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나폴레옹 전쟁

Guerres napoléoniennes · Napoleonische Kriege · Наполеоновские войны · Guerras napoleónicas

1803–1815년 ·

한 문장으로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가 번번이 새로 짜인 유럽 강대국 대(對)프랑스 동맹과 벌인 일련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대륙 대부분을 정복했다가 패배했으며, 그 과정에서 혁명의 법과 사상이 퍼지고 민족주의가 깨어나 유럽과 아메리카가 새롭게 짜였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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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200년 전, 프랑스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야심 많은 지도자가 있었어요. 그는 군대 장교로 시작해 전투에서 계속 이겼고, 1804년에는 스스로 '프랑스인의 황제'가 되어 왕관을 썼어요.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에스파냐 같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프랑스가 너무 강해질까 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대프랑스 동맹'이라는 팀을 만들어 나폴레옹과 싸웠어요. 전쟁은 잠깐씩 쉬기도 하면서 1803년부터 1815년까지 이어졌어요.

나폴레옹은 뛰어난 장군이어서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 같은 유명한 싸움에서 이겼어요. 한동안 유럽 대부분을 손에 넣고 형제들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앉혔어요. 하지만 바다는 영국이 지배했어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프랑스와 에스파냐 함대를 무찔렀어요.

1812년 나폴레옹은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갔어요. 러시아군은 물러나면서 식량을 태워 버렸고, 겨울이 오자 추위와 굶주림, 병 때문에 나폴레옹 군대의 대부분이 무너졌어요. 그 뒤 적들이 힘을 합쳐 나폴레옹을 이겼어요.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쫓겨났다가 탈출해 백 일 동안 다시 권력을 잡았지만,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완전히 졌어요. 그는 멀리 떨어진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이 전쟁으로 유럽의 지도와 법, 생각이 바뀌었고,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한눈에 보기

기간
1803년 5월(아미앵 화약 파기 후 영국의 대프랑스 선전 포고) ~ 1815년(6월 18일 워털루 전투, 11월 20일 제2차 파리 조약)
장소
주로 포르투갈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유럽. 대서양·지중해의 해전, 그 영향은 카리브해·아메리카·인도까지
프랑스 측
프랑스 제국과 위성국(이탈리아 왕국, 라인 동맹, 바르샤바 공국, 홀란트·나폴리·베스트팔렌 왕국, 조제프 치하 에스파냐), 한때 에스파냐(1808년까지)·덴마크-노르웨이 등
대프랑스 동맹
전 기간 영국, 그리고 제3~7차 동맹에 참여한 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스웨덴·포르투갈·에스파냐(1808년부터) 등
주요 전투
트라팔가르·아우스터리츠(1805), 예나-아우어슈테트(1806), 프리틀란트(1807), 바그람(1809), 보로디노(1812), 라이프치히(1813), 워털루(1815)
사망자(추정)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대략 350만~700만 명. 역사가마다 추정치가 크게 다르다
결과
나폴레옹 패배, 프랑스 부르봉 왕조 복고, 빈 회의의 유럽 재편, 영국의 해상·상업 패권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재생을 누르면 지도에서 전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표시는 전투·사건, 화살표는 기록에 남은 진군로입니다.

1803년 5월 18일
1/15 · 전쟁 재개와 불로뉴 진영
프랑스와 동맹국영국(영국 주도 연합군 포함)오스트리아프로이센(1813년 스웨덴 포함)러시아에스파냐·포르투갈(1808년부터)

단계

  1. 1803년 5월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면서 아미앵 화약이 깨졌다. 나폴레옹은 해협 너머 영국 본토를 치려고 불로뉴 주변 진영에 '영국 원정군'을 모았고, 1804년 12월 스스로 프랑스인의 황제로 즉위했다. 1805년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가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자, 나폴레옹은 8월 말 불로뉴의 군대를 동쪽으로 돌렸다.

    Napoleonic Wars (English Wikipedia)Camp of Boulogne (English Wikipedia)War of the Third Coalition (English Wikipedia)

최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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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나폴레옹 전쟁은 무엇이었나

나폴레옹 전쟁은 1803년부터 1815년까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와 여러 유럽 국가의 동맹 사이에 벌어진 전쟁들을 말한다.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전쟁에 곧바로 이어졌기 때문에, 유럽은 짧은 휴지기를 빼면 20년 넘게 전쟁 상태였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 나폴레옹에 맞선 동맹을 보통 다섯 차례(제3~7차 대프랑스 동맹)로 센다. 제1·2차 동맹은 1802년 이전에 혁명 프랑스와 싸웠기 때문이다. 거의 내내 나폴레옹과 전쟁을 이어 간 나라는 영국 하나뿐이었다. 영국은 해군과 자금으로 대륙의 동맹국들을 지원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는 저마다 나폴레옹과 싸우다 패해 강화를 맺었다가, 뒤에 다시 싸움에 뛰어들었다.

전성기인 1810~1812년 무렵 나폴레옹의 제국과 종속국은 서유럽과 중부 유럽 대부분을 덮었다. 전쟁에는 수십만 명, 1812년에는 50만 명이 넘는 군대가 동원되었다. 전쟁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고, 프랑스 혁명의 법과 제도를 퍼뜨렸으며, 천 년 가까이 이어진 신성 로마 제국을 무너뜨렸고, 에스파냐에서 러시아까지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2][8]

쉬움

배경: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프랑스의 구체제를 무너뜨렸고, 1792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 전쟁에 들어갔다. 군주국들은 혁명 사상이 번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혁명 프랑스는 왕에 맞서는 민중을 돕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라인강과 알프스라는 '자연 국경'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대규모 징병(1793년 국민 총동원령)을 도입해 이전보다 훨씬 큰 군대를 만들었다.

1769년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포병 장교로 두각을 나타냈고, 1796~1797년 이탈리아 원정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집트 원정(1798~1801) 뒤 1799년 11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제1통령이 되었다. 1800년 다시 오스트리아를 꺾었고, 1802년 영국과 프랑스는 아미앵 화약을 맺었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몰타 문제, 스위스·이탈리아·네덜란드로의 프랑스 세력 확장, 무역 분쟁으로 영국은 1803년 5월 다시 선전 포고를 했다.

전쟁은 왜 다시 시작되어 그렇게 오래갔을까? 역사가들의 견해는 엇갈린다. 어떤 이는 나폴레옹의 개인적 야심과, 권력을 지키려면 군사적 영광이 필요했던 사정을 강조한다. 다른 이들은 무역과 제국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경쟁, 또는 프랑스의 패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구군주국들의 태도를 강조한다. 폴 슈로더는 나폴레옹이 안정된 타협의 기회를 거듭 걷어찼다고 보았고, 세력 균형 체제 자체가 불안정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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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1803~1807년: 트라팔가르, 아우스터리츠, 프랑스의 전성기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계획하고 불로뉴에 군대를 모았다. 1804년 그는 스스로 프랑스인의 황제로 즉위했다. 1805년 영국·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이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이제 '대육군(그랑다르메)'이라 불린 군대를 영국 해협에서 독일로 진군시켜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했고, 1805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세 황제가 맞붙었다 해서 '삼제 회전'이라고도 한다.

바다에서는 정반대 결과가 나왔다. 1805년 10월 21일 호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에스파냐 남부 트라팔가르곶 앞바다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격멸했다. 넬슨은 전사했지만 영국의 제해권은 전쟁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고, 영국 침공은 더는 현실적인 계획이 아니었다.

1806년 나폴레옹은 자신의 보호 아래 독일 국가들을 묶어 라인 동맹을 만들었고,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프로이센이 전쟁에 뛰어들었으나 1806년 10월 14일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궤멸했다. 참혹한 아일라우 전투와 1807년 프리틀란트에서의 프랑스 승리 뒤, 나폴레옹과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네만강의 뗏목 위에서 만나 틸지트에서 강화를 맺었다. 프로이센은 영토의 약 절반을 잃었고, 폴란드 땅에는 바르샤바 공국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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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대륙 봉쇄령과 반도 전쟁

영국을 침공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경제로 영국을 꺾으려 했다. 1806년 베를린 칙령과 1807년 밀라노 칙령으로 대륙 체제, 곧 대륙 봉쇄령이 만들어져 프랑스가 지배하거나 동맹한 지역 전체에서 영국과의 무역이 금지되었다. 영국은 해상 봉쇄와 자체 추밀원령으로 맞섰다. 봉쇄령은 대륙의 무역에 타격을 주고 밀무역과 반감을 키웠으며, 이를 강제하려다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에스파냐, 마침내 러시아까지 끌려 들어갔다. 영국의 중립국 선박 제한은 미국과의 1812년 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1807년 프랑스군은 에스파냐를 가로질러 포르투갈을 점령했고,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피신했다. 1808년 나폴레옹은 에스파냐 부르봉 왕가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형 조제프를 에스파냐 왕으로 앉혔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이 봉기했다가 가혹하게 진압되었는데, 이 사건은 뒷날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으로 남았다. 반란은 에스파냐 전역으로 번졌고, 1808년 7월 바일렌에서 프랑스군 한 부대가 항복했다.

반도 전쟁(1807/1808~1814)은 영국·포르투갈·에스파냐 정규군의 전역(영국군은 1809년부터 훗날 웰링턴 공작이 되는 아서 웰즐리가 지휘했다)과 에스파냐 게릴라('작은 전쟁')의 광범위한 비정규전이 뒤섞인 전쟁이었다. 사라고사 포위전 같은 공성전과 양측의 잔학 행위는 민간인에게 큰 고통을 주었고, 고야의 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에 기록되었다. 나폴레옹은 훗날 에스파냐를 '에스파냐 궤양'이라고 불렀다. 이 전쟁은 유럽 최초의 자유주의 헌법 가운데 하나인 카디스 헌법(1812)을 낳았고, 에스파냐 왕권의 붕괴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독립운동의 길을 열었다.

[2][4][8]

중급

1809~1812년: 바그람과 러시아 원정

오스트리아는 1809년 다시 전쟁에 나섰다(제5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슬링에서 처음으로 큰 좌절을 겪었지만 바그람에서 이겼다.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내주어야 했고, 1810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티롤에서는 안드레아스 호퍼가 이끈 농민 봉기가 진압되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러시아가 더는 지키지 않던 대륙 봉쇄령과 폴란드 문제 등으로 깨졌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제1진만 40만 명이 훨씬 넘고 증원군까지 합치면 60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 이 군대는 프랑스인·독일인·폴란드인·이탈리아인·네덜란드인 등 제국 전역에서 모은 병사들이었다. 러시아군은 보급 물자를 파괴하며 퇴각했다. 1812년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양군은 19세기에서 가장 참혹한 하루로 꼽힐 만큼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들어갔지만 도시는 불탔고, 알렉산드르 1세는 협상을 거부했다.

10월에 시작된 퇴각은 재앙으로 바뀌었다. 굶주림·질병·추위·코사크의 습격·파르티잔 공격이 군대를 무너뜨렸고, 11월의 베레지나강 도하는 참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러시아로 들어간 병사 가운데 돌아온 것은 극히 일부였다. 손실 추정치는 역사가마다 다르지만 대육군 대부분이 사라졌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러시아 군인과 민간인도 매우 많이 죽었다.

[5][3][8]

중급

1813~1815년: 라이프치히, 엘바, 워털루

1813년 프로이센이 러시아와 손잡았고, 이어 오스트리아와 스웨덴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프로이센에서는 1807년 이후의 개혁과 애국 열기가 합쳐져, 뒷날 독일인들이 '해방 전쟁'이라 부른 싸움이 벌어졌다. 나폴레옹은 새 군대를 모아 몇 차례 이겼지만, 1813년 10월 16~19일 '제국민 전투'라 불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그사이 웰링턴의 군대는 프랑스군을 에스파냐에서 몰아내고 남프랑스로 넘어갔다.

동맹군은 1814년 프랑스로 쳐들어가 3월 31일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4월 퇴위하고 엘바섬으로 유배되었으며,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승전국들은 유럽의 앞날을 정하려고 빈 회의를 열었다.

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에 상륙했고, 약 백 일 동안 다시 권력을 잡았다(백일 천하). 동맹국들은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1815년 6월 18일 지금의 벨기에에 있는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웰링턴의 영국·연합군과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패했다. 그는 다시 퇴위하고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어 1821년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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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인명 피해

사망자 수는 추정할 수밖에 없다. 1803~1815년 전쟁의 사망자는 민간인을 포함해 약 350만 명에서 700만 명까지 추정된다. 찰스 에스데일은 전체 500만~700만 명을 제시했고, 이보다 낮게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프랑스 군인 사망자는 1800~1815년 약 90만~100만 명으로 흔히 추정되며, 주요 동맹국 군대도 저마다 수십만 명을 잃었다. 전투보다 질병·추위·굶주림으로 죽은 병사가 훨씬 많았다.

민간인은 징발, 약탈, 포위, 게릴라 저항에 대한 보복, 그리고 군대를 따라 번진 발진티푸스 같은 전염병에 시달렸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러시아, 독일 중부, 이탈리아 일부가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징병은 사회 깊숙이 파고들었다. 프랑스 제국 전역의 가정이 아들을 잃었고, 징병 기피와 탈영이 널리 퍼졌다.

전쟁은 유럽 밖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802~1803년 생도맹그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되찾으려던 나폴레옹의 원정은, 1802년 다른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부활시킨 조치와 맞물려 있었는데,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아이티는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포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는 1808년 이후 에스파냐 왕정의 위기가 독립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영국 해군의 우위는 아시아와 카리브해에서 커져 가던 영국 제국을 지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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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결과: 빈 회의와 새로운 유럽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영국의 캐슬레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프로이센의 하르덴베르크, 프랑스의 탈레랑이 이끈 빈 회의(1814~1815)는 유럽 지도를 다시 그렸다. 회의는 정통 군주정을 되살리고, 프랑스 같은 패권 국가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세력 균형을 만들고자 했다. 러시아는 폴란드 대부분을, 프로이센은 라인 지방과 작센 일부를 얻었고,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 지위를 되찾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 자리에는 독일 연방이 들어섰다. 회의는 노예 무역을 원칙적으로 규탄하기도 했다. 이후 강대국들은 '유럽 협조 체제' 속에서 협력했고, 작은 전쟁과 혁명은 많았지만 약 한 세기 동안 유럽 전체를 휩쓰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통치는 오래가는 제도적 변화를 남겼다. 1804년 민법전(나폴레옹 법전)은 법 앞의 평등과 재산권을 보장하는 한편 남편과 아버지의 권위를 강화했으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법체계에 영향을 주었다. 중앙 집권적 행정, 많은 정복지에서의 봉건적 특권 폐지, 일부 지역의 유대인 해방, 교회 토지의 세속화는 되돌리기 어려웠다.

전쟁은 민족주의도 자극했다. 에스파냐·독일·러시아에서는 프랑스 지배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나폴레옹 군대에서 싸운 폴란드인과 이탈리아인에게는 희망의 형태로 나타났다. 영국은 최고의 해상·상업·제국 강국으로 떠올랐다. 군사 사상도 바뀌었다.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앙투안앙리 조미니는 여러 세대에 걸쳐 군사 교육을 좌우한 전쟁 이론을 썼다.

[6][1][9]

심화

나라마다 다른 전쟁의 기억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은 지금도 국민적 영웅이자 논쟁적 인물이다. 앵발리드의 무덤, 개선문, 거리 이름이 그의 승리를 기린다. 찬미하는 이들은 행정·법 개혁을 높이 사고, 비판하는 이들은 독재, 전쟁의 인명 피해, 1802년 노예제 부활을 강조한다. 그의 사망 200주년인 2021년에는 프랑스 국가가 그를 기념해야 하는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두고 공개 논쟁이 벌어졌다.

다른 나라들은 이 전쟁을 주로 프랑스 지배에 맞선 투쟁으로 기억한다. 러시아에서 1812년 전쟁은 '조국 전쟁'으로 불리며,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 새겨져 있다. 에스파냐에서 반도 전쟁은 '독립 전쟁(게라 데 라 인데펜덴시아)'이라 불리며 근대 에스파냐 민족 정체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독일에서 1813년의 해방 전쟁은 뒷날 민족주의 서사에 편입되었다. 영국은 트라팔가르와 워털루를 기념하며, 트라팔가르 광장과 넬슨 기념탑이 그 상징이다.

다른 곳의 기억은 더 양면적이다. 바르샤바 공국이 폴란드 국가를 되살렸기 때문에 많은 폴란드인은 나폴레옹을 긍정적으로 기억하며, 폴란드 국가(國歌)에도 보나파르트가 등장한다. 이탈리아와 저지대 국가에서 프랑스 지배는 근대화와 수탈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아이티에서 나폴레옹 원정군과의 전쟁은 최초로 성공한 노예 혁명이자 건국의 이야기이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808년 나폴레옹이 일으킨 위기가 독립의 불씨로 기억된다.

[1][4][5]

심화

1차 사료

이 전쟁들은 엄청난 양의 자료로 기록되어 있다. 대육군의 공식 전황 보고(선전으로 악명이 높아 '보고서처럼 거짓말한다'는 속담까지 생겼다), 19세기에 출간되고 현대에는 나폴레옹 재단이 더 완전한 판본으로 펴낸 나폴레옹의 방대한 서신, 모든 강대국의 외교 문서, 군 명령서와 병력 보고, 인구학자들이 활용하는 교구·징병 기록이 있다.

장군·장교·병사의 회고록은 풍부하고 생생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많은 회고록이 여러 해 뒤에 명예를 변호하거나 영웅담을 원하는 독자를 만족시키려고 쓰였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구술한 회고, 특히 라스카즈가 기록한 『세인트헬레나 회상록』(1823)은 왕들에게 패한 자유주의 황제라는 나폴레옹 전설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

당대 사람들이 전쟁을 어떻게 겪었는지 이해하는 데는 시각·문학 자료도 중요하다. 고야의 「전쟁의 참화」, 영국의 제임스 길레이 등이 그린 풍자화, 그리고 뒷날 스탕달과 톨스토이의 소설이 그렇다. 민간인의 일기, 청원서, 경찰 보고서는 징병·징발·점령의 부담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1][8]

심화

역사 서술과 논쟁

나폴레옹에 대한 해석은 늘 정치를 반영해 왔다. 네덜란드 역사가 피터르 헤일은 나치에게 수감되었던 경험을 거친 뒤 쓴 『나폴레옹: 찬반론』(네덜란드어판 1946, 영어판 1949)에서 19~20세기 프랑스 역사가들이 나폴레옹을 어떻게 평가해 왔는지 살피며, 세대마다 자신들의 관심사를 그에게 투영했음을 보여 주었다. 그를 혁명의 계승자로 보는 시각과, 혁명의 배신자 또는 현대 독재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 사이의 논쟁은 지금도 이어진다.

군사사가들은 오랫동안 나폴레옹의 용병술과 빠른 기동의 '체계'에 주목했고, 흔히 클라우제비츠와 조미니를 통해 그것을 읽었다. 20세기 후반부터 연구는 국제사와 사회사로 방향을 틀었다. 폴 슈로더의 『유럽 정치의 변모, 1763~1848』(1994)은 빈 체제가 국가들이 관계를 관리하는 방식의 실질적 변화였다고 주장했다. 찰스 에스데일의 『나폴레옹의 전쟁들: 국제사』(2007)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모든 강대국의 목표를 검토한다.

데이비드 A. 벨의 『최초의 총력전』(2007)은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 적을 완전히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사회 전체를 동원하는 새로운 전쟁 문화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비판자들은 '총력전'이 이 시기에 맞는 용어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역사가들은 나폴레옹 제국을 하나의 제국 체제로 보고 다른 제국들과 비교하며, 저항과 협력, 징병, 그리고 여성·농민·식민지 주민의 경험을 탐구한다. 여기에는 나폴레옹의 정책과 카리브해 노예제의 관계도 포함된다.

[7][9][8][10]

주요 전투 (21)

  1. 로디 전투1796년
  2. 마렝고 전투1800년
  3. 울름 전투1805년
  4.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1806년
  5. 아일라우 전투1807년
  6. 도스 데 마요 봉기1808년
  7. 바일렌 전투1808년
  8. 소모시에라 전투1808년
  9. 투델라 전투1808년
  10. 비메이로 전투1808년
  11. 아란후에스 폭동1808년
  12. 탈라베라 전투1809년
  13. 코루냐 전투1809년
  14. 알부에라 전투1811년
  15. 리사 해전 (1811년)1811년
  16. 살라망카 전투1812년
  17. 바다호스 공성전 (1812년)1812년
  18. 비토리아 전투1813년
  19. 리니 전투1815년
  20. 카트레브라 전투1815년
  21. 우아브르 전투1815년

핵심 개념

동맹 전쟁
나폴레옹은 대개 영국이 자금을 대는 동맹들과 잇달아 맞섰다. 동맹은 패배할 때마다 흩어졌다가 1813~1815년에야 끝까지 뭉쳤다.
대규모 군대
혁명기 징병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자립적인 군단으로 편성된 대군을 운용했고, 적국들도 이에 맞서 군대를 개혁해야 했다.
해군력과 경제 전쟁
트라팔가르 이후 영국의 제해권과 대륙 봉쇄령을 둘러싼 맞봉쇄로 무역 자체가 무기가 되었다.
혁명의 수출
프랑스의 지배는 민법전, 봉건적 특권 폐지, 중앙 집권 행정을 퍼뜨렸지만, 그것은 군사 점령과 무거운 수탈을 동반했다.
민족주의
에스파냐·독일·러시아의 대프랑스 저항과 폴란드인·이탈리아인의 희망은 근대 민족 정체성을 빚는 데 기여했다.
세력 균형
빈 회의는 어느 한 나라가 유럽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 했고, 이것이 유럽 협조 체제로 이어졌다.
대서양 세계에 미친 영향
전쟁은 아이티 독립,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이전을 불러왔다.

기록

  1. 1802년 — 영국과 프랑스의 아미앵 화약, 프랑스 식민지의 노예제 부활.
  2. 1803년 — 5월 영국의 대프랑스 선전 포고로 나폴레옹 전쟁 시작.
  3. 1804년 — 아이티 독립 선포(1월 1일), 나폴레옹 민법전 공포, 나폴레옹 황제 대관(12월 2일).
  4. 1805년 — 울름 전투, 트라팔가르 해전(10월 21일), 아우스터리츠 전투(12월 2일).
  5. 1806년 — 라인 동맹 결성과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베를린 칙령으로 대륙 봉쇄령 시작.
  6. 1807년 — 아일라우·프리틀란트 전투, 틸지트 조약, 프랑스의 포르투갈 침공.
  7. 1808년 — 마드리드 5월 2일 봉기,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에스파냐 왕위 즉위, 바일렌에서 프랑스군 패배.
  8. 1809년 — 아스페른-에슬링·바그람 전투, 오스트리아의 강화.
  9. 1812년 — 러시아 침공(6월), 보로디노 전투(9월 7일), 모스크바 퇴각과 베레지나강 도하.
  10. 1813년 — 제6차 대프랑스 동맹, 라이프치히 전투(10월 16~19일), 웰링턴의 비토리아 승리.
  11. 1814년 — 동맹군 파리 입성, 나폴레옹 퇴위와 엘바섬 유배, 빈 회의 개막.
  12. 1815년 — 백일 천하, 워털루 전투(6월 18일), 빈 회의 최종 의정서, 나폴레옹의 세인트헬레나 유배.

용어 풀이

대프랑스 동맹
공동의 적 프랑스와 싸우려고 맺은 국가들의 동맹. 1792~1815년에 일곱 차례 결성되었다.
대육군(그랑다르메)
'큰 군대'라는 뜻으로, 1805년부터 나폴레옹의 주력 야전군을 부른 이름.
대륙 봉쇄령
1806년 베를린 칙령으로 시작된, 유럽 대륙과 영국 사이의 무역을 금지한 나폴레옹의 조치.
게릴라
에스파냐어로 '작은 전쟁'. 소규모 부대의 비정규전을 뜻하며, 반도 전쟁을 계기로 여러 언어에 퍼졌다.
국민 총동원령
1793년 프랑스 혁명 정부의 대규모 징병령. 이 시대 대군의 바탕이 되었다.
나폴레옹 법전
1804년 프랑스 민법전. 많은 나라가 받아들이거나 본뜬 통일 사법(私法) 법전이다.
백일 천하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1815년 3월부터 6월까지 다시 권력을 잡은 기간.
유럽 협조 체제
1815년 이후 빈 체제를 유지하려고 강대국들이 협력한 체제.

묻고 답하기

왜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전쟁 이름을 붙였어요?

그 기간 내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와 프랑스군을 이끌었고, 그의 결정이 전쟁의 흐름을 좌우했기 때문이에요. 다만 역사가들은 이 전쟁이 강대국들의 더 오래된 경쟁에서 자라났다는 점도 지적해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왜 실패했어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보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러시아군은 한 번의 전투로 무너지지 않고 뒤로 물러났어요. 겨울이 오기 전부터 병과 탈영, 굶주림으로 군대가 많이 줄었고, 모스크바에서의 퇴각이 마지막 타격이 되었어요.

나폴레옹은 영웅이에요, 폭군이에요?

살아 있을 때부터 두 가지 평가가 함께 있었어요. 법과 행정을 근대화했고 장군으로서 존경받지만, 독재자로 다스렸고 수백만 명이 죽은 전쟁을 벌였으며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되살렸어요. 역사가들은 보통 그를 단순히 심판하기보다 설명하려고 해요.

나폴레옹 법전은 무엇이며 지금도 의미가 있나?

1804년 프랑스 민법전이다.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지금도 프랑스 민법의 바탕이며, 벨기에·이탈리아에서 루이지애나와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 민법에 영향을 주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총력전'이었나?

데이비드 벨 등은 대규모 징병, 이데올로기적 동원, 적의 완전한 파괴라는 목표를 근거로 이 용어를 썼다. 비판자들은 산업과 경제 전체가 동원된 20세기에 더 어울리는 말이라고 본다.

이 전쟁은 아시아에도 영향을 주었나?

대부분 간접적이었다. 전쟁 중에도 영국의 해군력과 인도 진출은 계속되었고 프랑스와의 경쟁이 영국의 아시아 전략을 빚었지만, 동아시아는 전쟁터가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

정확한 집계는 없다. 1803~1815년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는 대략 350만~7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전투보다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Napoleonic Wars. Wikipedia
  2. 나폴레옹 전쟁. 한국어 위키백과
  3. Napoleonic Wars casualties. Wikipedia
  4. Peninsular War. Wikipedia
  5. French invasion of Russia. Wikipedia
  6. Congress of Vienna. Wikipedia
  7. Pieter Geyl. Wikipedia
  8. Charles Esdaile, Napoleon's Wars: An International History, 1803–1815. Allen Lane, 2007
  9. Paul W. Schroeder,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s, 1763–1848. Clarendon Press, 1994
  10. David A. Bell, The First Total War: Napoleon's Europe and the Birth of Warfare as We Know It. Houghton Mifflin, 2007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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