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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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유럽의 큰 나라들이 두 편으로 갈라졌어요. 한쪽은 프랑스·영국·러시아였고, 나중에 이탈리아·미국 등 많은 나라가 함께했어요. 다른 쪽은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지금의 튀르키예와 중동 여러 지역을 다스리던 나라)과 불가리아였어요.
전쟁은 1914년 여름, 사라예보라는 도시에서 한 젊은이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를 총으로 쏜 일에서 시작됐어요. 큰 나라들은 서로 '너희 편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두었기 때문에, 한 나라의 다툼이 도미노처럼 모든 나라를 끌어들였어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쟁은 4년 넘게 이어졌어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병사들이 '참호'라는 긴 도랑을 파고 그 안에서 진흙과 쥐, 이와 함께 살았어요. 기관총과 대포, 독가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너무 어려워서, 엄청난 전투를 치르고도 몇 킬로미터밖에 못 가는 일이 많았어요.
이 전쟁을 '세계' 대전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유럽에서만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인도·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 등에서 온 병사들이 싸웠고, 아프리카와 중동, 바다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어요. 식민지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전쟁에 들어갈지 스스로 정할 수 없었어요.
모두 1,500만~2,200만 명쯤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많은 사람이 군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어요.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났을 때 오래된 제국들이 무너졌고 유럽과 중동의 지도가 새로 그려졌어요. 지금도 사람들은 해마다 11월이면 빨간 양귀비꽃을 달거나 묵념을 하며 희생자를 기억해요.
한눈에 보기
- 기간
- 1914년 7월 28일(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선전 포고) ~ 1918년 11월 11일(서부 전선 휴전). 강화 조약은 1919~1923년에 체결
- 주요 전장
- 서부 전선(벨기에·프랑스), 동부 전선, 이탈리아 전선, 발칸, 오스만 전선(갈리폴리·캅카스·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 아프리카, 동아시아·태평양, 바다
- 연합국(협상국)
- 프랑스, 대영 제국, 러시아(1917년까지), 세르비아, 벨기에, 일본, 이탈리아(1915년부터), 루마니아, 미국(1917년부터), 중국, 그리스 등
- 동맹국
-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1915년부터)
- 사망자(추정)
- 전체 약 1,500만~2,200만 명: 군인 약 900만~1,100만 명, 민간인 약 600만~1,300만 명. 자료마다 차이가 크다
- 결과
- 연합국 승리.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오스만 제국 붕괴. 베르사유 조약 등 파리 강화 조약, 국제 연맹 창설
- 다른 이름
- 대전쟁(The Great War), 프랑스어 '라 그랑드 게르', 독일어 '데어 에어스테 벨트크리크'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재생을 누르면 지도에서 전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표시는 전투·사건, 화살표는 기록에 남은 진군로입니다.
단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학생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저격했다. 독일의 지지를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28일 선전포고했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동원령을 내리자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독일군이 중립국 벨기에로 진군하자 영국도 8월 4일 참전했다.
July Crisis (English Wikipedia)Assassination of Archduke Franz Ferdinand (English Wikipedia)World War I (English Wikipedia)
최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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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제1차 세계 대전은 어떤 전쟁이었나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두 동맹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협상국이라고도 하는 연합국은 프랑스·대영 제국·러시아 제국이 이끌었고, 뒤에 이탈리아·일본·미국 등 여러 나라가 가세했다. 동맹국은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불가리아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전쟁을 그냥 '대전쟁(the Great War)'이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이름은 1939년 또 한 번의 세계 대전이 터진 뒤에야 널리 쓰였다. '세계'라는 말이 붙은 것은 싸움과 그 영향이 유럽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와 태평양의 식민지 주인이 바뀌었고, 중동 전역에서 군대가 싸웠으며, 인도·아프리카·중국·베트남·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카리브해에서 병사와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이 전쟁은 산업 사회의 힘을 모두 쏟아부은 최초의 대전쟁이었다. 공장은 포탄·기관총·철조망·독가스·전차·잠수함·비행기를 엄청나게 찍어 냈고, 철도는 수백만 명을 전선으로 실어 날랐다. 경제 전체가 전쟁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여성들이 공장과 사무실의 많은 일을 맡았다. 군대뿐 아니라 온 국민의 힘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역사가들은 이를 '총력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쉬움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남슬라브인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배에서 해방하려는 단체에 속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청년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책임을 물었고, 독일의 지지 약속(흔히 '백지 수표'라고 부른다)을 받은 뒤 세르비아에 가혹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7월 28일 선전 포고를 했다.
일주일쯤 사이에 지역 위기는 유럽 전쟁으로 커졌다. 세르비아와 슬라브 민족의 보호자를 자처한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하자,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8월 3일 러시아의 동맹국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독일의 전쟁 계획은 전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의 이름과 연결되는데, 중립국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단숨에 쓰러뜨리려는 것이었다. 독일군이 벨기에에 들어가자 영국이 8월 4일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러한 결정의 연쇄 뒤에는 더 깊은 원인들이 있었고, 역사가들은 그 무게를 저마다 다르게 본다. 서로 맞선 동맹 체제(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영국과 독일의 해군 군비 경쟁, 식민지 쟁탈, 특히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며 영토 분쟁이 남은 발칸반도의 공격적 민족주의, 빠른 동원에 기댄 군사 계획, 그리고 전쟁이 나더라도 짧게 끝나고 오히려 국내 문제를 풀어 줄지 모른다고 믿은 여러 나라 지도자들의 판단이 그것이다.
쉬움
누가 싸웠고, 왜 다른 나라들도 뛰어들었나
나라마다 참전 이유가 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제국을 위협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꺾으려 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에 포위될까 두려워 유일하게 믿을 만한 강대국 동맹을 지지했다. 러시아는 앞서 발칸에서 굴욕을 당한 터라 세르비아를 다시 버릴 수 없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으로 묶여 있었다. 영국은 벨기에 중립 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독일이 대륙을 지배하는 것도 경계했다.
다른 나라들도 뒤따랐다. 오스만 제국은 1914년 말 독일 편으로 참전했다. 1902년부터 영국과 동맹이던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의 칭다오와 태평양의 독일령 섬들을 점령했다. 이탈리아는 형식상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이었지만, 영토를 약속받고 1915년 연합국 편에 섰다. 불가리아는 1915년 동맹국에, 루마니아는 1916년 연합국에 가담했다. 미국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독일이 멕시코에 동맹을 제안한 치머만 전보에 반발해 1917년 4월 참전했다. 중국은 1917년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약 14만 명의 노동자를 프랑스에 보냈다.
식민 제국들은 식민지 백성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영국령 인도에서는 100만 명을 훨씬 넘는 사람이 복무했고, 서부 전선·메소포타미아·동아프리카에서 싸웠다. 프랑스는 서아프리카·북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인도차이나에서 병사를 모았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양쪽 모두 '운반인'이라 불린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인 짐꾼에 의존했는데, 이들 가운데 엄청나게 많은 수가 질병·굶주림·과로로 죽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유럽의 전쟁 기억에서 빠져 있었다.
중급
서부 전선: 기동전에서 참호전으로
1914년 8월 독일군은 벨기에를 휩쓸고 북프랑스로 쳐들어갔다. 벨기에 민간인이 집단 처형되고 뢰번(루뱅) 같은 도시가 불탔으며, 이 사건은 연합국 선전의 중심이 되었다. 9월 초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파리 가까이에서 벌어진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멈춰 세웠다. 이후 양쪽은 서로 북쪽으로 우회하려는 이른바 '바다로의 경주'를 벌였고, 1914년 말에는 벨기에 해안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참호선이 끊김 없이 이어졌다.
그 뒤 3년 반 동안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방어하는 쪽이 유리했다. 기관총·속사포·철조망은 공격 보병을, 틈을 벌릴 증원군이 오기도 전에 쓰러뜨렸다. 지휘관들은 점점 더 큰 포격과 새 무기를 시도했다. 독일은 1915년 4월 이프르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염소 가스 공격을 했다. 1916년 베르됭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 요새 도시를 열 달 동안 공격했는데, 양국의 사상자와 실종자는 합쳐서 약 70만 명으로 추정된다. 영국이 주도한 솜 공세 첫날인 1916년 7월 1일, 영국군은 전사자 약 1만 9,000명을 포함해 약 5만 7,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영국 육군 역사상 최악의 하루였다.
1917년 프랑스의 니벨 공세가 실패한 뒤 프랑스군 곳곳에서 공격 명령을 거부하는 일, 흔히 '반란'이라 불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영국군은 진흙탕 속에서 제3차 이프르 전투(파스샹달 전투)를 오래 치렀다. 1916년 솜에서 영국이 처음 투입한 전차는 1917년 캉브레에서 대량으로 쓰였다. 양쪽은 차츰 더 유연한 전술을 발전시켰다. 소규모 돌격대의 침투, 보병 바로 앞을 따라 움직이는 이동 탄막, 보병·포병·전차·항공기의 긴밀한 협동이 그것이다.
중급
다른 전선들: 동부, 남부, 그리고 유럽 밖
동부 전선은 거리가 훨씬 멀었고 전선도 더 많이 움직였다. 러시아는 1914년 동프로이센에 쳐들어갔다가 탄넨베르크에서 크게 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갈리치아에서 러시아에, 또 세르비아에 맞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1915년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고를리체-타르누프에서 돌파해 러시아를 폴란드에서 몰아냈다. 1916년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거의 무너뜨릴 뻔했다. 세르비아는 1915년 말 점령되었고, 세르비아군과 많은 민간인이 한겨울 알바니아 산맥을 넘어 퇴각하다 끔찍한 희생을 치렀다.
이탈리아는 알프스 산지와 이손초강을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열두 차례쯤 전투를 벌였고, 1917년 카포레토에서 참패한 뒤 1918년 비토리오베네토에서 이겼다.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연합국은 1915년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해협을 장악하려고 갈리폴리에 상륙했으나 여덟 달 만에 철수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는 1915년 4월 25일의 상륙이 국가 기억의 출발점(안작 데이)이 되었고, 튀르키예에서는 이 방어 성공이 무스타파 케말(뒤의 아타튀르크)의 부상과 이어진다. 영국·인도군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싸웠는데, 1916년 쿠트에서는 한 부대 전체가 항복했고, 뒤에 바그다드(1917)와 예루살렘(1917년 12월)을 점령했다. 1916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헤자즈에서 시작된 아랍 반란은 아라비아와 시리아에서 오스만군과 싸웠다.
바다에서는 영국의 해상 봉쇄가 독일의 식량·원자재 수입을 서서히 조였다. 유일한 대함대 결전인 유틀란트 해전(1916)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독일은 상선을 겨냥한 잠수함 작전으로 맞섰고, 1915년 여객선 루시타니아호 격침과 1917년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는 미국의 참전을 부추겼다. 아프리카에서는 연합국이 독일령 토고·카메룬·서남아프리카를 점령했지만,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는 파울 폰 레토포르베크가 이끄는 게릴라전이 휴전 뒤까지 이어졌다.
중급
후방, 민간인, 그리고 학살
전쟁은 후방의 삶도 바꾸었다. 정부는 산업·식량·노동력을 통제하고 배급제와 검열을 도입했으며, 많은 나라가 징병제를 새로 시행하거나 확대했다. 여성들은 군수 공장·운송·사무직에 대거 진출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봉쇄와 흉작으로 심각한 식량난이 닥쳤고, 특히 1916~1917년 겨울은 '순무의 겨울'로 불린다. 봉쇄 때문에 죽은 민간인 수를 두고는 역사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며, 수십만 명이라는 당시 독일 측 추정은 지금은 신중하게 다루어진다.
민간인을 겨냥한 가장 큰 범죄는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대학살)였다. 1915년부터 통일진보위원회가 이끄는 오스만 정부는 아나톨리아의 아르메니아인을 시리아 사막 쪽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그 과정에서 집단 학살·죽음의 행진·굶주림이 이어졌다. 아르메니아인 사망자는 대체로 약 60만 명에서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더 높은 수치도 있다. 아시리아인과 그리스계 기독교 공동체도 대규모 폭력을 당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오랫동안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를 거부해 왔고, 대부분의 제노사이드 연구자와 여러 나라 정부는 이 용어를 쓴다. 이 문제는 지금도 정치적으로 민감하다.
전쟁은 전염병과 기근도 퍼뜨렸다. 흔히 '스페인 독감'이라 부르는 치명적인 인플루엔자가 1918~1920년 군대 이동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어 수천만 명이 죽었다. 전쟁 자체보다 많은 수였지만, 보통 전쟁 사망자와 따로 센다. 레바논산 지역을 비롯한 오스만 중동 일부와 동아프리카에도 기근이 닥쳤다.
중급
1917~1918년: 혁명, 미국의 참전, 전쟁의 끝
1917년 판도가 바뀌었다. 러시아에서는 전쟁 피로·굶주림·패전이 겹쳐 2월 혁명이 일어나 군주정이 무너졌고, 이어 10월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다. 새 정부는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동맹국과 단독 강화를 맺고 광대한 영토를 내주었다. 거의 같은 무렵 미국이 참전해 연합국에 새 병력과 자금, 물자를 보탰다.
독일은 동부에서 빼 온 병력으로 1918년 대규모 춘계 공세를 펼쳤다. 1914년 이래 어느 공격보다 많은 땅을 얻었지만 연합국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오히려 독일군이 기진맥진해졌다. 1918년 8월부터 미군이 늘어난 연합국은 '백일 공세'로 꾸준히 전진했다. 9~11월 불가리아·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가 차례로 휴전을 청했다. 독일에서는 수병 반란과 혁명이 일어나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했다. 휴전은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발효되었다.
전체 사망자는 대개 1,500만~2,200만 명으로 추정되며, 그중 군인이 약 900만~1,100만 명이다. 독일·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각각 100만 명을 훨씬 넘는 군인을 잃었고, 민간인까지 포함한 오스만 제국의 손실은 인구 비율로 가장 컸던 축에 든다. 이 밖에 약 2,000만 명이 다쳤고 많은 이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다. 이 수치들은 어림값이다. 여러 나라에서 기록 체계가 무너졌고, 식민지 운반인과 노동자의 죽음은 아예 세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중급
강화 조약과 그 결과
승전국들은 1919년 파리에 모였다. 1919년 6월 28일 서명된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식민지와 영토 일부를 빼앗고, 군대를 제한하고, 배상금을 물렸으며, 전쟁으로 생긴 손실과 피해의 책임을 독일이 받아들이게 한 제231조(이른바 '전쟁 책임 조항')를 담았다. 오스트리아(생제르맹), 불가리아(뇌이), 헝가리(트리아농), 오스만 제국(세브르. 튀르키예 독립 전쟁 뒤 1923년 로잔 조약으로 대체)과는 따로 조약을 맺었다. 전쟁 재발을 막으려고 국제 연맹이 세워졌다.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오스만의 네 제국이 사라졌다. 중부·동유럽에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발트 3국 등 새로 생기거나 되살아난 나라들이 나타났다. 중동에서는 옛 오스만 영토인 이라크·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 등이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 이는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과 밸푸어 선언(1917) 같은 전시 약속을 따른 것으로, 아랍인과 시온주의 운동에 서로 모순되는 약속을 남겼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내세운 '민족 자결'은 식민지 민족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강화 회의는 이를 대체로 유럽에만 적용했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국에서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 대규모 평화 시위로 독립을 선언했으나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중국에서는 독일의 산둥 이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결정에 반발해 5·4 운동이 일어났다. 이집트와 인도에서도 1919년 대규모 저항이 있었다. 많은 역사가는 강화 조약이 남긴 원한, 전후의 경제 혼란, 정치의 폭력화가 파시즘과 제2차 세계 대전, 뒷날 중동 분쟁의 토양이 되었다고 본다. 다만 조약이 다음 전쟁을 얼마나 직접 '일으켰는지'는 논쟁거리다.
심화
나라마다 다른 전쟁의 기억
전쟁의 기억은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영국·프랑스·벨기에에서는 거대한 비극으로 기억되며, 11월 11일 현충일(휴전 기념일), 거의 모든 마을의 전쟁 기념비, 빨간 양귀비꽃, 런던과 파리의 무명용사 묘가 그 상징이다. 프랑스에서는 베르됭이, 영국에서는 솜과 파스샹달이 상징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윌프레드 오언·시그프리드 서순 같은 전쟁 시인들과 뒷날의 대중문화가 굳힌 이미지, 즉 용감한 병사들이 무능한 장군들 때문에 헛되이 죽었다는('당나귀가 이끈 사자들') 인식이 강하다. 1990년대 이후 많은 군사사가는 영국군이 배우고 적응했으며 1918년의 승리가 실질적이었다고 주장하며 이 이미지에 이의를 제기했다.
독일에서는 기억이 분열되었고 정치적으로 폭발력이 컸다. 패전, 베르사유 조약, 그리고 군대가 국내 혁명 세력에게 '등 뒤에서 찔렸다'는 신화는 민족주의 우파와 나치에게 이용되었다. 1945년 이후 제1차 대전은 제2차 대전의 그늘에 가려졌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갈리폴리는 국가 탄생의 이야기가 되었고, 캐나다에서는 비미 능선 전투(1917)가 그렇다. 튀르키예에서 갈리폴리 승리는 공화국 건국 이야기의 일부다. 러시아에서는 오랫동안 혁명과 내전에 가려져 있다가 소련 해체 뒤에야 제대로 기념되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는 제국의 경험을 통해 전쟁을 기억한다. 인도에서는 100만 명 넘는 병사의 복무가 점점 더 기념되고 있지만, 1919년 암리차르 학살을 비롯한 전후의 실망과도 이어져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투보다 그 결과가 기억된다. 일본의 중국·태평양 이권 확대, 1915년 21개조 요구, 중국의 5·4 운동, 그리고 한국의 3·1 운동이다. 운반인을 포함한 아프리카의 기억은 수십 년 동안 외면되다가 최근에야 본격적인 연구와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심화
1차 사료
제1차 세계 대전은 막대한 기록을 남겼다. 정부들은 외교 문서, 군 명령서, 부대 전투 일지, 사상자·생산 통계를 보관했다. 1918년 이후 여러 정부는 전쟁 책임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어 전전(戰前) 외교 문서를 골라 출간했다. 문서가 선별되고 때로는 편집되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런 문서집을 비판적으로 읽는 법을 익혀 왔다.
평범한 병사와 민간인이 남긴 편지·일기·사진 수백만 점이 전해지며, 상당수가 각국 기록 보존소와 도서관에서 디지털화되었다. 참호 신문과 회고록,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28) 같은 병사들의 글은 대중의 기억을 빚었지만, 여러 해 뒤에 쓴 회고록에는 사후 판단이 스며 있다. 주요 군대의 참모본부가 쓴 공식 전사(戰史)는 작전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지만 지휘관의 명예를 변호하는 경우가 많다.
비유럽·식민지 쪽 사료는 더 흩어져 있다. 모병과 노무 부대 기록, 영국 기록 보존소에 남은 인도 병사들의 검열된 편지, 선교사 보고서, 오스만 문서(특히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와 관련해 열람과 해석을 두고 다툼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구전 등이다. 사상자 수는 어떤 자료를 쓰느냐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믿을 만한 참고 문헌은 정확한 수 대신 범위를 제시한다.
심화
역사 서술: 누구의 책임이며, 전쟁은 무엇을 뜻했나
전쟁 책임 문제가 연구사를 지배해 왔다. 두 대전 사이에는 많은 역사가가 베르사유의 판정을 거부하고 모든 강대국이 전쟁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고 보았다. 1961년 독일 역사가 프리츠 피셔는 『세계 강국을 향한 도전(Griff nach der Weltmacht)』에서 독일 지도부가 폭넓은 팽창 목표를 품었고 개전에 주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피셔 논쟁'은 독일 역사학을 바꾸어 놓았고, 외교 정책의 국내적 뿌리를 파고드는 연구를 낳았다.
이후 연구는 시야를 넓혔다. 어떤 역사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對)세르비아 개전 결정을, 다른 이들은 러시아의 동원, 프랑스의 러시아 지원, 영국의 모호한 태도를 강조한다.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2012)은 7월 위기를, 여러 수도의 결정권자들이 각자의 두려움에 갇혀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재앙을 보지 못한 공동의 과정으로 그렸다. 비판자들은 이런 접근이 책임을 지나치게 고르게 나누고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선택을 가볍게 본다고 지적한다. 이 논쟁은 단지 누구 탓이냐가 아니라, 불확실성 속의 결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1970년대부터 문화사가들은 사람들이 전쟁을 어떻게 겪고 기억했는지를 물었다. 폴 퍼셀의 『대전쟁과 현대의 기억』(1975)은 이 전쟁이 현대적 아이러니와 문학 의식을 빚었다고 주장했고, 제이 윈터 등은 애도와 추모를 연구했다. 휴 스트래천의 연구와 여러 최근 연구에서 보이는 '지구사'·'초국가사'적 전환은, 전쟁이 발칸에서 시작해 아프리카·아시아·중동으로 번졌고, 동유럽과 아나톨리아에서는 1918년에 사실상 끝나지 않았으며, 제국과 깊이 얽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1914년부터 1945년까지를 하나의 '30년 전쟁'으로 볼 수 있는지도 논쟁거리다.
주요 전투 (40)
- 1차 마른 전투1914년
- 타넨베르크 전투1914년
- 캅카스 전역1914–1918년
- 7월 위기1914년
- 리에주 전투1914년
- 포클랜드 해전1914년
- 사리카미스 전투1914–1915년
- 갈리치아 전투1914년
- 제1차 마수리아 호수 전투1914년
- 코로넬 해전1914년
- 국경 전투1914–1919년
- 제2차 프셰미실 공성전1914–1915년
- 칭다오 전투1914년
- 스탈루푀넨 전투1914년
- 체르 전투1914년
- 페르시아 전역1914–1918년
- 안트베르펜 공성전1914년
- 바다로의 경주1914년
- 갈리폴리 전투1915–1916년
- 제2차 이프르 전투1915년
-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1915년
- 베르됭 전투1916년
- 솜 전투1916년
- 유틀란트 해전1916년
- 카포레토 전투1917년
- 파스샹달 전투1917년
- 캉브레 전투1917년
- 비미 능선 전투1917년
- 힌덴부르크선1917년
- 아라스 전투1917년
- 메시네스 전투(1917)1917년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1918년
- 독일 춘계 공세1918년
- 100일 공세1918년
- 2차 마른 전투1918년
- 사르다라파트 전투1918년
- 뫼즈-아르곤 공세1918년
-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1918년
- 아미앵 전투1918년
- 파리 강화 회의1919–1920년
핵심 개념
- 동맹 체제
- 1914년 이전 유럽 강대국들은 서로 맞선 동맹으로 묶여 있어서, 발칸의 국지적 분쟁이 순식간에 러시아·독일·프랑스·영국을 끌어들였다.
- 7월 위기
-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암살부터 8월 초 전면전까지의 약 5주. 이 기간의 외교·군사 결정이 지역 위기를 세계 대전으로 바꾸었다.
- 참호전
- 서부 전선에서는 방어 화력 때문에 군대가 땅을 파고 들어가야 했고, '무인 지대'를 건너는 공격은 엄청난 희생을 낳아 오랜 교착과 대규모 사상자로 이어졌다.
- 총력전
- 산업·노동·재정·선전·식민지까지 사회 전체를 전쟁에 동원한 것. 군인과 민간인의 경계가 흐려졌다.
- 제국의 붕괴
- 패전과 혁명으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유럽과 중동의 지도가 새로 그려졌다.
- 민족 자결
- 우드로 윌슨과 레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내세운, 민족이 스스로 정부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 1919년 한국인을 비롯한 식민지 민족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불균등하게 적용되었다.
- 기억과 신화
- 나라마다 헛된 살육, 국가의 탄생, 배신, 잊힌 제국 복무 등 저마다의 전쟁 이야기를 만들었고, 이 이야기들이 이후의 정치를 빚었다.
기록
- 1914년 —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선전 포고, 8월 초 유럽 전면전.
- 1914년 — 9월 제1차 마른 전투로 독일군 진격 저지, 연말까지 참호선 형성. 일본의 칭다오 점령.
- 1915년 — 갈리폴리 전역 시작(4월 25일 상륙), 이프르에서 첫 대규모 독가스 공격, 이탈리아 연합국 가담,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와 학살 시작.
- 1916년 —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 유틀란트 해전, 브루실로프 공세, 아랍 반란 시작.
- 1917년 — 러시아 2월·10월 혁명, 미국 참전(4월), 파스샹달 전투, 밸푸어 선언.
- 1918년 —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독일 춘계 공세, 8~11월 연합국 백일 공세, 11월 11일 휴전.
- 1919년 — 파리 강화 회의, 베르사유 조약(6월 28일), 한국의 3·1 운동과 중국의 5·4 운동.
- 1923년 — 튀르키예와 맺은 로잔 조약이 세브르 조약을 대체하며 전후 처리가 마무리됨.
용어 풀이
- 협상국(Entente)
- 프랑스어로 '화친·양해'라는 뜻. 프랑스·영국·러시아의 연합으로, 연합국의 중심이었다.
- 동맹국(Central Powers)
-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불가리아. 유럽 중앙에 자리해 붙은 이름이다.
- 동원
- 예비군을 소집하고 군대를 전시 체제로 바꾸는 일. 1914년에는 동원 자체가 전쟁으로 가는 한 걸음으로 여겨졌다.
- 무인 지대
- 맞선 참호선 사이의 땅. 포화가 쏟아져 건너기가 매우 위험했다.
- 휴전
- 싸움을 멈추기로 한 합의. 아직 강화 조약은 아니다.
- 배상금
- 전쟁 피해를 보상하라며 패전국에 물린 돈.
- 위임 통치령
- 패전 제국에서 떼어 내 국제 연맹의 감독 아래 승전국이 다스린 영토.
- 제노사이드
- 민족·인종·종교 집단을 파괴하려는 의도로 저지른 행위. 1944년에 만들어진 말로, 아르메니아인 학살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묻고 답하기
싸움은 주로 유럽에서 했는데 왜 '세계' 대전이에요?
지구 곳곳을 다스리던 제국들이 참전했고, 아프리카·중동·동아시아와 바다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으며, 사람이 사는 모든 대륙에서 병사와 노동자가 왔기 때문이에요.
정말 총알 한 발이 전쟁 전체를 일으켰나요?
사라예보 암살은 방아쇠였을 뿐이에요. 전쟁이 난 것은 그 뒤 몇 주 동안 빈·베를린·상트페테르부르크·파리·런던의 정부들이 동맹 체제와 군사 계획 속에서 잇달아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에요.
병사들은 왜 그렇게 오래 참호에 있었나요?
기관총·대포·철조망 때문에 탁 트인 땅을 건너 공격하는 것이 너무 위험했고, 방어하는 쪽은 철도로 예비 병력을 공격하는 쪽보다 빨리 데려올 수 있었어요. 이 교착을 깰 전술과 무기를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렸어요.
제1차 세계 대전은 한국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일본은 연합국 편에 서서 중국에서 세력을 넓혔어요. 전쟁이 끝난 뒤 퍼진 민족 자결 원칙과 세계 곳곳의 독립운동 소식은, 1919년 한국인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고 평화롭게 독립을 선언한 3·1 운동에 힘을 불어넣었어요.
전쟁 책임은 독일에만 있었나?
베르사유 조약은 그렇게 암시했고, 프리츠 피셔도 독일에 주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역사가들은 책임을 여러 강대국에 더 넓게 나눈다. 1914년 7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결정이 결정적이었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다른 나라의 책임을 얼마나 무겁게 볼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사상자 수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모두 추정치다. 서방 강대국의 군인 사망자는 비교적 잘 기록되었지만, 러시아·오스만 제국·식민지 운반인·민간인의 수치는 훨씬 불확실하다. 그래서 1,500만~2,200만 명처럼 범위로 제시한다.
제1차 대전이 제2차 대전을 낳았나?
강화에 대한 원한, 불안정한 신생 국가들, 경제 혼란, 정치의 급진화 등 여러 조건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1930년대의 선택, 무엇보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강조한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World War I. Wikipedia
- 제1차 세계 대전. 한국어 위키백과
- Causes of World War I. Wikipedia
- World War I casualties. Wikipedia
- Armenian genocide. Wikipedia
- March 1st Movement. Wikipedia
- Fritz Fischer, Griff nach der Weltmacht: Die Kriegszielpolitik des kaiserlichen Deutschland 1914/18. Droste, 1961
- 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Allen Lane, 2012
- Paul Fussell, The Great War and Modern Mem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75
- Hew Strachan, The First World War, Volume I: To Ar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