(조선 거절), 1596년 1월 퍼알라에서 조선 사자 신충일을 맞음, 1607년 그의 군대가 두만강 건너 조선 쪽 오갈암에서 울라와 싸움, 1618년 광해군에게 편지를 보냄, 1619년 4월 부차에서 강홍립의 조선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음
- 주요 사료
- 청의 실록(1636년 『태조무황제실록』, 『만주실록』, 이후 개수본)과 만문 기록(『만문노당』), 명의 실록, 청이 편찬한 『명사』와 명의 사찬 사서, 조선의 『선조실록』·『광해군일기』, 신충일의 1596년 서계와 『건주기정도기』, 이민환의 『책중일록』
- 논쟁점
- 1583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 경위, 갑옷 열세 벌의 의미, 나라 이름이 '금'이었는지 '후금'이었는지, 1619년 전투를 어떻게 셀 것인지, 광해군이 조선군에 항복을 밀지로 지시했는지, 영원성에서 입은 포탄 상처가 사인이었는지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쉬움
누르하치는 누구인가
누르하치는 압록강 북쪽,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산골짜기에 살던 건주여진의 추장이다. 1559년에 태어나 40년 동안 서로 다투던 작은 여진 부족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었고, 그 나라에 문자와 군사 조직과 칸을 주었으며, 마지막 10년 동안 명나라에게서 요동을 빼앗았다. 아들 홍타이지는 백성의 이름을 만주(1635), 나라 이름을 청(1636)으로 바꾸었고, 청나라는 1644년부터 1912년까지 중국을 다스렸다.
누르하치는 한국사에도 중요하다. 그의 땅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맞닿아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건주의 사신들이 명을 통해 그의 군대가 왜군과 싸울 수 있다고 제의했고, 그는 1596년 조선 사자를 맞았으며, 1618년 광해군에게 편지를 보냈고, 1619년 명나라가 불러낸 조선군을 물리쳤다. 아래에서는 1583년부터 1626년까지 사르후 전투를 포함한 그의 생애를 따라간 뒤, 갑옷 몇 벌로 시작한 추장이 어떻게 명나라를 흔들었는지 묻는다.
이 글의 날짜는 명·청·조선 기록의 음력을 바꾼 양력이다. 이 시기 세 나라 역법은 달의 배치가 같았다. 음력 날짜를 그대로 쓸 때는 음력이라고 밝혔다.
쉬움
압록강 너머: 여진과 명의 변경
명나라 사람들은 여진을 셋으로 나누어 불렀다. 요동과 조선에 가장 가까운 건주여진, 그 북쪽의 해서여진(하다·호이파·울라·예허 네 나라로, 청 기록은 훌룬이라 부른다), 그리고 먼 북동쪽의 야인여진이다. 명은 이들을 직접 다스리지 않았다. 추장들에게 관직과 도장을 주어 이름뿐인 '위(衛)'의 우두머리로 삼았고(건주위는 1403년에 설치), 조공하고 교역할 수 있는 허가증인 칙서를 주었다. 개원·무순·청하 같은 변경 성 밖의 마시(馬市)에서는 여진의 말과 모피, 인삼이 거래되었다.
20년 넘게 이 변경을 지킨 사람은 요동 총병 이성량이다(1570~1591, 1601~1608 재임). 그는 추장들을 서로 맞붙여 다스렸다. 『명사』는 그의 집안이 조선에서 왔다고 적고, 그의 아들 이여송은 1593년 왜군에게서 평양을 되찾았다. 명나라의 사찬 사서는 누르하치가 이성량을 매우 공손히 섬겼고 이성량이 손에 넣은 부족들을 그에게 넘겨주었다고 적는다. 반면 청나라가 편찬한 『명사』의 이성량전에는 누르하치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1596년에도 누르하치의 편지에 찍힌 도장은 명의 관직인 '건주좌위지인(建州左衛之印)'이었다. 그의 성장은 명의 변경 체제 안에서 시작되었고, 나중에 그 체제를 겨누었다.
쉬움
1583년: 고륵채와 갑옷 열세 벌
1583년 봄 이성량은 추장 아타이가 지키던 고륵채(구러)를 공격했고, 이 싸움에서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각창안)와 아버지 탁시(탑극세)가 죽었다. 건국 뒤에 쓴 청나라 기록은 경쟁자 니칸 와이란이 명군을 부추겼고, 두 사람은 기오창가의 손녀를 데리고 나오려고 성에 들어갔다가 죽었으며, 명이 '잘못 죽였다'고 인정하고 누르하치에게 칙서 30도와 말 30필을 주었다고 적는다. 『명사』는 이성량의 승리와 2,300여 급의 수급만 적고, 1619년 명나라 관원의 상소는 이성량이 두 사람을 길잡이로 쓰다가 아타이 쪽 사람들과 함께 죽였다고 말한다.
청나라가 1636년에 처음 완성한 태조 실록은 이어서 누르하치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남은 갑옷이 열세 벌뿐(止有遺甲十三副)'이었고, 1583년 음력 5월(양력 6월 20일부터) 스물다섯 살에 군사를 일으켰다고 적는다. 뒤의 개수본은 이 갑옷이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밝힌다. 청 기록은 또 니칸 와이란의 투룬성을 친 첫 공격에 병사가 백 명도 안 되었다고 적는다.
갑옷 열세 벌을 확인해 주는 동시대의 독립된 기록은 없고, 이 숫자는 기병 열세 명이라는 뜻도 아니다. 청나라가 자기 시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었는지, 곧 억울한 일을 당한 작은 집안이 제 힘으로 일어섰다는 이야기로 읽는 편이 좋다. 35년 뒤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내건 칠대한의 첫째도 다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쉬움
여진 통합: 퍼알라, 구러산, 훌룬 네 나라
그 뒤 몇 해 동안 누르하치는 건주의 추장들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1587년 소자하 상류 산자락에 퍼알라성을 쌓았고, 1589년 명은 그를 도독첨사로 삼았다. 해서여진 나라들은 그의 성장을 경계했다. 청 기록에 따르면 1593년 가을(음력 9월) 예허를 중심으로 하다·울라·호이파와 몽골 코르친 등 아홉 세력이 연합해 세 길로 쳐들어왔다. 청 기록은 그 수를 3만으로, 이 전투를 1594년으로 적은 명나라 사서는 7만~8만으로 적는다.
전투는 골짜기가 좁아지는 구러산 근처에서 벌어졌다. 청 기록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장수들에게 적의 우두머리 한둘만 다치게 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달아난다고 말했고, 예허의 수장 부재(부자)의 말이 넘어져 부재가 죽자 연합군이 무너졌다. 울라의 부잔타이는 사로잡혔다고 하고, 2년 뒤 조선의 신충일은 그가 투항했다고 들었다. 신충일은 이 싸움 뒤 '멀고 가까운 부락들이 잇달아 투항했다'는 말도 들었다.
누르하치는 이어 훌룬 네 나라를 하나씩 무너뜨렸다. 하다는 1599년 10월 25일 함락되어 1601년 완전히 병합되었고, 호이파는 1607년 11월 3일, 울라는 1613년 3월 8일 무너졌으며 그 수장 부잔타이는 예허로 달아났다. 명군의 보호를 받던 예허는 1619년 9월까지 버텼다. 1603년 그는 근거지를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허투알라로 옮겼다. 그해 조선의 보고는 새 성을 쌓았으나 성책은 아직 세우지 못했다고 전한다.
중급
조선이 본 누르하치, 1589~1607
조선은 누르하치의 이름을 일찍 들었다. 1589년 8월 22일 평안도 병마절도사는 귀순한 여진인들의 말을 보고했다. '노을가적은 스스로 왕이라 칭한다.' 1592년 가을 왜군이 평양에 있을 때, 명나라 병부는 건주의 조공 사신들이 한 제의를 조선에 알려 왔다. 누르하치에게 기병 3만~4만, 보병 4만~5만이 있고, 사신들은 그가 겨울에 강이 얼면 건너가 왜적을 치는 데 동의하리라고 했다. 병부 스스로도 여진의 속내를 의심했고, 조선은 거절했다. 윤두수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나라는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누르하치 자신이 이 제의를 승인했는지는 알 수 없고, 조선에 직접 제의한 기록도 찾지 못했다.
1595~96년 겨울, 위원의 조선 관리가 인삼을 캐러 넘어온 여진인들을 죽인 일이 있은 뒤 조정은 군관 신충일을 퍼알라에 보냈다. 그는 1596년 1월 21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만포에서 건너 고구려의 옛 도읍 지안을 지났고, 1월 27일 누르하치의 집에 닿았다. 그의 서계와 노정 지도 『건주기정도기』는 누르하치를 직접 본 가장 이른 기록이다. 돌과 흙으로 쌓은 성벽 안 목책 속의 집, 150여 명의 장수, 글을 아는 사람이 없는 성. 누르하치는 '체구가 건장하고 코는 곧고 크며 얼굴은 야무지면서 길었다'. 설날 잔치에서 그는 비파를 탔고, '두 나라는 한 나라와 같이' 지내자고 했다. 서계를 본 선조는 조선이 남과 북의 큰 적 사이에 끼었다고 말했다.
1601년 누르하치는 조선의 직첩을 청했다가 이미 명의 칭호가 있지 않느냐는 답을 들었다. 1607년 봄에는 동생 슈르가치와 아들들이 두만강 하류의 여진인들을 데리러 갔다가 종성 오갈암에서 울라군을 격파하고 경원 성 밖까지 지나갔다. 『선조수정실록』은 이들이 '무인지경을 달려가듯 우리 나라의 변경을 뚫고 지나갔다'고 적었고, 『선조실록』의 사론은 울라를 '사나운 개', 누르하치를 '산에 숨은 호랑이'에 빗댔다.
중급
1616년: 금의 칸('후금')
1616년 2월 17일, 음력 설날에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서 칸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나이로 58세였다. 청 기록에 따르면 아들들과 신하들이 기(旗)별로 늘어서 표문을 올렸고, 그에게 '여러 나라를 기르는 영명한 황제'라는 뜻의 칭호를 올렸으며,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했다. 청의 연대기는 그의 치세를 천명 몇 년으로 센다.
이 나라는 흔히 12세기 여진의 금나라를 이었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이라 부르고, 만주어로는 아마가 아이신 구룬(Amaga Aisin gurun)이라고 적기도 한다. 그러나 즉위 기사에는 나라 이름이 없고, 누르하치의 도장에는 '하늘의 명을 받은 금국 칸의 도장(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 i doron)'이라고 새겨져 있을 뿐 '후'자가 없다. 다른 칭호도 쓰였다. 1618년의 명나라 기록은 그를 '건주국 칸'이라 적고, 조선 실록은 1619년에 받은 편지의 머리를 '후금국 칸'으로 옮겼다. 다만 이것이 만주어 원문 그대로라는 보장은 없다. 노정항(卢正恒)과 황일농(黄一农)은 백여 개의 공식 용례를 조사해 이 나라가 스스로를 그냥 '금'이라 불렀으며 천명도 중국식 연호가 아니었다고 보았다. 이 글에서는 익숙한 이름을 쓴다.
조선도 명도 즉위를 곧바로 알아챈 것 같지는 않다. 1616~17년 조선 실록에서는 즉위를 알리는 기사를 찾지 못했다. 1619년 명나라 관원은 오히려 조선의 자문을 인용해 누르하치가 '감히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고치고 짐이라 칭했다'고 적었다.
중급
안에서 흔들리는 명
누르하치가 나라를 만드는 동안 명나라 조정은 흔들리고 있었다. 1580년대 후반부터 만력제는 정기적인 조회를 대부분 그만두었고, 관청의 빈자리는 몇 해씩 채워지지 않았다. 『명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8년'의 조선 전쟁에 은 700만 냥 넘게 들었다고 적고, 다른 기록은 780만 냥이라고 한다. 황제는 돈을 모으려고 환관을 지방에 보내 광산세와 상세를 거두게 했고, 요동에서는 환관 고회의 수탈이 1608년 병사들의 반란을 불렀다.
변경도 달라지고 있었다. 이성량은 1591년 해임되었고, 그가 없는 동안 요동의 장수는 자주 바뀌었다. 다시 부임한 그는 1606년 순무들과 함께 관전 일대의 여섯 보를 지키기 어렵다며 버리고, 주민을 변경 안으로 몰아냈다. 『명사』는 6만 4천여 호, 『동이고략』은 6만여 명이라고 적는다. 뒤에 한 명나라 관원은 이를 '땅을 버린 것이 아니라 바친 것'이라 비판했다. 그 빈 땅으로 누르하치의 사람들이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요동에서 명나라를 얼마나 약하게 만들었는지는 역사가마다 평가가 다르다. 그러나 연대는 분명하다. 명의 군대와 은이 조선에 묶여 있던 1592~1598년에 누르하치는 구러산에서 연합군을 물리치고 주변 부락을 끌어들였으며, 명은 그를 거의 막지 않았다. 훌룬 네 나라 정복은 1599년 하다에서 시작되었다.
중급
1618년: 칠대한, 무순과 청하
1618년 5월 7일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 원한, 곧 칠대한을 하늘에 고하고 2만 군사로 출병했다. 청 기록에 실린 내용은 이렇다. 명이 까닭 없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였고, 맹약을 어기고 군대를 보내 예허를 지켰으며, 국경을 넘은 명나라 사람을 죽인 일로 그에게 열 사람을 처형하게 했고, 예허가 그와 정혼한 여인을 몽골에 시집보내게 두었고, 그의 백성을 추수 전에 시하·삼차·무안의 밭에서 쫓아냈고, 예허의 말만 듣고 그를 모욕했으며, 하다를 되돌려 놓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문구는 뒤의 청나라 문헌에 있지만, 이런 문서는 1618년에 이미 있었다. 명나라 쪽 편찬물은 6월(음력 윤4월) 누르하치가 풀어 준 한인 포로들 편에 스스로를 '건주국 칸'이라 칭하며 '일곱 가지 원한'을 늘어놓은 글을 보냈다고 적고, 7월의 조선 기록도 같은 뜻의 편지를 요약해 전한다.
무순은 5월 9일 함락되었다. 명 기록은 여진이 큰 장을 보러 오겠다고 알린 뒤 상인들이 장사하러 나온 틈에 쳐들어왔다고 적고, 청 기록은 명나라 유격 이영방이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받고, 여진군이 사다리로 성벽을 오르자 항복했다고 적는다. 광녕 총병 장승윤이 이끈 약 1만의 구원군은 5월 15일 무너졌다. 『명사』는 만 명이 죽고 '온 조정이 놀랐다'고 적는다. 9월에는 청하성마저 함락되었다.
조선도 곧바로 끌려들었다. 6월 4일 조선에도 군사를 합쳐 치자는 요동순무의 자문이 조정에 이르렀고, 8월 9일에는 새로 온 경략 양호가 정예병 1만을 요구했다. 누르하치도 편지를 보냈다. 7월 7일 여진 기병 열두 명이 압록강 건너 만포에 '조선 국왕 개탁'이라 적힌 편지를 가져와, 조선은 자기 주인과 원한이 없으니 강토나 지키고 군대를 일으키지 말라고 했다.
중급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조선
1608년 즉위해 1609년 명의 책봉을 받은 광해군(책봉식의 통역관이 강홍립이었다)은 북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1614년 한 변경 장수는 그에게 누르하치의 군대가 '보통의 부락에 비유할 것이 아니며 호령이 엄숙하고 기계가 정예롭다'고 보고했다. 1618년 광해군은 명에 대한 의리를 말하면서도 출병에 반대했다. 징병 요청은 요동순무가 보낸 것으로 '천자의 명이 아니다'(6월 16일), 누르하치는 '실로 천하의 강적'이라 예전에 조선이 물리친 건주 추장들과 비교할 수 없다(6월 22일), 군사는 압록강 가 의주에서 대기시키자는 것이었다.
신하들도 조선군이 약하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좌의정 한효순은 군사가 모두 농사짓는 백성이라 '한 사람도 쓸 만한 자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해 준 명의 은혜 때문에 거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양호의 요구가 온 뒤 조선은 물러섰다. 1618년 8월 23일 조선은 명에 1만 명의 명단을 보냈다. 포수 3,500, 사수 3,500, 살수 3,000(원문에는 이 자리에 '사수'가 한 번 더 적혀 있어 베껴 쓰다 생긴 잘못으로 본다)이었고, 도원수는 문관 강홍립, 부원수는 김경서였다. 9월 7일에도 광해군은 군사를 더 뽑아 여진 땅 깊이 들여보내자는 요구를 거부하며 '국가의 존망과 성패에 관계된 일'이라고 했다.
광해군의 노선을 흔히 '중립외교'라 부르지만, 이는 현대의 해석이고 평가가 갈린다. 그의 현실 감각을 높이 사는 역사가도 있고, 명 중심의 질서 안에서 중립은 애초에 불가능했다고 보는 역사가도 있다. 1618년 말, 조선은 원하지 않던 전쟁에 이미 발을 들인 상태였다.
중급
사르후 전투, 1619년 4월
양호는 한 번에 전쟁을 끝내려 했다. 네 갈래 군대가 허투알라로 모여들 계획이었다. 서쪽에서는 두송이 무순에서, 북쪽에서는 마림이 개원·철령 쪽에서 예허 군과 함께, 남쪽에서는 이여백이 청하에서, 동쪽에서는 유정이 관전에서 조선군과 함께 출발했다. 명은 47만 대군이라고 소리쳤고, 청 기록은 양호의 군대가 20만이었다고 적으며, 당시 보고를 모은 명나라 편찬물은 조선군을 빼고 8만 8,550여 명으로 센다. 큰 눈 때문에 출발이 늦어졌고, 각 군은 며칠씩 차이를 두고 관문을 나섰다. 유정은 4월 9일, 마림은 12일, 두송은 13일 오후, 이여백은 14일이었다.
누르하치는 남쪽의 움직임은 유인이고 주력은 무순에서 온다고 보고 그쪽에 병력을 모았다. 4월 14일 두송은 물살이 깊고 빠른 혼하를 건넜고, 수레와 대포 부대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뒤처졌다. 두송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혼하와 소자하가 만나는 곳 가까이의 사르후 산에 진영 하나를 두고, 자신은 여진 기병 400명이 지키는 인부들이 성을 쌓던 계번(자이피얀)의 길림애 절벽을 공격했다. 해 질 무렵 도착한 누르하치는 여덟 기 가운데 여섯 기의 병력을 사르후 진영에 몰아 무너뜨린 뒤 두송을 쳤고, 두송은 전사했다. 청 기록은 명군의 무기와 시신이 혼하에 떠내려가는 모습이 '얼음이 풀려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고 적었다. 이 골짜기는 지금 1950년대에 만든 대화방 저수지에 잠겨 있다.
4월 15일 여진군은 북쪽으로 돌아 상간애(샹기얀 하다)에서 마림을 무너뜨렸다. 마림은 빠져나갔지만 감군 반종안은 전사했다. 남쪽의 이여백은 양호의 명령을 받고 거의 싸우지 않고 물러났고, 이 때문에 뒤에 의심을 샀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안쪽의 짧은 길로 옮겨 다녔고, 명군은 바깥에서 산을 넘어 따로따로 다가왔다. 유명한 '너희가 몇 길로 오든 나는 한 길로 간다'는 말은 청 기록에는 없고 뒤의 명나라 쪽 글에 전한다.
동쪽 군대는 가장 늦게 여진군과 맞닥뜨렸다. 4월 17일, 앞에 적이 없다는 정탐 보고에 대열이 늘어진 채 마을을 약탈하던 유정의 선봉이 아부달리 언덕에서 공격을 받았다. 청 기록에 따르면 홍타이지가 더 높은 곳에서 내려치고 다이샨이 옆을 쳤으며, 뒤따르던 명군 두 진영은 진을 갖추기도 전에 무너졌다. 유정은 전사했다. 명나라 쪽 일부 기록과 『명사』, 그리고 뒤에 편찬된 『청사고』는 여진군이 두송 군대의 깃발과 옷으로 유정을 속였다고 적지만, 초기의 『만주실록』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중급
부차의 조선군과 강홍립의 항복
강홍립의 종사관 이민환의 일기에 따르면 조선군 약 1만 3천 명이 1619년 4월 3일부터 7일 사이 창성 일대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유정의 진영에는 대포가 없었다. 유정은 강홍립에게 양호가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라 했고, 자기 군대가 1만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눈 덮인 고개를 넘는 행군은 고됐다. 4월 12일 강홍립은 창성에서 사람마다 가지고 떠난 열흘 치 양식이 이미 떨어졌다고 보고했고,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군이 일부러 늦장을 부린다고 몰아세웠다.
4월 17일 조선군은 허투알라에서 60여 리 떨어진,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 부차(만주어 푸차)에 이르렀다. 강홍립은 세 진영에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했지만, 김응하의 좌영은 이미 평지에 거마목을 세우고 진을 친 뒤였다. 여진 기병이 좌영을 감쌌고, 우영이 내려와 좌영 옆에 붙었다. 모든 기록이 바람을 말하지만 내용은 다르다. 조선 실록은 서북풍에 화약이 날아가 포를 쓸 수 없었다고 하고, 청 기록은 화포 연기가 도리어 조선 진영 쪽으로 불었다고 하며, 중영에서 지켜본 이민환은 포를 한 번 쏜 뒤 다시 장전하기도 전에 기병이 진 안에 들어왔다고 적었다. 두 진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김응하는 싸우다 죽었다. 조선 실록은 그가 나무에 기대어 활 세 개를 번갈아 쏘았고 창이 가슴을 꿰뚫었는데도 활을 놓지 않았으며, 여진 사람들이 그를 '버드나무에 기댄 장수(依柳將)'라 불렀다고 적는다. 뒤의 글들은 칼로, 다시 맨손으로 싸웠다는 이야기를 더했다. 현장에 있던 이민환은 김응하가 끝까지 힘껏 싸우다 죽었다고 '뒤에 들었다'고만 적었다.
언덕 위에는 굶주린 중영만 남았다. 이민환에 따르면 여진 쪽이 통역관을 불러 조선과는 원한이 없다고 했고, 부원수 김경서가 여진 진영에 갔으며, 4월 18일 강홍립이 뒤따라가 조선군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청 기록은 거꾸로 강홍립이 먼저 깃발을 눕히고 '이번에 온 것은 우리가 원한 바가 아니다'라고 전했다고 적는다. 누가 먼저 화의를 꺼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조선 진영에 피해 있던 명나라 유격 교일기는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 조선군의 손실은 불확실하다. 실록은 뒤에 부차에서 죽은 사람이 8천~9천이라 했고, 청 기록은 5천 명이 항복했다고 적는다.
심화
광해군은 항복을 지시했나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해 왔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부차전투」 항목도 이를 전한다. 남아 있는 공식 하유는 그보다 덜 말한다. 1619년 3월 17일 광해군은 1월에 앞으로 나갔던 조선군이 적 하나 보지 못하고 돌아오긴 했지만 저들은 조선군이 자기 땅에 들어온 것을 알고 원한을 품을 것이니 압록강 상류를 지키라고 했다. 3월 18일에는 포수 400명을 명군 진영에 떼어 보낸 일을 나무라며 '중국 장수의 말만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곳에 서는 데 힘쓰라'고 했다. 어느 것도 항복 명령은 아니다.
전투 뒤 강홍립은 행군 중에 통역관을 보내 조선군은 명군 뒤에 있으면서 싸우지 않겠다고 여진에 몰래 알렸다고 보고했고(1619년 5월 15일), 비변사는 그를 규탄했다.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조선의 병력으로 이 적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겠느냐고 묻고, 포로가 된 강홍립이 몰래 보내는 보고를 감쌌다. 밀지를 내렸다는 분명한 주장은 그를 몰아낸 쪽에서 나왔다. 1623년 4월 광해군을 폐위한 교서는 그가 '은밀히 장수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게 했다'고 했고, 반정 뒤 『광해군일기』를 편찬한 사람들은 항복이 미리 정해진 계획이었다는 논평을 덧붙였다.
역사가들의 해석은 지금도 갈린다. 이병도 이래 일부는 누르하치와의 전쟁을 피하려는 의도적 정책으로 보고, 오항녕은 전후 사정으로 보아 밀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면서 광해군의 노선을 기회주의라고 비판한다. 장정수는 왕의 단일한 밀명보다 비변사가 함께한 후금과의 배후 교섭과 그 성격의 변화에 주목한다. 강홍립은 1627년 조선을 침공한 후금군과 함께 돌아올 때까지 억류되어 있었고, 그해 9월 세상을 떠났다.
중급
요동 정복, 1619~1625
사르후는 요동의 문을 열었다. 개원이 1619년 7월 26일, 철령이 9월 3일 함락되었고, 9월 29일 예허가 멸망해 그 수장 금태석(긴타이시)과 포양고(부양구)가 죽임을 당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쪽으로 서진해 1619년 계번(자이피얀)의 새 성으로, 1620년 사르후로 옮겼다. 1621년 5월에는 요동의 심장을 쳤다. 5월 4일 심양을 함락했고, 이틀에 걸친 싸움 끝에 5월 11~12일 명의 요동 통치 중심인 요양을 함락했다. 경략 원응태는 성루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 요양은 누르하치의 도읍이 되었다.
1622년 3월 그는 요하를 건너 서평보에서 명군을 깨고, 관원들이 산해관으로 달아난 광녕에 3월 5일 들어갔다. 같은 해 요양 동쪽 몇 킬로미터 지점에 새 성 동경성을 쌓게 했다. 1625년 4월 10일에는 다시 심양으로 옮겼다. 그는 심양을 서쪽으로는 명, 북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조선으로 길이 뻗은 사방으로 통하는 곳이라고 했다.
요동을 다스린다는 것은 많은 한인을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1623년 반란이 일어난 뒤 누르하치는 회유에서 차별과 학살로 돌아섰다. 명의 저항은 조선 가까이에서 이어졌다. 1621년 모문룡이 압록강 어귀의 진강을 손에 넣자 누르하치의 군대는 12월 그를 쫓아 조선 땅까지 들어왔고, 모문룡은 뒤에 철산 앞바다의 가도를 근거지로 삼아 조선을 더 깊이 이 전쟁에 끌어들였다.
중급
영원성과 누르하치의 죽음, 1626
1626년 초 명이 산해관 밖 병력 대부분을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누르하치는 다시 요하를 건넜다. 2월 19일 원숭환이 지키는 영원성에 이르렀으나 원숭환은 항복을 거절했다. 2월 20일과 21일의 공격은 대형 서양식 대포까지 동원해 성 위에서 포와 화약 항아리를 퍼붓는 수비군에 막혔고, 2월 22일 그의 군대는 대신 각화도의 명군 군량 기지를 불태웠다. 그는 3월 6일 심양으로 돌아왔다. 청 기록은 그가 '스물다섯 살에 군사를 일으킨 이래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고 치면 함락하지 않은 성이 없었는데, 오직 영원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했다'며 언짢아하며 돌아왔다고 적는다.
그가 영원성에서 포탄에 맞아 다쳤고 그 상처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근거는 약하다. 명나라 문인 장대(張岱)는 포탄이 누런 장막에 떨어져 '비왕(裨王)' 하나가 다쳤다고 썼고, 일부 역사가는 이를 누르하치로 보지만, 그가 1626년 4월 말 몸소 군대를 이끌고 할하 몽골을 쳤다는 점을 드는 역사가도 있다. 청 기록은 그가 9월에 병이 나 청하 온천에 갔다가 배로 돌아오던 길에 1626년 9월 30일 심양에서 40리쯤 떨어진 애계보에서 죽었다고만 적는다. 이튿날 도르곤의 어머니인 대비 아바하이가 그를 따라 죽도록 강요받았다.
누르하치는 심양 동쪽의 복릉에 묻혔다.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가 칸으로 추대되었다.
심화
갑옷 열세 벌의 추장은 어떻게 명을 흔들었나
답은 명의 체제 안에서 시작한다. 누르하치는 명의 관직을 받고 칙서를 쥐었으며 변경의 마시를 이용한 추장으로 성장했고, 명나라 사찬 사서에 따르면 이성량을 섬겼다. 칙서와 관직은 그에게 부와 경쟁자를 누를 지위를 주었다. 여진을 나누어 다스리고 한 추장을 밀어 다른 추장을 누르던 명의 방식은 그가 이웃을 하나씩 삼키게 해 주었고, 1590년대 명의 관심과 은은 조선 전쟁과 조정의 혼란에 쏠려 있었다.
둘째, 그는 부족 연합을 나라로 바꾸었다. 1596년 조선 사자가 본 것은 150여 명의 장수를 거느렸지만 글 아는 사람이 없는 추장이었다. 20년 뒤 그에게는 문자와 문서 명령, 니루와 팔기에 등록된 백성, 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팔기는 흩어진 씨족을 빠르게 움직이고 한곳에 모일 수 있는 규율 있는 군대로 만들었고, 문자와 기록은 새 나라에 자기만의 기억과 법을 주었다.
셋째, 명은 안에서부터 약해지고 있었다. 정기적인 조회를 대부분 그만둔 황제, 채워지지 않는 관직, 1590년대 전쟁의 비용, 환관 세리와 요동의 군변, 1606년 관전 철수가 모두 변경의 대응력을 떨어뜨렸다. 누르하치가 1618년 군사를 일으켰을 때, 조선의 변경 장수와 광해군은 이미 그를 자신들이 아는 어떤 여진 추장보다 강하다고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이겼다. 1618년의 무순과 청하는 명의 성도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1619년 사르후에서는 나뉘어 온 명군을 한 갈래씩 차례로 깨뜨렸으며, 1621년에는 심양과 요양을 차지했다. 갑옷 열세 벌은 청나라의 이야기지만, 명이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을 선포한 지 3년 만에 요하 동쪽의 요동은 그의 것이 되었고, 조선은 옛 보호자와 압록강 건너의 새 강자 사이에 끼게 되었다.
심화
누르하치 이후: 후금, 청, 그리고 조선
홍타이지는 아버지의 전쟁을 이어 갔다. 1627년 후금은 가도의 모문룡을 명분의 하나로 삼아 조선을 침공해(정묘호란) '형제' 관계를 맺게 했다. 1635년 그는 여진을 '만주'로 고쳐 부르게 했고, 1636년 대청(大淸)을 선포했다. 그해 겨울 청은 다시 조선을 침공해(병자호란) 명과의 관계를 끊게 했다. 1644년 청은 베이징에 들어갔다.
청나라는 누르하치를 창업주 태조로 기억했고, 뒤의 황제들 아래 고쳐 쓴 실록에 그 이야기를 담았다. 갑옷 열세 벌에서 칠대한까지 그에 관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이 실록에서 나온다. 한국에서 그는 신충일의 방문, 부차의 패전, 그리고 광해군의 선택을 둘러싼 긴 논쟁을 통해 기억된다.
심화
사료와 그 문제점
누르하치에 관한 청의 서술은 그가 받들어야 할 창업주가 된 뒤에 쓰였다. 첫 실록(1636)과 그림을 곁들인 『만주실록』에 이미 갑옷 열세 벌, 명의 '오살', 부차의 하늘이 도운 바람이 나오고, 뒤의 개수본은 그의 말을 다듬고 이름과 숫자를 바꾸었다. 만문 기록(『만문노당』)은 사건에 더 가깝지만 이 글에서는 직접 보지 못했다.
명의 사료에도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사르후 뒤 장수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겼고, 청이 편찬한 『명사』는 이성량의 일생에서 누르하치를 뺐으며, 전쟁 서술에는 청 계통의 이야기를 끌어다 쓰면서 본기에서 유정의 전사일을 양력 4월 20일에 해당하는 날로 잘못 적었다. 무순의 장터 계략, 아부달리 언덕의 변장, '한 길' 발언 같은 이야기는 명나라 쪽 보고와 뒤의 글에서 나온다.
한국 사료에는 목격자의 기록이 있다. 1596년 신충일의 서계와, 원정과 포로 생활을 적은 이민환의 일기다. 그러나 신충일은 정탐하러 간 사람이었고, 이민환은 귀국 뒤 일기를 다시 정리했으며 자신의 처신을 변호해야 했다. 『광해군일기』는 왕을 몰아낸 쪽이 편찬했으므로, 그들의 논평과 그들이 남겨 둔 문서를 나누어 읽어야 한다. 명군 47만에서 조선군 전사자까지, 세 나라 기록의 숫자는 셈이라기보다 주장으로 읽어야 한다.
핵심 개념
- 명의 체제 안에서, 그리고 그 체제에 맞서
- 누르하치는 명의 관직과 칙서, 도장을 가진 여진 추장으로 시작했다. 그 지위로 경쟁자들을 누른 뒤 1618년 명에 전쟁을 선포했다.
- 갑옷 열세 벌
- 청 기록은 그가 1583년 갑옷 열세 벌만으로 싸움을 시작했다고 적는다. 이를 독립적으로 확인해 주는 사료는 없다. 억울하고 초라한 시작이라는 청나라의 자기 이야기다.
- 문자와 팔기
- 새 문자(1599)와 모든 사람을 니루와 팔기로 묶은 편제(1615년까지)가 씨족 연합을 기록과 법, 규율 있는 군대를 가진 나라로 바꾸었다.
- 네 길에 맞선 한 길
- 1619년 사르후에서 명은 군대를 네 갈래로 나누었고, 각 군은 서로 다른 때에 도착했다. 가운데 있던 누르하치는 그중 셋을 차례로 깨뜨렸고, 나머지 하나는 물러났다.
- 두 강자 사이의 조선
- 조선은 왜란 때 도와준 명에 빚이 있었지만 누르하치를 두려워했다. 조선군은 사르후 전역에 나가 항복했고, 광해군이 이를 미리 꾀했는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 후금에서 청으로
- 누르하치가 1616년에 세운 나라는 스스로를 '금'이라 불렀다. 아들이 1636년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고, 청은 1644년부터 중국을 다스렸다.
기록
- 1559년 —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에서 태어나다.
- 1583년 — 봄: 이성량의 고륵채 공격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다. 여름: 청 기록에 따르면 갑옷 열세 벌로 군사를 일으키다.
- 1587년 — 퍼알라성을 쌓다.
- 1589년 — 8월 22일: 조선의 보고가 그가 '스스로 왕이라 칭한다'고 전하다. 명이 그를 도독첨사로 삼다.
- 1592년 — 가을: 건주 사신들이 명을 통해 그의 군대가 조선에서 왜군과 싸울 수 있다고 제의하고, 조선이 거절하다.
- 1593년 — 가을: 구러산에서 예허가 이끈 아홉 세력 연합군을 물리치다.
- 1596년 — 1월 21~27일: 조선 사자 신충일이 만포에서 퍼알라까지 가서 누르하치를 보고 돌아와 보고하다.
- 1599년 — 몽골 글자로 만주 문자를 만들다. 10월 25일: 하다가 함락되다.
- 1603년 — 근거지를 허투알라로 옮기다.
- 1607년 — 봄: 그의 군대가 두만강 가 종성 부근 오갈암에서 울라를 물리치다. 11월 3일: 호이파가 함락되다.
- 1613년 — 3월 8일: 울라가 함락되다.
- 1615년 — 연말: 청 기록이 팔기 편제를 적다.
- 1616년 — 2월 17일: 허투알라에서 칸으로 추대되고 청 기록이 천명 원년으로 삼다.
- 1618년 — 5월 7일: 칠대한. 5월 9일: 무순 함락. 7월 7일: 그의 사자들이 조선 국왕 앞으로 된 편지를 만포에 가져오다. 9월: 청하 함락.
- 1619년 — 4월 14~18일: 사르후 전투. 두송·마림·유정이 패하고, 조선군이 부차 전투 뒤 항복하다. 9월 29일: 예허가 멸망하다.
- 1621년 — 5월 4일: 심양 함락. 5월 11~12일: 요양이 함락되어 그의 도읍이 되다.
- 1622년 — 3월 5일: 광녕에 들어가다. 요양 옆에 동경성을 쌓다.
- 1625년 — 4월 10일: 도읍을 심양으로 옮기다.
- 1626년 — 2월 19~22일: 영원성 공격에 실패하다. 9월 30일: 심양 근처에서 죽고 홍타이지가 뒤를 잇다.
- 1627년 —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고(정묘호란), 강홍립이 침공군과 함께 돌아오다.
- 1636년 — 홍타이지가 청을 선포하다.
- 1644년 — 청이 베이징에 들어가다.
용어 풀이
- 여진
- 만주의 퉁구스계 언어를 쓰는 사람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1635년 만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 건주여진·해서여진·야인여진
- 명나라 사람들이 여진을 요동·조선에 가까운 쪽부터 먼 북동쪽까지 나누어 부른 세 갈래.
- 훌룬
- 해서여진의 네 나라인 하다·호이파·울라·예허를 청나라가 부른 이름.
- 칙서
- 여진 추장이 명에 조공하고 교역할 수 있게 한 허가 문서. 칙서를 많이 쥘수록 부와 힘이 커졌다.
- 니루
- '화살'이라는 뜻. 약 300명의 장정과 그 가족으로 이루어진 누르하치 편제의 기본 단위.
- 기(旗, 구사)
- 누르하치가 전쟁과 농사와 행정을 위해 백성을 나눈 여덟 무리 가운데 하나. 저마다 깃발 색이 다르다.
- 칸
- 몽골과 여진의 최고 통치자 칭호. 누르하치는 1616년 칸이 되었다.
- 칠대한
- 누르하치가 1618년 출병하며 내건, 명이 그에게 저질렀다는 일곱 가지 원한.
- 경략
- 한 전쟁 지역의 군무를 총괄한 명나라 고위 관원. 1618~19년 요동의 양호가 그 예다.
- 도원수
- 조선 원정군의 총사령관. 1619년에는 문관 강홍립이 맡았다.
묻고 답하기
누르하치는 정말 갑옷 열세 벌로 시작했나?
1636년의 첫 실록부터 청 기록이 그렇게 적는다. 이를 독립적으로 확인해 주는 사료는 없으니, 청나라가 자기 시작을 기억한 방식으로 읽는 편이 좋다.
누르하치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겠다고 했나?
1592년 명 병부가 그의 군대가 왜군과 싸울 수 있다는 건주 사신들의 제의를 조선에 전했다. 누르하치가 이를 승인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은 그의 속셈을 의심해 거절했다. 조선에 직접 한 제의는 찾지 못했다.
그의 나라 이름은 후금이었나?
후금은 흔히 쓰는 현대의 이름이고, 조선 실록은 1619년에 받은 편지의 머리를 '후금국 칸'으로 옮겼다. 다만 원문 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도장과 공식 용례 대부분은 그냥 '금(아이신 구룬)'이라고 쓴다.
명은 왜 사르후에서 졌나?
각 군이 서로 다른 때에 험한 길로 나섰다. 한데 모인 여진군은 혼하에서 대포를 뒤에 남겨 둔 두송의 군대부터 마림, 유정의 군대까지 셋을 차례로 깨뜨렸고, 이여백은 거의 온전한 채 물러났다.
조선군은 몇 명이 사르후 전역에 나갔나?
이민환과 조선 실록에 따르면 약 1만 3천 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전사자와 포로의 수는 사료마다 크게 다르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항복을 지시했나?
그런 명령서는 남아 있지 않다. 광해군은 패하지 않도록 하고 명 장수의 말만 따르지 말라고 했고, 강홍립은 여진과 따로 연락했지만, 밀지를 내렸다는 분명한 비난은 1623년 그를 폐위한 교서에 나오고, 뒤의 실록 논평도 미리 짜인 일이었다고 적었다. 역사가들의 해석은 지금도 다르다.
김응하는 누구인가?
1619년 4월 17일 부차에서 전사한 조선군 좌영장이다. 조선은 그를 영웅으로 기렸고, 그의 최후를 전하는 이야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극적으로 바뀌었다.
누르하치는 영원성에서 입은 상처로 죽었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증명되지 않았다. 그는 영원성 전투 두 달 뒤 다시 출정했고, 청 기록은 1626년 9월 병이 나 9월 30일 죽었다고 적는다.
사르후는 지금 어디인가?
중국 랴오닝성 푸순(무순) 동쪽, 혼하와 소자하가 만나는 곳이다. 전장이던 골짜기의 상당 부분은 지금 대화방 저수지에 잠겨 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清實錄 · 太祖武皇帝實錄(태조무황제실록, 1636). 위키문헌(중국어)
- 清實錄 · 太祖高皇帝實錄(태조고황제실록, 개수본) 권1. 위키문헌(중국어)
- 清實錄 · 太祖高皇帝實錄(태조고황제실록, 개수본) 권4(1612~1615, 팔기 포함). 위키문헌(중국어)
- 清實錄 · 太祖高皇帝實錄(태조고황제실록, 개수본) 권5(1616년 즉위). 위키문헌(중국어)
- 滿洲實錄(만주실록) 권2. 위키문헌(중국어)
- 滿洲實錄(만주실록) 권3. 위키문헌(중국어)
- 滿洲實錄(만주실록) 권4(칠대한·무순 포함). 위키문헌(중국어)
- 滿洲實錄(만주실록) 권5(사르후 전역). 위키문헌(중국어)
- 滿洲實錄(만주실록) 권6(1619~1621). 위키문헌(중국어)
- 滿洲實錄(만주실록) 권7(1621~1624). 위키문헌(중국어)
- 滿洲實錄(만주실록) 권8(1625~1626). 위키문헌(중국어)
- 明史(명사) 권21 신종 본기. 위키문헌(중국어)
- 明史(명사) 권90 병지 2. 위키문헌(중국어)
- 明史(명사) 권238 이성량전. 위키문헌(중국어)
- 明史(명사) 권239 장승윤·두송 등의 전. 위키문헌(중국어)
- 明史(명사) 권247 유정전. 위키문헌(중국어)
- 明史(명사) 권259 양호전. 위키문헌(중국어)
- 明史(명사) 권305 환관전(진증·고회). 위키문헌(중국어)
- 明神宗實錄(명신종실록) 만력 47년(1619) 3월 11일: 순안어사 진왕정의 출관 보고. 국사편찬위원회 명·청실록 데이터베이스(sillok.history.go.kr/mc, 기사 msilok_011_5800_0010_0010_0110_0060)
- 장정롱(莊廷鑨), 明史鈔略(명사초략) 이성량전. 위키문헌(중국어)
- 모서징(茅瑞徵), 東夷考略(동이고략). 위키문헌(중국어)
- 왕재진(王在晉), 三朝遼事實錄(삼조요사실록) 총략. 위키문헌(중국어)
- 왕재진(王在晉), 三朝遼事實錄(삼조요사실록) 권1(1619년 조선 국왕 주문 포함). 위키문헌(중국어)
- 하윤이(夏允彝), 幸存錄(행존록) 권상. 위키문헌(중국어)
- 선조실록 선조 22년(1589) 7월 12일: 평안도 병사가 건주위의 오랑캐 상황을 보고하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9월 14일(윤두수, 누르하치의 제의에 대하여).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9월 17일: 여진의 왜적 정벌 제의에 관해 명 병부와 주고받은 자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선조실록 선조 29년(1596) 1월 30일: 남부 주부 신충일의 서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선조실록 선조 29년(1596) 1월 30일: 신충일의 서계를 보고 내린 전교.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선조실록 선조 34년(1601) 10월 23일: 노을가적이 직첩 받기를 청하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선조실록 선조 36년(1603) 8월 8일: 노을가적의 새 성에 관한 평안도 관찰사의 장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선조수정실록 선조 40년(1607) 2월 1일: 오갈암 전투.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선조실록 선조 40년(1607) 4월 2일(사론 포함).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1609) 6월 2일: 명의 책봉 조서.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6년(1614) 6월 25일: 평안 병사 이시언 인견.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윤4월 12일: 요동순무의 자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윤4월 23일: 좌의정 한효순의 의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윤4월 24일: '천자의 명이 아니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5월 1일: '실로 천하의 강적'.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5월 29일: 만포에 온 호서.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6월 19일: 경략 양호의 자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7월 4일: 출병 명단을 담은 조선 국왕의 자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7월 19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2월 2일: 서북 방비에 관해 강홍립에게 내린 하유.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2월 3일: 강홍립에게 내린 하유.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2월 26일: 유정에 관한 강홍립의 치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3월 12일: 평안 감사의 패전 치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3월 15일: 두송 군의 패전을 전한 조선 포수의 진술.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5월 27일: 명의 휼전과 조선 전사자.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4월 2일: 누르하치의 서신과 강홍립의 장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4월 8일: 강홍립에 관한 비변사의 계와 왕의 전교.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4월 9일: 누르하치에게 보낼 답서 논의.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인조실록 인조 1년(1623) 3월 14일: 광해군 폐위에 관한 왕대비의 교서.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 인조실록 인조 5년(1627) 7월 27일: 강홍립의 졸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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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