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제2차 세계 대전

Second World War · Zweiter Weltkrieg ·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 第二次世界大戰 · 太平洋戦争

1939–1945년 ·

한 문장으로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중국에서는 1937년부터)은 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일본 제국이 정복으로 제국을 세우려다 소련·미국·영국·중국이 이끄는 연합국에 패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홀로코스트로 학살된 유대인 600만 명을 포함해 약 6,000만~7,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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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80년 전, 온 세상이 거대한 전쟁에 휘말렸어요. 한쪽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었어요. 다른 쪽은 영국, 소련(러시아를 포함한 큰 나라), 미국, 중국 등 많은 나라였어요.

독일과 일본은 힘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싶어 했어요.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이미 1937년에 중국을 공격했어요. 유럽에서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에 쳐들어가면서 전쟁이 시작됐어요. 곧 싸움은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과 대서양 등 세계 거의 모든 곳으로 번졌어요.

이 전쟁은 군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특히 잔인했어요. 도시에 폭탄이 떨어졌어요. 나치 정부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약 600만 명을 죽였어요. 이것을 '홀로코스트'라고 해요. 로마(집시라고 불리던 사람들), 장애인, 폴란드인 등 다른 많은 사람도 죽임을 당했어요.

그때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많은 한국 사람이 광산과 공장으로 끌려가 일했고, 젊은 남자들은 억지로 군인이 되기도 했어요. 많은 소녀와 젊은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끔찍한 피해를 당했어요.

전쟁은 1945년에 끝났어요. 독일은 5월에 항복했고, 일본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두 발을 떨어뜨린 뒤인 8월에 항복했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광복절이 되었어요. 전쟁이 끝난 뒤 여러 나라가 평화를 지키려고 국제 연합(유엔)을 만들었어요.

한눈에 보기

기간
1939년 9월 1일(독일의 폴란드 침공) ~ 1945년 9월 2일(일본 항복 문서 조인). 중국에서는 1937년 7월부터 중일 전면전
주요 전장
유럽(서부·동부 전선), 지중해·북아프리카, 대서양, 중국, 동남아시아, 태평양
연합국
소련(1941년 6월부터), 미국(1941년 12월부터), 영국과 영연방, 중국, 자유 프랑스, 폴란드 등
추축국
독일, 이탈리아(1943년까지), 일본, 그리고 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 등 동맹국과 공동 교전국 핀란드
사망자(추정)
기근·질병 사망을 포함해 약 6,000만~7,500만 명, 민간인이 다수. 소련 2,000만~2,700만 명, 중국 1,400만~2,000만 명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 나치 독일과 협력자들이 유대인 약 600만 명을 학살. 로마, 장애인, 소련군 포로 등도 대량 학살
한국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대규모 노무·병력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제도. 1945년 8월 15일 광복, 곧바로 38선 분할
결과
연합국 승리, 독일·일본 점령, 국제 연합 창설, 냉전과 탈식민의 시작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재생을 누르면 지도에서 전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표시는 전투·사건, 화살표는 기록에 남은 진군로입니다.

1939년 8월 23일
1/20 · 독소 불가침 조약과 폴란드 침공
독일과 유럽 추축 동맹국(1941~1944년 공동 교전국 핀란드 포함)이탈리아(1943년 9월까지)일본소련영국과 영연방미국·프랑스·폴란드와 그 밖의 연합국

단계

  1. 중국에서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이미 일본과의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동쪽을 안정시킨 뒤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고,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9월 17일에는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라 소련이 동쪽에서 쳐들어왔고 폴란드는 분할되었다. 폴란드 야전군의 마지막 부대는 코츠크 전투 끝에 10월 6일 항복했다.

    World War II (English Wikipedia)Marco Polo Bridge incident (English Wikipedia)Molotov–Ribbentrop Pact (English Wikipedia)Invasion of Poland (English Wikipedia)Soviet invasion of Poland (English Wikipedia)Battle of Kock (1939) (English Wikipedia)

최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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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제2차 세계 대전은 어떤 전쟁이었나

제2차 세계 대전은 주로 두 진영 사이에 벌어진 세계 전쟁이다. 독일·이탈리아·일본과 여러 작은 동맹국으로 이루어진 추축국은 영토를 정복하고 제국을 세우려 했다. 소련·미국·대영 제국과 영연방·중국을 중심으로 수많은 나라와 저항 운동이 함께한 연합국은 이들을 막으려고 싸웠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부터 일본의 항복까지인 1939~1945년을 흔히 전쟁 기간으로 잡는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더 일찍 시작되었다고 보는 역사가가 많다.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점령했고, 1937년 7월 중일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에게 이 전쟁은 8년, 1931년부터 세면 14년에 걸친 것이었다. 소련에게는 1941~1945년 독일과의 전쟁이 핵심이었고, 러시아인들은 이를 '대조국 전쟁'이라고 부른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참혹한 전쟁이었다. 사망자는 약 6,000만~7,500만 명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제노사이드, 도시에 대한 대규모 폭격, 수백만 노동자의 강제 이동과 노예화, 기근, 그리고 전쟁에서 핵무기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쓰인 일이 모두 이 전쟁에서 벌어졌다.

[1][2][3]

쉬움

전쟁은 왜 일어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강화 조약은 특히 독일에 깊은 원한을 남겼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대량 실업을 낳고 극단주의 운동이 지지를 얻는 데 한몫했다. 이탈리아에서는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가 집권했다. 독일에서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인종적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재무장, 동유럽 '생존 공간(레벤스라움)' 정복을 내건 채 권력을 잡았다.

일본에서는 군부가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점점 키웠다. 일본은 이미 타이완(1895)과 한국(1910년 강제 병합)을 식민지로 삼았다. 1931년 일본군은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1937년 7월 베이징 근처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일어난 충돌이 중일 전면전으로 번졌다. 일본군은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하고 대규모 학살과 강간을 저질렀다. 난징 대학살 희생자 수는 추정치가 크게 엇갈리고 지금도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다. 많은 역사가는 수만 명에서 20만 명 이상을 제시하고, 중국 정부의 공식 수치는 30만 명이다.

유럽에서 독일은 재무장하고 라인란트에 군대를 다시 들여보냈으며(1936),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1938년 3월). 뮌헨 회담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동의를 얻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차지했다(1938년 9월). 영국과 프랑스는 또 한 번의 전쟁을 피하려고 '유화 정책'을 폈다. 1939년 3월 독일은 체코 나머지 지역을 점령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동유럽을 나눠 갖는 비밀 의정서가 딸린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었다.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 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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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1939~1941년 유럽: 독일의 초기 승리

폴란드는 서쪽에서 독일에, 9월 17일부터는 동쪽에서 소련에 공격당해 몇 주 만에 무너졌다. 두 점령국 모두 폴란드인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독일은 폴란드 지도층을 죽이고 유대인 박해를 시작했으며, 소련은 수십만 명을 강제 이주시키고 1940년 카틴 등지에서 폴란드 장교 등 약 2만 2,000명을 학살했다.

1940년 봄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이어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프랑스를 약 6주 만에 정복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됭케르크에서 철수했다. 프랑스는 휴전 협정을 맺었고, 북부는 점령당했으며, 비시에서는 협력 정권이 통치했다. 샤를 드골은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다. 윈스턴 처칠 총리가 이끄는 영국은 유럽에서 홀로 싸움을 이어 갔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의 공습을 버텨 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참전해 북아프리카와 발칸에서 싸웠지만 자주 독일의 도움이 필요했다. 1941년 독일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정복했다. 점령된 유럽 곳곳에서 저항 운동이 일어났고, 한편으로는 점령자에게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저항과 협력, 그리고 살아남기 사이의 경계는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민감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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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동부 전선: 역사상 가장 큰 지상전

1941년 6월 22일 독일과 동맹국들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인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공격했다. 동부의 전쟁은 처음부터 섬멸전으로 계획되었다.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코앞까지 밀고 들어갔다. 레닌그라드는 거의 900일 동안 포위되었고, 시민 약 100만 명 이상이 대부분 굶주림으로 죽었다. 소련군 포로는 대부분의 추정으로 약 300만 명이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굶주림·질병·처형으로 죽었다.

붉은 군대는 1941년 12월 모스크바 앞에서 독일군을 막아 냈다. 독일군 한 개 야전군의 항복으로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1943)는 흔히 전환점으로 꼽힌다. 1943년 쿠르스크에서 독일이 패한 뒤 소련군은 서쪽으로 진격했고,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 중부 집단군을 괴멸시켜 폴란드와 독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붉은 군대는 1945년 4월 말~5월 초 베를린을 점령했다.

독일군 손실의 대부분은 동부 전선에서 나왔다. 소련의 사망자는 2,000만~2,7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어느 나라보다 많았다. 벨라루스·우크라이나·발트 3국·러시아 서부는 점령, 대량 총살, 불타 버린 마을, 기근을 겪었다. 소련 정권 역시 전쟁 중에 폭력을 저질렀는데, 체첸인과 크림 타타르인처럼 '불충'을 이유로 민족 전체를 강제 이주시킨 것이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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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홀로코스트와 나치의 범죄

홀로코스트는 1933년 이후 여러 해에 걸친 차별과 폭력 끝에, 1941~1945년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협력자들이 유럽 유대인 약 600만 명을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박해하고 학살한 일이다. 유대인들은 권리와 재산을 빼앗기고 게토에 갇힌 뒤 살해되었다. 점령된 소련 땅에서는 아인자츠그루펜 등의 부대가 현지 협력자와 함께 대량 총살을 저질렀고, 점령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트레블링카·소비보르·베우제츠·헤움노·마이다네크 같은 절멸 수용소에서는 희생자를 가스로 죽였다.

로마와 신티도 절멸 대상이었다. 로마 희생자 수는 약 20만 명에서 50만 명까지 추정치가 크게 다르다. 나치는 전쟁 전후로 '안락사' 계획을 통해 장애인 약 25만 명을 죽였다. 폴란드 민간인, 소련군 포로, 정치적 반대자, 동성애자 남성, 여호와의 증인 등도 박해받고 살해되었다. 점령된 유럽에서 수백만 명이 강제 노동자로 독일에 끌려갔다.

홀로코스트는 방대한 증거로 입증된다. 독일의 행정 문서, 생존자·가해자·목격자의 증언, 사진, 수용소의 물리적 유적이 그것이다.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 쓴 안네 프랑크의 일기, 그리고 프리모 레비와 엘리 위젤의 회고록 같은 생존자의 증언은 세계가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을 빚었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트레블링카·소비보르의 수용소 봉기 같은 유대인의 저항도 있었다.

[4][5]

중급

아시아·태평양 전쟁

가장 오래 싸운 것은 중국이었다.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모두 일본과 싸웠다. 중국군은 8년 동안 많은 일본군을 붙잡아 두었다. 일본군은 학살, 화북 지방의 이른바 '삼광(三光) 작전', 충칭 같은 도시 폭격, 만주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포함한 세균전·화학전을 저질렀다. 중국의 사망자는 1,400만~2,0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수천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석유와 자원을 원하던 일본은 미국의 금수 조치에 맞서 1941년 12월 7일(현지 시각)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공격하고, 동시에 영국령 말라야·홍콩·필리핀을 쳤다. 일본은 몇 달 만에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 버마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를 정복하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구호 아래 아시아의 해방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실제 점령은 강제 노동, 식량 수탈, 가혹한 탄압을 뜻했다. 연합군 포로와 수십만 명의 아시아인 노무자('로무샤')가 태면(타이-버마)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다. 1944~1945년 베트남에, 1943년 영국 통치 아래 벵골에 기근이 닥쳤는데, 벵골에서는 전시 정책이 재난을 키웠다.

전세는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과 과달카날(1942~1943)에서 뒤집혔다. 미군은 '섬 건너뛰기' 작전으로 태평양을 가로질러 진격했고, 영국·인도군은 버마에서 싸웠다. 1945년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는 몹시 참혹했으며, 많은 오키나와 민간인이 죽었고 일부는 강요나 압박 속에 집단 자결로 내몰렸다. 미군 폭격기는 소이탄 공습으로 일본 도시들을 파괴했는데,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은 하룻밤에 약 10만 명을 죽였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고, 1945년 말까지 약 15만~24만 6,00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8월 8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로 쳐들어갔다.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발표하고 9월 2일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1][3][6][10]

중급

전시 일본 지배 아래의 한국

한국은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독립 국가로서 참전하지 않았다. 1937년 이후 조선총독부는 강제 동화 정책, 이른바 황국 신민화 정책을 폈다. 한국인에게 신사 참배와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하고, 학교에서 일본어를 쓰게 했으며, 1940년부터는 일본식 성명을 쓰게 했다(창씨개명).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이 한국에도 적용되어 국가가 전쟁을 위해 노동력과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한국인이 한국·일본·사할린·만주·태평양 섬들의 광산·공장·공사장·군사 시설에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동원 방식은 겉으로는 자발적인 '모집'(1939년부터)에서 '관 알선'(1942년부터)을 거쳐, 국민 징용령을 한국인에게 적용한 징용(1944년부터)으로 바뀌었다. 실제로는 모든 단계에서 강제가 흔했다. 동원 규모는 무엇을 세느냐에 따라 추정치가 크게 다르다. 중복 동원과 한반도 안 동원까지 포함한 약 540만 명이라는 수치가 자주 인용되며, 한반도 밖으로 끌려간 노무자 수는 흔히 수십만 명 규모로 추정된다. 많은 이가 위험한 환경에서 적은 임금을 받거나 임금을 떼인 채 일했고, 목숨을 잃은 이도 있었다. 한국인은 1938년부터 '지원병'으로, 1944년부터는 징병으로 군인이 되었고, 군속으로도 동원되었다.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된 군속 가운데 일부는 전후 연합국에 의해 전범으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일본군은 제국 곳곳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여성과 소녀들을 붙잡아 두고 군인들의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 피해자는 한국·중국·타이완·필리핀·인도네시아·네덜란드 등 여러 곳 출신이었고, 한국 여성은 가장 큰 집단 가운데 하나였다. 전체 피해자 수는 흔히 약 2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보다 많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많은 이가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속거나 강제로 끌려갔고, 생존자들은 체계적인 강간과 학대를 증언했다. 이 문제는 1991년 김학순의 공개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993년 고노 담화에서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2015년 한일 합의로 10억 엔 규모의 재단이 만들어졌지만, 많은 생존자와 지원 단체가 이를 거부했고 지금도 논란이 이어진다. 일부 일본 정치인과 논객은 강제성을 부정하지만, 생존자와 유엔 인권 기구, 대다수 역사가는 이 제도를 성노예제로 규정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가운데에도 수만 명의 한국인이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노무자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싸움을 이어 갔다.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1년 12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고,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다른 한국인 투사들은 만주에서, 또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싸웠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았지만, 한반도는 곧바로 38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의 점령 지역으로 나뉘었다. 이것이 남북 분단의 출발점이다.

[7][8][2]

중급

서방 연합국의 전쟁과 독일의 패배

대서양에서는 독일 잠수함이 영국의 보급로를 끊으려 했다. 연합국은 호송 선단, 암호 해독(블레츨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 포함), 항공 초계로 1943년까지 차츰 이 싸움에서 이겼다. 미국은 무기 대여법(렌드리스)으로 영국·소련·중국에 막대한 물자를 보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영국·영연방군이 1942년 엘알라메인에서 독일·이탈리아군을 물리쳤고, 영미군이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1943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는 항복했지만 곧 독일에 점령되어, 긴 전역과 함께 레지스탕스와 파시스트 살로 공화국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다. 1944년 6월 6일(디데이)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해 8월에 파리를 해방했다. 영국과 미국 폭격기는 전쟁 내내 독일 도시들을 공격했다. 함부르크(1943)와 드레스덴(1945) 공습은 한 번에 수만 명의 민간인을 죽였으며, 지역 폭격의 도덕성과 효과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독일의 마지막 공세인 아르덴 공세(벌지 전투, 1944년 12월)는 실패했다. 연합군이 동서 양쪽에서 독일로 들어가며 강제 수용소들을 해방했고, 나치 범죄의 참상이 온전히 드러났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서 자살했고, 독일은 1945년 5월 7~8일 무조건 항복했다.

[1][9]

중급

인명 피해와 결과

사망자 추정치는 불확실하지만 엄청나다. 전쟁과 관련된 기근·질병 사망을 포함해 약 6,000만~7,500만 명이며, 절반 이상이 민간인이었다. 소련과 중국의 사망자를 합하면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폴란드는 폴란드 유대인 약 300만 명을 포함해 전쟁 전 인구의 약 17퍼센트를 잃었다. 독일의 사망자는 약 700만 명, 일본은 250만~310만 명으로 추정된다. 동남아시아·인도·한국 등 식민지의 수치는 특히 불확실하다.

전쟁은 수천만 명의 난민과 실향민을 남겼다. 1944~1950년 1,200만 명이 넘는 독일계 주민이 동유럽에서 피난하거나 추방되었다. 옛 일본 제국에서 수백만 명의 일본 군인과 이주민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많은 한국인이 일본에서 귀국했지만 일본에 남거나 사할린에 억류된 이들도 있었다. 독일과 일본은 점령되었고, 뉘른베르크와 도쿄 전범 재판은 주요 인물들을 평화에 대한 죄,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로 재판했다.

전쟁은 세계 질서를 바꾸었다. 미국과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떠올랐고, 두 나라의 대립은 곧 냉전이 되어 독일과 한반도를 갈라놓았다. 1945년 국제 연합이 창설되었고, 1948년 세계 인권 선언과 제노사이드 협약이 채택되었다. 약해지고 권위를 잃은 유럽 식민 제국들은 해체되기 시작했고, 이후 수십 년 사이에 인도·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 등 많은 나라가 독립했다.

[3][1]

심화

나라마다 다른 전쟁의 기억

전쟁의 기억은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독일에서는 초기의 침묵과 저항을 거쳐, '과거 극복(Vergangenheitsbewältigung)'이라 불리는 긴 과정 속에 나치 범죄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정이 공공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베를린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가 그 상징이다. 러시아에서는 대조국 전쟁의 승리가 국가 정체성의 핵심 기둥이며 5월 9일에 기념된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과 소련의 범죄는 민감한 주제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흔히 악에 맞선 '좋은 전쟁'으로 기억되지만, 역사가들은 도시 폭격과 원폭 투하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일본의 기억은 갈라져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강한 평화주의 전통의 중심이고, 많은 일본인이 자신들을 주로 전쟁의 피해자로 기억한다. 한편 역사 교과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전범도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난징 대학살, 강제 노동,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이 오래 이어졌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담화 같은 공식 사과와, 일본의 책임을 축소하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함께 존재한다.

중국에서는 항일 전쟁이 국가 기억의 중심이며, 국민당과 공산당의 역할을 얼마나 강조하느냐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한국에서 이 전쟁은 무엇보다 식민지 경험으로 기억된다.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독립운동이며, 8월 15일 광복절에 기념된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특히 일본 기업에 배상을 명령한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은, 청구권 문제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조약(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일본의 입장과 충돌하며 거듭 양국 관계를 긴장시켰다. 1992년부터 서울에서 이어진 수요 집회와 '평화의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를 공론장에 붙들어 두고 있다. 동남아시아·인도·아프리카의 기억은 식민지 병사, 기근, 그리고 독립으로 가는 길에 초점을 맞춘다.

[1][8][10]

심화

1차 사료와 역사 서술

전쟁의 사료는 방대하다. 정부와 군의 기록 보존소, 뉘른베르크 재판에 쓰인 노획 독일 문서, 일기, 편지, 사진, 영상, 생존자 증언이 있다. 사라진 것도 많다. 일본 당국은 1945년 8월 많은 문서를 불태웠는데, 이 때문에 '위안부'와 강제동원 같은 주제의 연구가 어려워졌고 생존자 증언과 흩어져 남은 문서가 특히 중요해졌다. 1991년 이후 소련 문서고가 열리면서 동부 전선과 소련의 탄압에 대한 연구가 크게 바뀌었다.

역사가들은 전쟁의 기원을 두고 논쟁해 왔다. 1961년 A. J. P. 테일러는 히틀러가 계획가라기보다 기회주의자였다는 논쟁적 주장을 폈고, 다수는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강조하며 이에 맞섰다. 홀로코스트 연구는 절멸의 관료 기구를 분석한 라울 힐버그의 연구에서 출발해, 학살이 오래된 계획을 따랐는지 아니면 단계적으로 급진화했는지를 두고 벌어진 '의도주의'와 '기능주의' 논쟁을 거쳐, 지역 가해자·희생자의 경험·유럽 전역의 협력에 대한 세밀한 연구로 나아갔다.

게르하르트 바인버그의 『전쟁 속의 세계(A World at Arms)』(1994) 같은 세계사적 서술은 모든 전장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나 미터 등의 연구는 서구 서술에서 오랫동안 소홀히 다뤄진 중국의 핵심적 역할을 되살렸다. 학자들은 원폭 투하 결정, 무기 대여법과 소련이 승리에 기여한 몫, 그리고 한국인·인도인·아프리카인·동남아시아인을 비롯한 식민지와 비유럽의 경험을, 한때 강대국 시각으로만 쓰였던 역사에 어떻게 통합할지를 두고도 논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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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 (36)

  1. 소비에트 연방의 폴란드 침공1939년
  2. 라플라타강 전투1939년
  3. 베스테르플라테 전투1939년
  4. 영국 본토 항공전1940년
  5. 카틴 숲 대학살1940년
  6. 베저위붕 작전1940년
  7. 덩케르크 전투1940년
  8. 타란토 전투1940년
  9. 바비 야르 학살1941년
  10. 크레타 전투1941년
  11. 영국-소련의 이란 침공1941년
  12. 그리스 공방전1941년
  13. 미드웨이 해전1942년
  14. 횃불 작전1942년
  15. 과달카날 전역1942–1943년
  16. 싱가포르 전투1942년
  17. 디에프 기습1942년
  18. 쿠르스크 전투1943년
  19.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1943년
  20.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1943년
  21. 바르샤바 봉기1944년
  22. 오버로드 작전1944년
  23.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1944년
  24. 몬테카시노 전투1944년
  25. 레이테만 전투1944년
  26. 아헨 전투1944년
  27. 필리핀해 해전1944년
  28. 부다페스트 포위전1944–1945년
  29. 펠렐리우 전투1944년
  30. 싱글 작전1944년
  31. 팻 맨1945년
  32. 오키나와 전투1945년
  33. 일본의 항복1945년
  34. 만주 전략공세작전1945년
  35. 텐고 작전1945년
  36. 일본의 항복문서1945년

핵심 개념

정복 전쟁
나치 독일은 동유럽의 '생존 공간'을, 일본 제국은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제국을 노렸고, 둘 다 점령·약탈·인종 위계를 통해 전쟁을 수행했다.
섬멸전
동부 전선과 중국에서 전쟁은 적군을 이기는 데 그치지 않고 주민을 파괴하거나 굴복시키려 했으며,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제노사이드
유대인 약 600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와 로마 등 다른 집단의 학살은 전후 제노사이드 협약(1948)으로 이어졌다.
식민지 동원
양 진영의 제국 모두 식민지에서 병사·노동자·식량을 끌어냈고 성적 착취도 저질렀다. 일본 지배 아래의 한국이 뚜렷한 예다.
표적이 된 민간인
전략 폭격, 포위, 기근, 학살, 강제 이주로 민간인이 사망자의 다수를 차지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
승리는 국제 연합, 전범 재판, 국제 인권법을 낳았지만 냉전,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 탈식민도 불러왔다.
엇갈리는 기억
나라마다 전쟁을 매우 다르게 기억하며, 사과·배상·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은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기록

  1. 1931년 — 일본의 만주 점령(만주 사변), 이듬해 만주국 수립.
  2. 1937년 — 7월 중일 전면전 시작, 12월 난징 함락과 난징 대학살.
  3. 1938년 —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뮌헨 협정, 일본과 한국에 국가 총동원법 시행.
  4. 1939년 — 8월 23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 9월 3일 영국·프랑스 선전 포고.
  5. 1940년 — 독일의 서유럽 정복과 프랑스 함락, 영국 본토 항공전, 중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6. 1941년 —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 유대인 대량 총살 시작,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동남아시아 공격.
  7. 1942년 — 반제 회의에서 '최종 해결' 조율, 미드웨이 해전, 스탈린그라드와 엘알라메인 전투.
  8. 1943년 —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항복(2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연합군의 이탈리아 상륙, 벵골 기근.
  9. 1944년 — 한국인에게 징병제 시행, 노르망디 상륙(6월 6일), 바그라티온 작전.
  10. 1945년 — 아우슈비츠 해방(1월 27일), 독일 항복(5월 8일), 원폭 투하(8월 6일·9일), 일본 항복 발표와 한국 광복(8월 15일), 항복 문서 조인(9월 2일).
  11. 1946년 — 뉘른베르크 재판 판결, 도쿄 전범 재판 개정.

용어 풀이

추축국
독일·이탈리아·일본(1940년 삼국 동맹으로 공식화)과 그 협력국들의 동맹.
유화 정책
전쟁을 피하려고 히틀러에게 양보를 거듭한 1930년대 영국·프랑스의 정책.
홀로코스트 / 쇼아
나치의 유럽 유대인 학살. '쇼아'는 히브리어로 '재앙'이라는 뜻이다.
아인자츠그루펜
점령된 소련 땅에서 유대인 등 100만 명 이상을 총살한 독일의 이동 학살 부대.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의 성노예로 강제로 끌려간 여성과 소녀를 가리키는 말. 작은따옴표는 이 말이 학대의 실상을 가리는 완곡어임을 나타낸다.
강제동원
식민지 주민을 노동과 군 복무에 강압적으로 끌어간 일. 한국에서는 전시 노무 동원, 군인, 군속 동원을 아우른다.
무기 대여법(렌드리스)
1941년부터 미국이 영국·소련·중국 등 연합국에 전쟁 물자를 보낸 제도.
무조건 항복
협상 조건 없이 항복하라는 연합국의 요구. 1943년에 발표되었다.
광복
'빛을 되찾음'이라는 뜻. 1945년 8월 15일 일본 지배에서 벗어난 한국의 해방을 가리킨다.

묻고 답하기

제2차 세계 대전은 정확히 언제 시작됐어요?

유럽에서는 보통 1939년 9월 1일로 봐요. 중국에서는 1937년 7월에 일본과의 전면전이 시작됐고, 1931년 일본의 만주 점령부터 세기도 해요. 누구의 전쟁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시작한 날이 달라져요.

왜 그렇게 많은 민간인이 죽었어요?

추축국이 정복과 절멸을 목표로 전쟁을 벌였고, 도시에 폭탄이 떨어졌고, 봉쇄·점령·강제 수탈 때문에 굶주림과 병이 퍼졌기 때문이에요. 홀로코스트는 처음부터 유대인 민간인을 죽이려고 한 것이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일본 편이었어요?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여서 법적으로 일본 '신민'으로 취급됐고, 많은 사람이 강제로 노동이나 군 복무에 끌려갔어요. 스스로 협력한 사람도 일부 있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한국광복군처럼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도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이 시기를 주로 식민지 억압의 시대로 기억해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란 무엇인가?

강제로 또는 속아서 일본군의 성노예가 된 여성과 소녀들에 관한 문제다. 1993년 고노 담화에서 일본은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강제성, 법적 책임, 배상, 교육 방식을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왜 원자 폭탄을 썼나?

미국 지도자들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 많은 희생이 따를 일본 본토 상륙을 피하려 했다고 말했다. 역사가들은 특히 소련의 참전 이후 일본이 어차피 항복했을지, 전후 소련과의 경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두고 논쟁한다.

홀로코스트가 서술된 대로 일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아나?

서로 독립적인 압도적 증거가 있다. 나치 문서, 가해자의 자백과 재판 증언, 생존자와 해방군 병사의 증언, 사진, 인구 통계 자료, 그리고 수용소 유적이다.

사상자 수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모두 추정치이고 흔히 넓은 범위로 제시된다. 기록이 파괴되었거나 애초에 없었고, 국경이 바뀌었으며, 기근과 질병으로 인한 죽음은 원인을 가리기 어렵다. 중국·소련·식민지의 수치가 가장 불확실하다.

한국과 일본은 왜 아직도 전쟁 문제로 다투나?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같은 식민지 시기 피해를 일본이 충분히 인정하고 배상했는지, 1965년 조약으로 개인 청구권까지 해결되었는지를 두고 견해가 갈리기 때문이다. 법, 외교, 기억, 국가 정체성이 얽힌 문제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World War II. Wikipedia
  2. 제2차 세계 대전. 한국어 위키백과
  3. World War II casualties. Wikipedia
  4. The Holocaust. Wikipedia
  5. Introduction to the Holocaust.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olocaust Encyclopedia
  6. Nanjing Massacre. Wikipedia
  7. Korea under Japanese rule. Wikipedia
  8. 위안부. 한국어 위키백과
  9. Gerhard L. Weinberg, A World at Arms: A Global History of World War II.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0. Rana Mitter, Forgotten Ally: China's World War II, 1937–1945.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3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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