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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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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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25년 전,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땅에는 보어인이 다스리는 작은 나라 두 개가 있었어요. 보어인은 아주 오래전에 네덜란드·독일·프랑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인 농부들이에요. 그 옆의 식민지들은 대영제국이 다스렸지요. 보어인 나라 한 곳에서 어마어마한 금이 발견되자, 영국은 그곳을 손에 넣고 싶어 했어요.
1899년 전쟁이 터졌어요. 처음에는 말을 잘 타고 총을 잘 쏘는 보어인들이 여러 번 이기고 영국 도시들을 에워쌌어요. 그러자 영국은 아주 큰 군대를 보냈고, 1900년에는 보어인 나라들의 수도를 점령했어요.
하지만 보어인들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을 탄 작은 무리들이 계속 기차와 진지를 공격했지요. 이들을 막으려고 영국군은 농장을 불태우고 여자와 아이, 노인들을 사람이 빽빽한 수용소로 옮겼어요. 먹을 것도 깨끗한 물도 약도 모자라서 수천, 수만 명이 죽었고, 그 대부분은 어린이였어요.
이 전쟁은 백인들끼리만의 전쟁이 아니었어요. 그 땅에는 흑인 아프리카인도 살고 있었으니까요. 많은 흑인이 군대를 위해 길잡이, 마부, 경비병으로 일했고, 싸운 사람도 있었어요. 흑인 가족들도 따로 수용소에 갇혀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잊혔어요.
전쟁은 1902년에 끝났어요. 보어인 나라들은 영국 식민지가 되었고, 1910년에 다른 식민지들과 합쳐 남아프리카 연방이 되었어요. 안타깝게도 평화 조약은 흑인 남아프리카인에게 투표할 권리를 주지 않았고, 그래서 불공평한 시절이 훨씬 더 오래 이어졌어요.
한눈에 보기
- 기간
- 1899년 10월 11일 – 1902년 5월 31일
- 장소
- 남아프리카 공화국(트란스발), 오렌지 자유국, 케이프 식민지, 나탈 — 오늘날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보츠와나·레소토 접경 부근에서도 전투가 벌어짐
- 참전 세력
- 대영제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의 병력) 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 흑인 아프리카인은 양쪽 모두에서, 주로 영국 편에서 복무
- 주요 인물
- 파울 크루거, 마르티뉘스 스테인, 루이스 보타, 크리스티안 더 베트, 쿠스 들 라 레이, 얀 스뮈츠 / 앨프리드 밀너, 로버츠 경, 키치너 경 / 솔 플라키 / 에밀리 홉하우스
- 규모
- 영국 측 약 45만 명, 보어 측 전쟁 기간 전체에 걸쳐 약 8만 8천 명. 흑인·유색인 약 10만 명이 영국군을 위해 일함
- 사망자(추정)
- 영국·제국군 약 22,000명(대부분 질병), 보어인 전투원 6,000–7,000명, 수용소의 보어인 민간인 약 26,000–28,000명, 수용소의 흑인 아프리카인 최소 14,000명·아마 20,000명 이상
- 결과
- 페리니힝 조약: 보어 공화국들이 영국 식민지가 됨.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 성립
쉬움
제2차 보어 전쟁이란?
제2차 보어 전쟁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대영제국과 남아프리카의 두 독립 공화국, 곧 남아프리카 공화국(흔히 트란스발이라 부른다)과 오렌지 자유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두 나라의 백인 시민은 보어인, 오늘날 흔히 아프리카너라고 부르는 사람들로, 17세기부터 남아프리카에 살아온 네덜란드·독일·프랑스계 정착민의 후손이었다.
이 전쟁에는 이름이 여럿 있고, 이름마다 담긴 뜻이 있다.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보어 전쟁이라 불렀다. 아프리카너들은 ‘제2차 자유 전쟁(Tweede Vryheidsoorlog)’이라 불렀다. 오늘날 많은 남아프리카 역사가는 ‘남아프리카 전쟁’이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보어인과 영국인만이 아니라 흑인 아프리카인 다수, 유색인, 인도인 등 이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이 전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1815년부터 1914년 사이 영국이 치른 전쟁 가운데 가장 크고 돈이 많이 든 전쟁이었다. 초반 보어인의 승리, 뒤이은 게릴라전, 그리고 무엇보다 수만 명의 민간인이 죽어 간 강제수용소로 기억된다.
쉬움
땅과 그곳의 사람들
유럽인이 오기 훨씬 전부터 남아프리카에는 코이코이 목축민, 산 수렵채집민, 그리고 농사짓고 소를 치던 코사·줄루·소토·츠와나·페디 등 여러 반투어 사용 민족이 살았다. 1652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케이프에 정착지를 세웠다. 그 뒤 두 세기 동안 정착민은 내륙으로 퍼져 나가며 땅을 빼앗았고, 많은 코이코이인과 산인을 예속 상태로 몰아넣었다.
영국은 19세기 초 케이프를 차지했다. 1830–1840년대에 수천 명의 보어인이 영국 지배를 벗어나 ‘그레이트 트렉(Great Trek)’으로 내륙으로 이주했고, 아프리카 왕국들과 싸우거나 조약을 맺었다. 그들은 오렌지 자유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세웠고, 영국은 1850년대에 이를 인정했다. 두 공화국 모두 시민권과 토지 소유는 백인 남성에게만 주어졌고, 흑인 아프리카인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없었다.
영국은 1877년 트란스발을 병합했지만, 보어인이 봉기해 1881년 마주바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이를 오늘날 제1차 보어 전쟁이라 부른다. 트란스발은 자치를 되찾았다. 그 무렵 이 지역에서 영국의 힘은 1879년 줄루 왕국을 무너뜨린 일 등을 통해 더욱 커져 있었다.
쉬움
금, 투표권, 제국: 전쟁의 원인
1886년 트란스발의 비트바테르스란트에서 막대한 금광이 발견되었다. 요하네스버그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도시로 자라났고, 트란스발은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땅이 되었다. 영국인을 비롯한 수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와 사업가가 몰려왔다. 보어인은 이들을 위틀란더르(Uitlander, ‘외지인’)라 불렀다. 파울 크루거 대통령의 트란스발 정부는 광산업에 세금을 매기고, 위틀란더르가 곧 보어인 시민보다 많아질까 두려워 그들이 투표권을 얻기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광산 소유주들과 세실 로즈 같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광산과 영국 세력에 더 우호적인 정부를 원했다. 1895년 말 로즈의 측근 린더 스타 제임슨은 위틀란더르의 봉기를 촉발하려고 무장 병력을 이끌고 트란스발로 쳐들어갔다. 이 ‘제임슨 습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보어인이 영국을 깊이 의심하게 만들었다. 오렌지 자유국도 트란스발과 더 가까워졌다.
1897년부터 영국 고등판무관 앨프리드 밀너는 위틀란더르 문제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1899년 블룸폰테인에서 열린 크루거와의 회담은 결렬되었다. 영국은 국경 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1899년 10월 9일 크루거는 병력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기한이 지나자 두 공화국은 10월 11일 전쟁에 들어갔다.
주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금광을 장악하려는 영국의 욕구인가, 남아프리카 패권을 둘러싼 더 큰 다툼인가, 위틀란더르의 권리인가, 아니면 밀너와 크루거의 개성인가. 거의 모든 역사가가 동의하는 점은, 어느 쪽도 흑인 아프리카인 다수와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었고 둘 다 그들을 지배할 권리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쉬움
세 국면으로 본 전쟁
제1국면(1899년 10월 – 1900년 1월): 보어인이 먼저 공격했다. 근대식 마우저 소총으로 무장한 기마 코만도들이 나탈과 케이프를 침공해 레이디스미스, 킴벌리, 마페킹을 포위했다. 1899년 12월의 한 주, 뒷날 ‘검은 주간(Black Week)’이라 불린 기간에 영국군은 스톰버그, 마거스폰테인, 콜렌소에서 세 번 패했고, 1900년 1월에는 스피온콥에서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패배를 당했다.
제2국면(1900년 2월 – 9월): 영국은 로버츠 경을 사령관으로, 키치너 경을 참모장으로 삼아 대규모 증원군을 보냈다. 1900년 2월 킴벌리의 포위가 풀렸고, 2월 27일 보어 장군 피트 크론예가 약 4,000명과 함께 파르데베르흐에서 항복했으며, 이튿날 레이디스미스가 해방되었다. 영국군은 3월 블룸폰테인을 점령하고, 5월 마페킹을 구출했으며, 5–6월에는 요하네스버그와 프리토리아를 차지했다. 영국은 두 공화국의 병합을 선포했고 크루거는 유럽으로 떠났다.
제3국면(1900년 9월 – 1902년 5월): 보어 지도자들, 곧 크리스티안 더 베트, 쿠스 들 라 레이, 루이스 보타, 얀 스뮈츠 등은 항복하는 대신 게릴라전으로 돌아섰다. 소규모 코만도들이 철도·수송대·외딴 초소를 습격한 뒤 농장의 도움을 받아 시골로 사라졌다. 사령관이 된 키치너는 농장을 불태우고, 철조망으로 이은 수천 개의 블록하우스를 세우고, 대규모 ‘몰이’ 작전으로 땅을 훑고, 민간인을 수용소로 옮기는 것으로 대응했다.
중급
‘백인들의 전쟁’? 전쟁 속의 흑인 아프리카인
전쟁 초 양쪽 모두 이것은 ‘백인들의 전쟁’이며 흑인 아프리카인을 무장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 없이 전쟁을 치를 수 없었다. 흑인과 유색인 남성들은 마차 몰이꾼, 인부, 전령, 정찰병, 첩자, 경비병으로 일했다. 영국군은 이들을 대략 10만 명 고용했고, 역사가들은 영국 편에서 무장한 흑인이 약 1만 명에서 3만 명 사이였다고 추정한다. 이들은 흔히 블록하우스 경비나 정찰을 맡았지만, 영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기를 꺼렸다.
보어 쪽에서는 수천 명의 아흐터레이어르(agterryer, ‘뒤따라 말 타는 사람’), 곧 대개 흑인이나 유색인 하인이 주인을 따라 코만도에 나가 말을 돌보고 밥을 짓고 때로는 싸우기도 했다. 보어 코만도는 붙잡은 무장 흑인이나 유색인을 처형하는 일이 잦았다. 1901년 케이프의 칼비니아에서는 보어인에 대한 현지 저항을 조직한 유색인 대장장이 아브라함 이사우가 보어 코만도에게 매질당한 끝에 총살되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뒷날 역사가 빌 내선이 연구했다.
아프리카 공동체들은 자기들만의 목표도 추구했다. 마페킹 포위전에서는 마피켕 정착지의 바롤롱인이 도시 방어를 도왔지만, 영국군 지휘관 로버트 베이든파월은 흑인 주민의 배급을 줄여 많은 이가 떠나거나 굶주리게 만들었다. 젊은 츠와나인 통역사 솔 플라키는 포위전 일기를 남겼는데, 이 전쟁에 관한 몇 안 되는 흑인 목격자의 기록이다. 서부 트란스발에서는 린체가 이끄는 크갓라인이 보어 코만도와 싸웠고, 1902년 5월에는 줄루의 아바쿨루시 전사들이 보어인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홀크란스에서 보어인 수십 명을 죽였다.
많은 흑인 남아프리카인은 영국이 이기면 케이프 식민지의 일부 흑인 유권자가 누리던 권리를 자신들도 얻으리라 기대했다. 그 기대는 쓰라리게 무너졌다. 전쟁 뒤 싸움 중에 차지한 땅은 흔히 보어인 농부에게 되돌아갔고, 평화 조약은 흑인 투표권 문제를 뒤로 미뤘다.
중급
초토화 작전과 강제수용소
게릴라를 무찌르기 위해 영국군은 그들을 먹여 살리는 농장과 농작물을 파괴했다. 수만 채의 농가가 불탔고(흔히 약 3만 채라는 수치가 인용된다), 가축은 도살되거나 약탈되었다. 집을 잃은 여성·어린이·노인, 그리고 항복한 보어인의 가족들이 수용소로 옮겨졌다. 영국은 처음에 이를 난민 수용소라 불렀고,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라는 말은 전쟁 중에 쓰이기 시작했다.
백인 보어인 민간인을 위한 수용소는 40곳이 넘었다. 수용소는 과밀했고 물자가 부족했다. 한동안은 아직 싸우고 있는 남자의 가족에게 배급을 더 적게 주었다. 홍역·장티푸스·이질·폐렴이 빠르게 번졌다. 보어인 민간인 약 26,000–28,000명이 죽었는데, 대다수가 16세 미만의 어린이였다. 아프리카너에게 이는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땅에서 쫓겨난 흑인 아프리카인은 별도의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 수는 60곳이 넘었고(추정치는 64곳에서 약 80곳까지), 1902년에는 수용 인원이 115,000명을 넘었다. 환경은 흔히 더 열악했다. 많은 수용자가 스스로 식량을 기르거나 군대에서 일해야 먹을 것을 살 수 있었다. 군은 노동력을 공급하는 수단으로 수용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흑인 사망자의 공식 수치는 약 14,000명이지만 기록이 불완전해, 역사가들은 실제로는 최소 20,000명이었을 것으로 보며 사망자 대부분은 어린이였다.
1901년 영국의 복지 운동가 에밀리 홉하우스가 수용소를 방문하고 보고서를 펴내 영국 대중에게 충격을 주었다. 자유당 지도자 헨리 캠벨배너먼은 이를 ‘야만의 방법’이라 규탄했다. 밀리센트 포셋이 이끈 여성 조사위원회가 홉하우스가 밝힌 사실 상당 부분을 확인했고, 1901년 말부터 백인 수용소의 환경은 나아졌다. 흑인 수용소는 훨씬 적은 관심을 받았고 개선도 늦었다.
중급
평화, 그리고 평화가 빠뜨린 것
1902년이 되자 양쪽 모두 지쳐 있었다. 보어인 대표들은 페리니힝에 모여 격론 끝에 영국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페리니힝 조약은 1902년 5월 31일 프리토리아에서 서명되었다. 보어인은 영국의 주권을 받아들였고, 영국은 그 대가로 장래의 자치를 약속하고 학교와 법정에서 네덜란드어 사용을 허용하며 재건 자금을 내놓았다.
한 조항이 운명을 갈랐다. ‘원주민’에게 투표권을 줄지의 문제는 자치가 시행된 뒤에야 결정한다는 조항이었다. 이는 사실상 백인 유권자가 결정한다는 뜻이었고, 그들은 투표권을 넓히지 않았다. 1910년 옛 공화국들이 케이프·나탈과 합쳐 남아프리카 연방이 되었을 때도 정치권력은 백인의 손에 남았다.
흑인 지도자들은 조직으로 응답했다. 1912년 그들은 남아프리카 원주민 민족회의(뒷날의 아프리카 민족회의, ANC)를 세웠고, 솔 플라키가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 1913년의 원주민 토지법은 흑인의 토지 소유를 국토의 작은 부분으로 제한했는데, 이는 아파르트헤이트로 가는 길의 한 걸음이었다.
중급
남아프리카·영국·제국에 남긴 영향
남아프리카에서 전쟁, 특히 수용소의 기억은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를 강화했다. 전직 보어 장군 루이스 보타와 얀 스뮈츠는 연방의 지도자가 되어 영국과의 화해에 힘썼지만, 영국을 끝내 용서하지 않은 아프리카너도 있었다. 고통의 기억은 정치 운동의 일부가 되었고, 이 운동은 결국 1948년 국민당을 집권시켜 아파르트헤이트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전쟁에서 함께 고통받았던 바로 그 흑인 남아프리카인들을 억압했다.
영국에서 이 전쟁은 제국에 대한 자신감을 뒤흔들었다. 초반의 패배와 많은 지원병의 나쁜 건강 상태는 군 개혁과 ‘국가 효율’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수용소 추문은 정부에 타격을 주었고, 1906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하는 데 한몫했다. 마페킹 해방 뒤의 열광적인 축하는 영어에 떠들썩한 대중의 환호를 뜻하는 ‘매피킹(mafficking)’이라는 새 낱말을 남겼다.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에게 파병은 제국 안에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변호사 모한다스 간디가 인도인 구급대를 조직해 콜렌소와 스피온콥에서 부상한 영국군을 날랐는데, 충성을 보이면 인도인의 권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종군 기자였던 젊은 윈스턴 처칠은 보어인의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유명해졌다. 이 전쟁에서는 무연 화약 소총부터 철조망과 블록하우스까지, 제1차 세계 대전의 특징을 예고하는 새로운 무기와 방식도 등장했다.
중급
같은 전쟁, 서로 다른 기억
아프리카너의 기억은 수용소와 영웅적 저항에 모인다. 1913년 블룸폰테인에 세워진 국립 여성 기념비는 수용소에서 죽은 여성과 어린이를 기리며, 에밀리 홉하우스의 유해도 그가 죽은 뒤 그곳에 안치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아프리카너 아이들은 이 전쟁을 거대한 제국에 맞서 자유를 위해 싸운 작은 민족의 이야기로 배웠다.
영국의 기억은 오랫동안 전투와 포위전, 제국의 영웅, 그리고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에 집중되었다. 수용소는 여러 해 동안 전쟁의 핵심 사실이라기보다 무질서가 낳은 유감스러운 결과로 기억되었다. 1902년 오스트레일리아 장교 해리 ‘브레이커’ 모랜트의 처형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오래도록 논란거리로 남았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흑인 남아프리카인의 경험은 공식 기억에서 거의 빠져 있었다. 1970–1980년대부터 역사가들이 흑인의 참전과 흑인 수용소를 밝혀내면서 이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뒤 맞은 전쟁 100주년(1999–2002) 무렵, 남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 전쟁’이라는 이름과 이 전쟁이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을 강조했다. 오늘날 기념물과 연구는 흑인 수용소 희생자를 기리지만, 그들의 무덤 상당수는 여전히 표시조차 없다.
심화
1차 사료
영국 측은 막대한 공식 기록을 남겼다. 전황 보고, 수용소 명부와 월간 보고, 의회 문서(‘청서’), 포셋 위원회 보고서, 여러 권으로 된 공식 전사(戰史) 등이다. 신문사들은 많은 특파원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에는 처칠과 아서 코넌 도일도 있었다. 코넌 도일의 『대(大)보어 전쟁(The Great Boer War)』(1900)은 영국 편에 선 인기 있는 서술이었다.
보어인의 관점은 일기·편지·회고록, 예컨대 젊은 코만도 대원이던 데네이스 레이츠의 『코만도(Commando)』(1929), 그리고 전쟁 뒤 수십 년 동안 아프리칸스어로 간행된 수용소 생존자, 특히 여성들의 증언 속에 남아 있다. 이런 증언은 강렬하지만, 상당수가 아프리카너 민족주의가 커 가던 맥락에서 수집되었기에 역사가들은 신중하게 읽는다.
문헌 기록에서 흑인의 목소리는 훨씬 드물며,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문제다. 수십 년 동안 잊혔다가 1973년에야 출간된 솔 플라키의 포위전 일기는 귀중한 예외다. 역사가들은 수용소 기록, 배상 청구 문서, 법정 기록, 선교 문서, 아프리카 언어 신문 등을 활용해 흑인의 경험을 되살려 왔고, 케이프타운 대학교를 기반으로 한 영국 강제수용소 데이터베이스 사업은 수용소 명부를 검색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심화
역사가들의 논쟁
옛 영국 역사서는 전투와 장군 중심의 군사사를 썼고,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역사서는 영국의 잔혹함과 보어인의 영웅성을 강조했다. 토머스 패커넘의 『보어 전쟁(The Boer War)』(1979)은 새로운 문서고 자료를 활용해 폭넓은 독자에게 다가갔다. 이 책은 수용소와 흑인의 참전을 진지하게 다루었고, 광산 이해관계와 밀너의 정책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피터 워릭의 『흑인과 남아프리카 전쟁(Black People and the South African War)』(1983)과 빌 내선의 작업, 곧 『아브라함 이사우의 전쟁(Abraham Esau’s War)』(1991)과 『남아프리카 전쟁 1899–1902(The South African War 1899–1902)』(1999)는 흑인 아프리카인이 구경꾼이 아니라 핵심 참여자이자 희생자였음을 보여 주며 이 분야를 바꾸어 놓았다. 스토웰 케슬러, 개릿 베니워스 등의 흑인 수용소 연구는 추정 사망자 수를 끌어올리고 수용소를 노동 통제 체제로 분석했다.
수용소 자체도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 아프리카너 저자들은 이를 제노사이드라 불렀다. 수용소의 사회사를 쓴 엘리자베스 판 헤이닝언을 비롯한 많은 역사가는 대부분의 죽음이 전염병, 특히 홍역에서 비롯되었고 과밀·열악한 위생·부실한 행정·군사적 우선순위가 이를 치명적으로 만들었을 뿐, 몰살 계획의 결과는 아니었다고 본다. 반면 의도가 무엇이었든 땅을 비우는 정책이 군사 전략의 대가를 민간인에게 치르게 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전쟁의 원인을 두고도 금과 자본주의에서 전략적 경쟁, 개별 지도자의 야망까지 논쟁이 이어진다.
주요 전투 (39)
- 도른코프 전투1896년
- 마페킹 공방전1899–1900년
- 마거스폰테인 전투1899년
- 레이디스미스 공방전1899–1900년
- 스톰베르크 전투1899년
- 콜렌소 전투1899년
- 탈라나힐 전투1899년
- 엘란츠라흐테 전투1899년
- 모더강 전투1899년
- 벨몬트 전투1899년
- 크라이판 전투1899년
- 레이디스미스 전투1899년
- 그라스판 전투1899년
- 킴벌리 공방전1899–1900년
- 레이디스미스 구원1899년
- 데르데포르트 학살1899년
- 스피온콥 전투1900년
- 파르데베르흐 전투1900년
- 발크란츠 전투1900년
- 베르헨달 전투1900년
- 보타빌 전투1900년
- 다이아몬드힐 전투1900년
- 드리폰테인 전투1900년
- 노잇게다흐트 전투1900년
- 포플러그로브 전투1900년
- 사나스포스트 전투1900년
- 엘란즈리버 전투1900년
- 투겔라고지 전투1900년
- 피의 일요일1900년
- 렐리폰테인 전투1900년
- 블러드리버포트 전투1901년
- 바켄라흐테 전투1901년
- 엘란츠강 전투1901년
- 흐룬코프 전투1901년
- 흐룬클루프 전투1901년
- 블락폰테인 전투1901년
- 로이왈 전투1902년
- 트베보스 전투1902년
- 렐리폰테인 학살1902년
핵심 개념
- 금과 제국
- 금광 발견으로 트란스발은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땅이 되었고, 그 지배권이 갈등의 중심이 되었다.
- 게릴라전
- 수도를 잃은 뒤에도 보어인은 소규모 기동 코만도로 2년 가까이 싸움을 이어 갔다.
- 초토화 작전
- 영국은 게릴라가 기댈 곳을 없애려고 농장·농작물·가축을 파괴했다.
- 강제수용소
- 땅에서 쫓겨난 민간인은 백인용과 흑인용으로 나뉜 수용소에 갇혔고, 질병으로 수만 명, 대부분 어린이가 죽었다.
- 백인들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 흑인 아프리카인도 대규모로 일하고 싸우고 고통받고 죽었지만, 그 이야기는 오래 외면당했다.
- 다수를 뺀 평화
- 페리니힝 조약은 흑인의 정치적 권리를 대가로 보어인과 영국인을 화해시켰다.
- 이름이 곧 해석
- ‘보어 전쟁’, ‘제2차 자유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이라는 이름은 누구의 전쟁이었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 준다.
기록
- 1652년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케이프에 정착지를 세운다.
- 1881년 — 보어인이 마주바에서 영국군을 무찌르고 트란스발이 자치를 되찾는다(제1차 보어 전쟁).
- 1886년 — 비트바테르스란트에서 금광 발견, 요하네스버그가 세워진다.
- 1895년 — 제임슨 습격(1895년 12월 – 1896년 1월)이 실패한다.
- 1899년 — 크루거의 최후통첩(10월 9일), 개전(10월 11일), 레이디스미스·킴벌리·마페킹 포위, ‘검은 주간’(12월).
- 1900년 — 스피온콥(1월), 파르데베르흐 전투와 킴벌리·레이디스미스 해방(2월), 마페킹 해방(5월), 프리토리아 함락(6월).
- 1900년 — 게릴라전 국면이 시작되고, 농장 방화와 수용소 체제가 확대된다.
- 1901년 — 에밀리 홉하우스가 수용소를 방문해 보고서를 펴내고, 포셋 위원회가 조사에 나선다.
- 1902년 — 홀크란스 사건(5월), 페리니힝 조약이 프리토리아에서 서명된다(5월 31일).
- 1910년 —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한다.
- 1912년 — 남아프리카 원주민 민족회의(뒷날의 ANC)가 창립된다.
- 1913년 — 블룸폰테인에 국립 여성 기념비 건립, 원주민 토지법 제정.
용어 풀이
- 보어인 / 아프리카너
-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 백인 농민과 그 후손. ‘보어’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이다.
- 위틀란더르
- ‘외지인’. 트란스발 금광 지대로 이주한 주로 영국계 외국인.
- 코만도
- 지역 단위로 편성된 보어인 기마 민병대.
- 아흐터레이어르
- 코만도에 나간 보어인을 따라다닌 흑인 또는 유색인 하인.
- 블록하우스
- 작은 요새화된 초소. 영국군은 보어인의 이동을 막으려고 수천 개를 세워 철조망으로 이었다.
- 초토화 작전
- 농작물·농장·가축 등 적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모두 파괴하는 전략.
- 강제수용소
- 여기서는 민간인을 게릴라와 떼어 놓으려고 가둔 수용소. 이 말은 뒷날 훨씬 어두운 뜻을 띠게 된다.
- 유색인(Coloured)
- 혼혈 또는 코이코이계 등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남아프리카의 용어로, 뒷날 인종법에서 법적 범주로 쓰였다.
- 페리니힝 조약
- 전쟁을 끝내고 두 공화국을 영국 식민지로 만든 1902년의 강화 조약.
묻고 답하기
영국과 보어인은 왜 싸웠나요?
주로 트란스발과 그곳의 금, 그리고 누가 남아프리카를 지배할지를 두고 싸웠어요. 공식적인 쟁점은 영국계 이주민의 권리였어요.
수용소에서 왜 그렇게 많은 어린이가 죽었나요?
수용소는 사람이 너무 많고 물자가 부족했으며 음식·물·위생 상태가 나빴어요. 홍역 같은 병이 빠르게 번졌고, 어린이가 가장 약했어요.
흑인 아프리카인도 전쟁에서 싸웠나요?
네. 양쪽 모두 ‘백인들의 전쟁’이라고 했지만, 수만 명의 흑인 아프리카인이 군대를 위해 일했고 많은 사람이 무장했어요. 대부분 영국 편이었어요.
이 수용소는 나치 강제수용소와 같은 건가요?
아니요. 사람을 죽이려고 만든 곳은 아니었지만, 정책과 방치 때문에 민간인이 대규모로 죽었어요. 역사가들은 같은 낱말을 조심스럽게 쓰면서 차이를 설명해요.
사망자 수치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백인 수용소의 사망은 비교적 충실하게 기록되어 약 26,000–28,000명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흑인 수용소 기록은 불완전해서 공식 수치 14,000명은 최소치이며, 많은 역사가는 20,000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이 전쟁은 흑인 남아프리카인에게 무엇을 의미했나?
많은 이가 영국이 이기면 권리가 늘어나리라 기대했지만, 강화 조약은 흑인 투표권 문제를 미뤘고 1910년의 연방은 권력을 백인의 손에 남겼다.
‘보어 전쟁’과 ‘남아프리카 전쟁’ 중 어느 이름이 나은가?
둘 다 쓰인다.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많은 역사가가 ‘남아프리카 전쟁’을 선호하지만, ‘앵글로-보어 전쟁’도 남아프리카와 다른 곳에서 여전히 흔히 쓰인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Second Boer War. Wikipedia
- 제2차 보어 전쟁. 위키백과
- Second Boer War concentration camps. Wikipedia
- Black Concentration Camps during the Anglo-Boer War 2, 1900–1902. South African History Online
- Emily Hobhouse. Wikipedia
- Treaty of Vereeniging. Wikipedia
- Sol Plaatje. Wikipedia
- Thomas Pakenham, The Boer War. Weidenfeld & Nicolson, 1979
- Peter Warwick, Black People and the South African War, 1899–1902.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 Bill Nasson, The South African War, 1899–1902. Arnold, 1999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