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제2차 아편 전쟁

第二次鴉片戰爭 · 애로호 전쟁(Arrow War) · Seconde guerre de l'opium

1856–1860년 ·

한 문장으로

1856년부터 186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청나라를 상대로 교역 확대, 베이징 공사 주재, 아편 합법화를 강요하려고 벌인 전쟁으로, 황제의 원명원이 불타고 중국의 ‘굴욕의 세기’를 더욱 깊게 만든 조약들로 끝났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70년 전, 영국 상인들은 중국 황제가 금지했는데도 ‘아편’이라는 해로운 마약을 중국에 팔고 있었어요. 중국은 이미 1842년에 이 문제로 벌어진 전쟁, 곧 제1차 아편 전쟁에서 졌어요.

영국과 프랑스는 더 많은 것을 원했어요. 무역할 항구를 더 열고, 대사가 베이징에 살 수 있게 하고, 아편을 합법적으로 팔게 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청나라 황실은 들어주고 싶지 않았어요. 1856년, ‘애로호’라는 작은 배를 둘러싼 다툼이 영국에게 다시 싸울 핑계가 되었고, 프랑스도 함께 나섰어요.

영국과 프랑스에는 증기선과 최신 대포가 있었어요. 두 나라는 남쪽 도시 광저우를 점령한 뒤 배를 타고 북쪽 베이징으로 향했어요. 1860년 그들의 군대가 수도에 다다르자 황제는 피란을 떠났어요.

그리고 아주 슬픈 일이 일어났어요. 병사들이 베이징 근처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원 궁전 ‘원명원’에 들어가 예술품과 책을 약탈했어요. 그다음 영국 사령관이 궁전을 불태우라고 명령했지요. 지금도 부서진 돌기둥 폐허가 남아 있고, 그곳의 보물 상당수는 먼 나라의 박물관에 있어요.

중국은 외국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조약에 서명해야 했고, 러시아도 동북쪽의 넓은 땅을 가져갔어요. 중국에서 이 전쟁은 아픈 굴욕으로 기억되지만,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훨씬 덜 기억된답니다.

한눈에 보기

시기
1856년 10월 – 1860년 10월
장소
중국 남부(광저우), 보하이만 연안(다구 포대·톈진), 베이징 일대
참가 세력
영국·프랑스 대 청나라. 러시아와 미국은 함께 협상에 나서 조약상의 권리를 얻었다
다른 이름
애로호 전쟁, 영불 연합군의 중국 원정
주요 인물
파머스턴, 엘긴 경, 그로 남작, 해리 파크스 / 함풍제, 섭명침(예밍천), 셍게린친, 공친왕
결과
톈진 조약(1858)과 베이징 조약(1860): 베이징 공사관 설치, 개항장 추가, 아편 무역 합법화, 주룽반도 영국에 할양, 막대한 배상금. 러시아는 연해주 등 외만주 획득
사상자
서양 측 손실은 수백 명 규모. 중국의 군인·민간인 피해는 훨씬 컸지만 기록이 부실하다
상징
원명원의 약탈과 방화(1860년 10월)

쉬움

제2차 아편 전쟁이란

제2차 아편 전쟁은 1856년부터 1860년까지 여러 단계에 걸쳐 청나라와 영국·프랑스 연합이 벌인 전쟁이다. 발단이 된 배의 이름을 따서 ‘애로호 전쟁’이라고도 한다. ‘제2차’라고 부르는 것은 난징 조약으로 끝난 제1차 아편 전쟁(1839–1842) 뒤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난징 조약으로 중국은 다섯 항구를 열고 홍콩섬을 영국에 넘겼다.

이 전쟁은 한 가지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존 조약을 고쳐 중국을 무역과 그리스도교 선교에 더 넓게 개방하고, 외교관을 베이징에 상주시키며, 외국인이 조공국으로서 황제를 알현하는 중국식 질서가 아니라 대등한 주권 국가라는 유럽식 모델로 관계를 바꾸려 했다. 영국령 인도에서 재배되어 엄청난 양이 중국으로 밀수되던 아편은 영국이 지키려던 무역의 중심에 있었다.

전쟁은 중국의 패배, 베이징 점령, 그리고 거대한 황실 정원 궁전인 원명원의 파괴로 끝났다. 뒤이은 조약들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국과 서양의 관계를 규정했다.

[1][7]

쉬움

배경과 원인

19세기 초 영국 상인들은 중국에서 차·비단·도자기를 사들였지만, 그 대가로 중국인이 원하는 상품은 별로 없었다. 그 틈을 메운 것이 인도산 아편이었다. 청 정부가 금지했는데도 밀수는 급증했고, 아편은 영국령 인도의 주요 세입원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중독이 퍼지고 은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1839년 흠차대신 임칙서(린쩌쉬)가 영국 상인의 아편을 몰수해 폐기하자 영국은 전쟁을 일으켜 제1차 아편 전쟁에서 이겼다.

1842년 이후에도 긴장은 계속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무역이 기대만큼 늘지 않아 실망했다. 광저우의 주민과 관리들은 성벽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영국의 요구에 저항했다. 영국은 난징 조약 개정을 압박했고, 프랑스와 미국도 더 넓은 권리를 원했다. 1856년 2월에는 외국인의 선교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던 광시성에서 프랑스 선교사 오귀스트 샤플렌이 지방관에게 처형되어, 프랑스에 행동할 명분이 생겼다.

직접적인 불씨는 1856년 10월 8일에 붙었다. 청나라 관헌이 홍콩에 등록된 중국인 소유 선박 애로호에 올라 해적 혐의로 중국인 선원들을 체포한 것이다. 영국 영사 해리 파크스와 홍콩 총독 존 보링은 배가 영국의 보호 아래 있으며 영국 국기가 모욕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이 배의 등록은 이미 만료된 상태였다. 양광 총독 섭명침이 완전한 사과를 거부하자 영국 군함이 광저우를 포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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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누가 참여했나

전쟁을 주도한 것은 영국이었다. 총리 파머스턴은 무력 행사를 강하게 지지했다. 1857년 3월 하원이 애로호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파머스턴은 총선을 실시해 오히려 의석을 늘렸다. 영국 대중 상당수가 강경한 대중국 정책을 지지했다는 뜻이다. 엘긴 경이 원정군과 함께 특사로 파견되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샤플렌 사건을 내세워 영국과 손잡았고, 아시아에서 위신과 영향력을 얻고자 했다. 프랑스 특사는 장바티스트 루이 그로 남작이었다. 러시아와 미국은 동맹국으로 싸우지는 않았지만, 특사들이 원정을 따라다니며 따로 조약을 맺어 같은 특권을 얻었다.

중국 쪽에서는 함풍제의 청 왕조가 이미 국내에서 훨씬 큰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난징을 수도로 삼아 중국 중부 상당 부분을 장악한 태평천국 운동이었다. 그래서 청은 외국군을 상대로 제한된 병력밖에 투입할 수 없었다. 주요 지휘관은 광저우의 섭명침과 베이징으로 가는 길목을 지킨 몽골 왕족 셍게린친이었다.

[1][7]

쉬움

전쟁의 경과(1856–1858)

1856년 말의 첫 포격 뒤 광저우 일대에서는 소규모 전투가 이어졌고, 외국 상관(商館)이 불탔다. 대규모 작전은 1857년 인도에서 대봉기(세포이 항쟁)가 일어나 중국으로 향하던 영국군이 인도로 돌려지면서 늦어졌다. 1857년 12월 6,000명이 안 되는 영불 연합군이 광저우를 공격했고, 도시는 1858년 1월 1일 함락되었다. 섭명침은 사로잡혀 캘커타로 보내졌고 1859년 그곳에서 죽었다. 연합군은 몇 년 동안 중국인 괴뢰 행정 기구를 통해 광저우를 다스렸다.

이어 연합군은 조정을 직접 압박하려고 북쪽 보하이만으로 향했다. 1858년 5월 하이허강 어귀의 다구 포대를 점령하고 베이징의 관문 항구인 톈진으로 진격했다. 겁먹은 조정은 협상에 응했고, 1858년 6월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과 톈진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는 베이징 공사관 설치, 창장강 연안을 포함한 항구 추가 개방, 외국인의 내지 여행권, 그리스도교 선교의 자유, 배상금이 담겼다. 같은 해 뒤이어 합의된 관세 규칙은 사실상 아편 수입을 합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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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859–1860: 다구, 베이징, 그리고 원명원

조약은 1859년 베이징에서 비준될 예정이었다. 외국 외교관이 수도에 들어오는 것을 몹시 꺼린 청 조정은 사절단에게 다른 경로를 이용하라고 요구했고, 셍게린친은 다구 포대를 강화했다. 1859년 6월 영국 함대가 포대를 돌파하려다 여러 척의 포함을 잃고 크게 패했다. 미국 해군 준장 조사이어 태트널은 공식적으로 중립이었는데도 영국을 도왔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했다고 전해진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는 영국군 약 1만 1,000명(상당수가 인도 병사)과 프랑스군 약 6,7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8월 베이탕에 상륙해 21일 다구 포대를 점령하고 톈진을 차지했다. 9월 협상 중에 청군은 휴전 깃발 아래 있던 영국 협상 대표 해리 파크스, 외교관 헨리 로크, 『타임스』 특파원 토머스 볼비 등을 붙잡았다. 포로 상당수가 고문을 당했고, 영국·프랑스·인도 출신 포로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파크스와 로크를 비롯한 약 14명은 2주쯤 뒤 풀려났다. 9월 21일 연합군은 베이징 근처 팔리교(바리차오)에서 몽골 기병을 포함한 셍게린친의 군대를 격파했다. 함풍제는 열하(청더)의 피서산장으로 피란하고, 동생 공친왕에게 협상을 맡겼다.

10월 초 프랑스군, 이어 영국군이 원명원에 이르렀다. 원명원은 청 황제들이 150년 동안 조성한 궁전·정원·누각의 거대한 복합 단지로, 예수회 선교사가 설계한 서양식 건물도 있었다. 병사들은 도자기·옥·비단·서적·예술품을 약탈했다. 그리고 10월 18일, 엘긴 경은 포로 학대에 대한 처벌로 궁전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베이징 주민이 아니라 황제 개인에게 타격을 주는 목표를 고른 것이었다. 불은 며칠 동안 탔다. 베이징은 성문을 열었고, 10월 24일과 25일 공친왕은 영국·프랑스와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원명원에서 잃은 것의 규모는 헤아리기 어렵다. 단지 면적은 약 3.5제곱킬로미터로 자금성의 몇 배에 이르렀고, 회화·서예·청동기·희귀본 같은 황실 소장품이 있었다. 18세기의 거대한 총서 『사고전서』의 몇 안 되는 완질 필사본 가운데 하나도 이곳에 있었다. 장교와 병사들은 현장에서 약탈품을 경매에 붙였고, 물건들은 나중에 유럽 곳곳에서 팔렸다. 일부는 빅토리아 여왕과 나폴레옹 3세에게 바쳐졌다. 1860년의 파괴가 완전하지는 않아 몇몇 건물은 남았지만,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다시 훼손되었고 이후 건축 자재로 뜯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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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사상자와 민간인 피해

이 전쟁의 수치는 불확실하다. 영국·프랑스의 전투 손실은 전사자 수백 명 규모로 작았지만, 질병으로 죽은 사람은 더 많았다. 중국의 군인 손실은 흔히 수천 명으로 추정되지만, 청은 믿을 만한 총계를 남기지 않았고 일부 서양 측 수치는 분명히 불완전하다. 광저우와 톈진, 보하이 연안과 베이징 근교 마을에서 포격·시가전·약탈로 희생된 민간인은 체계적으로 기록된 적이 없다.

민간인 피해는 죽음에 그치지 않았다. 광저우는 거의 4년 동안 점령되었고, 포격으로 도시와 교외 일부가 파괴되었다. 베이징으로의 진격에는 병사들과 현지 범죄자들의 약탈이 뒤따랐다. 원명원의 파괴로 세계적인 미술·건축·서적 컬렉션 하나가 사라졌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잠긴 방에 숨어 있던 환관과 궁녀 약 300명이 건물이 불타면서 목숨을 잃었다고 하지만, 이런 수치는 검증할 수 없다.

조약은 해외 노동을 위한 중국인 노동자 모집도 부추겼다. 베이징 조약은 중국인이 영국·프랑스 선박을 타고 이민하는 것을 허용해 이른바 ‘쿨리 무역’에 법적 근거를 주었다. 이 무역에서 많은 노동자가 속거나 강제로 끌려가 쿠바와 페루 같은 곳에서 가혹한 조건에 시달렸다. 한편 아편 합법화로 확산의 장벽이 사라져, 중국의 아편 소비는 이후 수십 년 동안 계속 늘었다.

[1][2][4]

중급

결과와 영향

베이징 조약은 톈진 조약을 확인하고,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배상금을 각각 800만 냥으로 늘렸으며, 톈진을 개항하고, 홍콩섬 맞은편의 주룽(구룡)반도를 영국에 할양했다. 외국 공사들이 베이징에 상주하게 되었고, 1861년 청은 외교를 담당하는 새 관청인 총리각국사무아문(총리아문)을 만들었다. 옛 조공 체제로는 더 이상 서양과의 관계를 다룰 수 없다는 신호였다.

영토상 가장 큰 이득을 본 나라는 총 한 발 쏘지 않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아이훈 조약(1858)과, 중재자를 자처한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가 맺은 별도의 베이징 조약(1860년 11월)으로 아무르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 땅, 약 100만 제곱킬로미터를 얻었다. 여기에는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운 곳도 포함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동해(일본해) 연안을 잃었다.

중국 안에서는 패배가 엘리트 일부에게 충격을 주었다. 1861년 함풍제가 열하에서 죽자 정변(신유정변)으로 공친왕과, 서태후를 포함한 두 황태후가 권력을 잡았다. 새 지도부는 서양 열강과 더 협력했고, 열강은 이제 태평천국 진압에서 청을 도왔다. 청은 무기 공장·조선소·번역 학교를 세우는 양무운동을 시작했다. 더 넓게 동아시아에서도 베이징 함락 소식은 이웃 나라들을 놀라게 했다. 조선에서는 연행사가 황제의 피란을 보고했고, 이 사건은 흔히 훗날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서양 세력에 대한 두려움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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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전쟁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중국에서 제2차 아편 전쟁은 ‘백년국치’(百年國恥), 곧 제1차 아편 전쟁부터 1949년까지 중국이 침략당하고 불평등 조약을 강요당한 시기의 핵심 장면이다. 원명원 유적, 특히 서양식 궁전의 부서진 대리석 아치는 폐허 그대로 보존되어 애국주의 교육에 쓰인다. 많은 중국인은 외국 박물관과 개인 소장가에게 있는 약탈 유물을 도난품으로 여긴다. 원명원 분수의 청동 십이지 수두(獸頭)가 경매에 나올 때마다, 특히 2009년에 강한 항의가 일었고, 일부 수두는 기증자들을 통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영국에서 이 전쟁은 오늘날 거의 기억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논란이 컸다. 1857년 의회 토론에서 리처드 코브던과 윌리엄 글래드스턴 같은 정치인은 애로호 사건을 부당하다고 비난했다. 당시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기고하던 카를 마르크스도 영국의 아편 무역과 전쟁을 비판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기록들은 원정을 찬양하며, 원명원 방화를 포로 고문에 대한 응징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프랑스에서도 이 전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명한 글이 하나 있다. 1861년 망명 중이던 작가 빅토르 위고는 버틀러 대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약탈을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두 강도’의 범죄라고 규탄했다. 원명원 유물은 퐁텐블로 궁전의 외제니 황후 중국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민족의 굴욕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거의 잊힌 일로 남은 이 엇갈린 기억은 당시의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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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차 사료

영국 사료는 풍부하다. 애로호 사건과 협상에 관한 의회 문서(‘블루북’), 사후 출간된 엘긴 경의 일기와 편지, 억류 경험을 쓴 헨리 로크의 기록 같은 장교·외교관의 회고록, 신문 특파원들의 보도가 있다. 이 사료들은 상세하지만 영국 정부의 정당화 논리를 반영하며, 의회 문서는 출간할 것을 골라 실었다.

프랑스 사료로는 공식 서한, 장교들의 회고록, 팔리교 전투 뒤 ‘팔리카오 백작’이 된 쿠쟁몽토방 장군의 회고록, 약탈을 묘사한 편지들이 있다. 중국 사료로는 청 문서고의 상주문과 상유가 있으며, 이는 『주판이무시말』(籌辦夷務始末) 같은 외교 사료집에 모여 있다. 공친왕 주변 관료들의 글도 있다. 이 자료들은 저항할지 협상할지를 둘러싼 조정의 논쟁과, 수도에 외교관을 들이는 데 대한 강한 거부감을 보여 준다.

역사가들은 이 사료들을 신중하게 비교해야 한다. 병력과 사상자 수는 크게 엇갈리고, 포로 체포와 원명원 파괴에 대한 각국의 기록은 서로 다른 목적에 봉사한다. 베이징 일대의 중국 문서 일부는 1860년의 혼란 속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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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역사 서술과 논쟁

예전 서양의 서술은 이 전쟁을 근대적·상업적인 서양과, 정상적 외교를 거부한 오만하고 고립된 중국의 충돌로 그리곤 했다. 비판자들은 오래전부터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J. Y. 웡의 『치명적인 꿈』(Deadly Dreams, 1998)은 영국과 인도의 재정 기록을 바탕으로, 전쟁을 이끈 것은 무엇보다 영국령 인도와 영제국 경제에서 아편이 차지한 경제적 비중이었고 애로호 사건은 구실이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역사가들은 영국이 조약 이행에 필수적이라고 본 공사 상주 같은 외교적 목표에 더 무게를 둔다.

문화사가들은 이 전쟁을 주권과 의례에 대한 관념의 충돌로 살폈다. 제임스 헤비아의 『영국식 교훈』(English Lessons, 2003)은 원명원 약탈과 방화를 포함한 영국의 외교와 폭력이 청에게 서양식 국제 관계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려는’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에릭 링마르의 『자유주의적 야만』(Liberal Barbarism, 2013)은 스스로 자유롭고 문명화되었다고 여긴 유럽 열강이 왜 원명원을 파괴했는지, 그리고 그 사건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기억되었는지를 탐구했다.

중국,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학은 이 전쟁을 제국주의 침략과 민족적 굴욕의 역사 속에 놓고, 불평등 조약과 문화유산 약탈을 강조해 왔다. 최근에는 중국 안팎의 연구가 청 조정 자신의 결정, 동시에 벌어진 태평천국과의 전쟁, 러시아의 역할에도 주목한다. 이 전쟁이 청의 정책을 얼마나 바꾸었는지, 그리고 이를 무엇보다 아편 전쟁으로 볼지, 무역 전쟁으로 볼지, 외교적 평등을 둘러싼 전쟁으로 볼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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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 (12)

  1. 주장 포대 해전1856년
  2. 보그 해전1856년
  3. 광저우 전투1856년
  4. 애로호 사건1856년
  5. 프렌치폴리 요새 점령1856년
  6. 광저우 전투1857년
  7. 파산크리크 해전1857년
  8. 에스케이프 크리크 전투1857년
  9. 마카오 포대 전투1857년
  10. 다구 포대 전투1858년
  11. 팔리카오 전투1860년
  12. 다구 포대 전투1860년

핵심 개념

포함 외교
영국과 프랑스는 해군과 군대의 힘으로 중국이 새 무역·외교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불평등 조약
치외법권과 협정 관세 등, 중국에 상호성 없는 특권을 강요한 조약들.
아편과 제국
영국령 인도에서 재배되어 중국에서 팔린 아편은 제국의 주요 세입원이자 영국 정책의 핵심 동기였다.
세계 질서의 충돌
청의 조공 체제와 대등한 주권 국가라는 유럽의 관념이 베이징 공사 주재 같은 문제에서 부딪쳤다.
두 전선의 전쟁
청은 외국군과 싸우는 동시에 태평천국과도 싸워야 해서 저항에 한계가 있었다.
문화 파괴
원명원의 약탈과 방화는 제국주의 폭력의 오래된 상징이 되었다.
백년국치
중국인의 기억에서 이 전쟁은 오늘날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외세 침략의 한 세기에 속한다.

기록

  1. 1842년 — 난징 조약으로 제1차 아편 전쟁이 끝난다.
  2. 1856년 — 샤플렌 신부 처형(2월), 애로호 사건(10월 8일), 영국의 광저우 포격.
  3. 1857년 — 하원 비판 결의 뒤 파머스턴이 총선에서 승리, 인도 대봉기로 원정 지연, 12월 연합군이 광저우 공격.
  4. 1858년 — 광저우 함락(1월 1일), 다구 포대 점령, 톈진 조약 체결(6월), 러시아와 아이훈 조약(5월).
  5. 1859년 — 영국의 다구 포대 공격이 격퇴된다(6월).
  6. 1860년 — 연합군이 다구 포대 점령(8월 21일), 파크스 일행 억류(9월), 팔리교 전투(9월 21일).
  7. 1860년 — 원명원 약탈과 방화(10월), 베이징 조약 체결(10월 24–25일), 러시아와의 베이징 조약(11월).
  8. 1861년 — 총리아문 설치, 함풍제가 열하에서 사망, 공친왕과 서태후가 권력을 잡는다.
  9. 1861년 — 빅토르 위고가 버틀러 대위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명원 약탈을 규탄한다.

용어 풀이

청 왕조
만주족이 세운 중국의 마지막 황조(1644–1912).
아편
양귀비로 만든 중독성 마약. 영국령 인도에서 재배되어 중국으로 밀수되었다.
개항장(조약항)
조약에 따라 외국인의 무역과 거주에 열린 중국의 항구.
공사관
공사가 이끄는 외교 사절단, 곧 수도에 있는 외국 외교관의 거처.
배상금
전쟁에 진 나라가 이긴 나라에 강제로 내는 돈.
치외법권
외국인이 현지 법정이 아니라 자국 영사의 재판을 받을 권리.
냥(兩)
화폐로 쓰인 중국의 은 무게 단위.
원명원
베이징 북서쪽에 있던 청 황제들의 거대한 정원 궁전. 영어로는 ‘옛 여름 궁전’이라 한다.
총리아문
1861년에 세워진 청의 외교 담당 관청.
조공 체제
외국 군주가 사절과 예물을 황제에게 보내던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외교 질서.

묻고 답하기

배 한 척 때문에 시작됐는데 왜 ‘아편 전쟁’이라고 하나요?

애로호 사건은 불씨였을 뿐이고, 영국이 지키려던 무역의 중심에는 아편이 있었어요. 전쟁 뒤 조약으로 아편 무역도 합법화되었지요. 그래서 많은 역사가가 이 이름을 그대로 써요.

프랑스는 왜 참전했나요?

프랑스는 샤플렌 신부의 처형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아시아에서의 위신과 무역, 가톨릭 선교 보호를 원했어요.

원명원은 왜 불탔나요?

엘긴 경이 연합군 포로의 고문과 죽음에 대한 처벌로, 황제 개인을 겨냥해 명령했어요. 당시에도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를 문화 파괴 행위로 봐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요?

서양 측 전사자는 수백 명 규모였어요. 중국 군인은 적어도 수천 명이 죽었고, 민간인 희생은 아무도 세지 않아 알 수 없어요.

러시아는 무엇을 얻었나요?

러시아는 싸우지 않고도 이 위기를 이용해 아무르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의 외만주를 얻었고, 그곳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웠어요.

조선과 일본에도 영향이 있었나요?

네. 베이징 함락 소식은 두 나라 모두를 놀라게 했어요. 조선에서는 흔히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배경으로 거론되고, 일본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한 두려움을 키웠어요.

이 전쟁은 아편 때문이었나요, 외교 때문이었나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갈려요. J. Y. 웡 같은 학자는 아편 세입을 강조하고, 다른 학자들은 공사 상주와 조약 이행이라는 영국의 요구를 강조해요. 대부분은 둘 다 중요했다고 봐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Second Opium War. Wikipedia
  2. Old Summer Palace. Wikipedia
  3. Treaty of Tientsin. Wikipedia
  4. Convention of Peking. Wikipedia
  5. Treaty of Aigun. Wikipedia
  6. Century of humiliation. Wikipedia
  7. J. Y. Wong, Deadly Dreams: Opium, Imperialism, and the Arrow War (1856–1860) in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8. James L. Hevia, English Lessons: The Pedagogy of Imperialism in Nineteenth-Century China. Duke University Press, 2003
  9. Erik Ringmar, Liberal Barbarism: The European Destruction of the Palace of the Emperor of China. Palgrave Macmillan, 2013
  10. Julia Lovell, The Opium War: Drugs, Dreams and the Making of China. Picador, 2011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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