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멕시코 혁명

Revolución mexicana

1910–1920년 ·

한 문장으로

멕시코 혁명은 1910년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오랜 독재에 맞선 봉기로 시작해 여러 군대와 사상이 맞붙은 10년의 내전으로 번졌고, 수십만에서 100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 가며 1917년 헌법과 현대 멕시코 국가를 낳았어요.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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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100여 년 전 멕시코는 포르피리오 디아스라는 한 사람이 30년 넘게 다스리고 있었어요. 철도와 공장이 세워지고 몇몇 사람은 큰 부자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멕시코 사람은 가난한 농민이었고, 많은 이가 몇몇 집안이 가진 거대한 농장에 땅을 빼앗겼어요. 노동자에게는 권리가 거의 없었고, 공정한 선거로 지도자를 뽑을 수도 없었어요.

1910년 프란시스코 마데로라는 부유한 사람이 디아스에 맞서 대통령 선거에 나섰어요. 디아스는 그를 체포했어요. 마데로는 탈출해서 1910년 11월 20일에 모두 일어나자고 외쳤어요. 전국에서 사람들이 무기를 들었고, 1911년 디아스는 권력을 내려놓고 배를 타고 유럽으로 떠났어요.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어요. 지도자마다 원하는 것이 달랐거든요. 남쪽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농민들이 “땅과 자유”를 외치며 빼앗긴 땅을 돌려 달라고 했어요. 북쪽에서는 판초 비야가 목동·광부·농민으로 이루어진 유명한 군대를 이끌었어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와 알바로 오브레곤 같은 지도자는 강한 새 정부를 원했어요. 1913년 마데로가 살해되자 혁명가들은 그를 몰아낸 장군과 싸웠고, 나중에는 서로 싸웠어요.

싸움은 10년쯤 이어졌어요. 기차가 군대를 통째로 실어 날랐고, 여성과 가족들도 병사들과 함께 다녔어요. 마을이 불타고, 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으며, 수십만 명이 피란을 갔는데 많은 이가 미국으로 갔어요.

1917년 멕시코는 농민에게 땅을, 노동자에게 권리를, 모두에게 무료 공립 학교를 약속하는 새 헌법을 만들었어요. 지금도 멕시코 사람들은 해마다 11월 20일에 혁명의 시작을 기념하고, 혁명의 영웅들은 노래와 영화, 거대한 벽화에 등장해요.

한눈에 보기

기간
1910년 11월 20일부터 1920년까지(가장 흔한 구분). 1917·1924·1929·1940년까지로 보는 역사가도 있다.
장소
멕시코 전역, 특히 북부(치와와·소노라·코아우일라), 중부, 모렐로스, 그리고 미국 국경 지대
주요 세력
포르피리오 체제, 마데로파, 사파타파, 비야파, 우에르타 정권, 입헌파(카란사·오브레곤)
주요 인물
포르피리오 디아스, 프란시스코 I. 마데로, 에밀리아노 사파타,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알바로 오브레곤
핵심 문서
1917년 2월 5일 헌법(제3·27·123·130조)
사망자
매우 불확실. 초과 사망 추정은 수십만 명에서 100만 명 이상까지. 인구는 약 1,520만 명(1910)에서 약 1,430만 명(1921)으로 줄었다.
외국의 개입
미국의 베라크루스 점령(1914), 퍼싱의 징벌 원정(1916–17), 독일의 공작(치머만 전보, 1917)
유산
새 헌법, 토지 개혁, 세속 공교육, 벽화 운동, 1929년부터 2000년까지 집권한 여당

쉬움

멕시코 혁명은 무엇이었나

멕시코 혁명은 1910년에 시작된, 봉기와 내전과 정치 변화가 길게 이어진 시기다. 처음에는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를 몰아내고 자유선거를 치르자는 운동이었지만, 곧 토지와 노동자의 권리, 가톨릭교회와 외국 기업의 힘, 그리고 누가 멕시코를 다스릴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으로 커졌다.

이것은 두 편이 싸운 하나의 전쟁이 아니었다. 수많은 군대가 일어났다 사라졌고, 어제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되기 일쑤였다. 지주와 정치가가 이끈 군대도 있었고, 농민·목동·광부·교사가 이끈 군대도 있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흔히 복수형의 ‘혁명들’을 말한다. 지역마다 다른 운동이 때로는 손잡고 때로는 부딪쳤기 때문이다.

멕시코 혁명은 1917년 러시아 혁명보다 몇 해 앞서 시작된, 20세기 최초의 대규모 사회 혁명 가운데 하나였다. 혁명은 멕시코의 법과 문화와 정치를 바꾸었고, 현대 멕시코의 건국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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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왜 일어났나: 포르피리아토

프랑스 간섭 전쟁의 영웅이자 장군인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76년 권력을 잡아, 4년 동안의 공백을 빼면 1911년까지 다스렸다. 이 시기를 ‘포르피리아토(Porfiriato)’라 한다. 그의 정부는 질서와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 철도가 나라를 이었고, 외국 투자자들이 광산·유정·공장을 세웠으며, 수출이 크게 늘었다. 정부의 표어는 “질서와 진보”였다.

그러나 그 혜택은 매우 불평등하게 돌아갔다. 법은 기업과 지주가 마을 공유지와 원주민 공동체의 밭을 차지하도록 허용했고, 1910년에는 농촌 가구의 대다수가 땅을 갖지 못했다. 많은 이가 대농장(아시엔다)에서 일했는데, 농장 상점에 진 빚에 묶이는 경우도 있었다. 유카탄의 에네켄(용설란) 농장에서는 마야인과 야키족 노동자를 비롯한 일꾼들이 노예와 다름없는 상태에 놓였다. 공장 노동자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카나네아 구리 광산(1906)과 리오블랑코 방직 공장(1907)의 파업은 유혈 진압되었다.

정치적으로 디아스는 선거를 치르기는 했지만 결과는 통제되었다. 1908년 그는 미국 기자 제임스 크릴먼과의 인터뷰에서 멕시코가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었고 야당을 환영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힘을 얻은 코아우일라의 부유한 지주 집안 아들 프란시스코 I. 마데로는 실질적인 선거권과 재선 금지를 요구하는 책을 쓰고 1910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디아스는 그를 가두고 자신의 재선을 선언했다. 1907년 이후의 경기 침체, 중간층과 지방 엘리트의 불만도 위기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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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1910–1913: 마데로의 혁명과 그의 죽음

마데로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로 탈출해 ‘산루이스포토시 계획’을 발표하고, 1910년 11월 20일에 무기를 들자고 멕시코인들에게 호소했다. 처음에는 별일이 없었지만, 북부 치와와주에서는 파스쿠알 오로스코와 판초 비야가 이끄는 반군이 불어났고, 멕시코시티 남쪽 모렐로스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땅을 되찾으려는 마을 사람들을 일으켰다. 1911년 5월 반군이 미국 국경의 시우다드후아레스를 점령했다. 디아스는 1911년 5월 25일 사임하고 파리로 망명했다.

마데로는 선거에서 이겨 1911년 11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옛 연방군과 행정 조직을 대부분 그대로 두고 토지 개혁을 더디게 진행했다. 사파타는 그와 결별하고 ‘아얄라 계획’(1911년 11월)을 발표해, 마을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고 대농장 일부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1912년에는 오로스코도 반란을 일으켰다.

1913년 2월, ‘비극의 10일(Decena Trágica)’이라 불리는 멕시코시티의 열흘간의 전투 중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이 마데로를 배신하고 권력을 잡았다. 미국 대사 헨리 레인 윌슨은 음모자들 사이의 합의를 주선했다. 마데로와 부통령 호세 마리아 피노 수아레스는 1913년 2월 22일 살해되었는데, 공식 발표는 “탈출하려다” 죽었다는 것이었다. 마데로의 죽음은 그를 순교자로 만들었고, 훨씬 큰 전쟁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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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913–1915: 우에르타에 맞선 전쟁과 승자들 사이의 전쟁

코아우일라 주지사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우에르타를 인정하지 않고 ‘과달루페 계획’(1913년 3월)을 발표해 스스로 입헌군의 ‘제1 통령(Primer Jefe)’이 되었다. 알바로 오브레곤은 소노라에서 입헌군을 이끌었고, 판초 비야는 철도로 병력과 말을 실어 나르며 치와와에서 강력한 ‘북부 사단(División del Norte)’을 키웠다. 사파타는 남부에서 독자적인 전쟁을 계속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우에르타를 승인하지 않았고, 1914년 4월 미군은 우에르타에게 가는 무기 수송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어 베라크루스항을 점령했다. 1914년 6월 비야가 사카테카스에서 승리하자 우에르타는 망명했고, 옛 연방군은 해체되었다.

그러자 승자들이 갈라졌다. 1914년 10~11월 아과스칼리엔테스 회의에서 대표들이 정부 구성을 합의하려 했지만, 카란사는 회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야와 사파타는 손잡고 카란사에 맞섰고, 1914년 12월 함께 멕시코시티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국립궁전에서 찍은 사진은 유명하다. 카란사와 오브레곤은 베라크루스로 물러났는데, 미군은 1914년 11월 이곳에서 철수했다.

카란사 쪽은 지지를 얻기 위해 중요한 약속을 했다. 1915년 1월 법령은 마을 토지의 반환을 약속했고, 도시 노동자 단체 ‘세계 노동자의 집(Casa del Obrero Mundial)’과의 합의로 노동자 ‘적색 대대’가 만들어졌다. 1915년 4월 셀라야 전투에서 오브레곤은 유럽 전쟁에서 배운 참호·철조망·기관총으로 비야의 기병 돌격을 격파했다. 오브레곤은 이 전역 뒤쪽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비야의 군대는 무너졌고, 1915년 말 미국은 카란사 정부를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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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917년 헌법

1916년 말 카란사는 케레타로에서 제헌 회의를 소집했다. 대표들 가운데는 카란사보다 급진적인 이들이 많았고, 이들은 이전의 자유주의적인 1857년 헌법을 훨씬 넘어서는 헌법을 만들었다. 이 헌법은 1917년 2월 5일 공포되었고,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지금도 멕시코 헌법으로 남아 있다.

몇몇 조항은 특히 유명하다. 제3조는 무상의 세속 공교육을 규정했다. 제27조는 토지와 물, 석유·광물 같은 지하자원이 본래 국가에 속한다고 선언해 토지 개혁과 훗날의 석유 국유화를 가능하게 했다. 제123조는 하루 8시간 노동, 단결권과 파업권 등 노동자 보호를 보장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노동 조항 가운데 하나였다. 제130조 등은 가톨릭교회에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이 약속들이 실현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카란사 자신은 토지를 비교적 적게 분배했다. 헌법의 반교권 조항은 훗날 멕시코 서부 가톨릭 농민들의 반란인 크리스테로 전쟁(1926–1929)을 부르는 한 원인이 되었다. 대규모 토지 개혁과 석유 수용은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1934–1940) 때에야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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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916–1920: 미국, 사파타의 죽음, 전쟁의 끝

미국이 카란사를 승인한 데 분노한 비야는 1916년 3월 9일 뉴멕시코주 컬럼버스를 습격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존 J. 퍼싱 장군이 이끄는 징벌 원정대를 멕시코 북부 깊숙이 보냈다. 원정대는 끝내 비야를 잡지 못했고,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준비하던 1917년 초 철수했다. 1917년 1월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은 비밀 전보에서 멕시코가 독일 편에 서서 미국과 싸우면 잃은 영토를 되찾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멕시코는 거절했지만, 전보가 공개되면서 미국의 참전을 앞당겼다.

남부에서 카란사 군대는 사파타파를 상대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잔혹한 진압 작전을 벌였다. 1919년 4월 10일 사파타는 카란사파 장교 헤수스 과하르도의 함정에 빠져 치나메카 농장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1920년 카란사가 후계자를 직접 정하려 하자, 오브레곤과 소노라 출신 장군들이 ‘아과프리에타 계획’으로 반기를 들었다. 카란사는 피신하다 1920년 5월 21일 살해되었고, 오브레곤은 그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야는 1920년 새 정부와 화해하고 두랑고주 카누티요의 목장으로 물러났지만, 1923년 암살되었다. 오브레곤 역시 1928년 재선된 뒤 암살되었다. 1929년 그의 후계자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국민혁명당(PNR)을 창당했고, 이 당은 이름을 바꾸어 가며(PRM, 1946년부터 PRI) 2000년까지 멕시코를 쉬지 않고 통치했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는 무장 혁명의 끝을 1920년으로 보면서도, 혁명 국가의 제도화는 1930~4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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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민간인, 솔다데라, 그리고 인명 피해

혁명은 멕시코의 거의 모든 가정에 닿았다. 군대는 식량·말·사람을 징발했고, 강제 징집(레바, leva)이 남성들을 끌고 갔으며, 철도와 광산이 파괴되고 많은 도시의 주인이 몇 번씩 바뀌었다. 1915~1917년에는 여러 지역에 기근이 들었고, 1918년 인플루엔자 대유행이 죽음을 더했다. 수십만 명의 멕시코인이 북쪽 미국으로 피란했는데, 이 이동은 텍사스·캘리포니아 등지의 멕시코계 미국인 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사망자 수는 매우 불확실하다. 멕시코 인구 조사는 1910년 약 1,520만 명, 1921년 약 1,430만 명을 기록했다. 이 감소와 원래 기대되었을 인구 증가를 바탕으로 역사가들은 전체 ‘인구학적 비용’을 100만~200만 명 이상으로 추산해 왔지만, 여기에는 사망뿐 아니라 태어나지 못한 출생과 이민이 함께 들어 있다. 로버트 매카 같은 인구학자들은 이 요인들을 나누어 보려 했다. 초과 사망 추정은 흔히 수십만 명에서 100만 명 이상까지 걸쳐 있으며, 대부분은 전투가 아니라 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민간인이었다.

여성은 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솔다데라(soldadera)’들은 군대를 따라다니며 밥을 짓고 부상자를 돌보고 보급품을 나르고 때로는 싸웠다. 페트라 에레라, 아멜리아 로블레스처럼 부대를 지휘한 이도 있었다. 여성들은 첩자·기자·정치 조직가로도 활동했다. 유행가 「라 아델리타」는 솔다데라를 국가의 상징으로 만들었지만, 그 이미지는 성폭력을 포함해 여성들이 겪은 고난과 폭력을 가리기도 했다.

다른 공동체들도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멕시코 북부의 중국인 이민자들은 인종주의적 폭력의 표적이 되었고, 1911년 5월 토레온에서는 혁명군과 주민들에 의해 300명이 넘는 중국인 주민이 학살되었다. 1905년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려고 유카탄에 건너간 한인 노동자들도 그곳에서 혁명기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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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멕시코 안팎의 기억

1920년 이후 새 정부들은 혁명을 서로 싸운 지도자들을 한 신전에 모신 국가 이야기로 만들었다. 민주주의의 사도 마데로, 농민의 수호자 사파타, 가난한 이들의 투사 비야, 입법자 카란사가 그렇게 나란히 섰다. 멕시코시티의 혁명 기념탑에는 살아서는 흔히 적이었던 마데로·카란사·비야·카예스·카르데나스의 유해가 함께 안치되어 있다. 혁명 기념일인 11월 20일은 국경일이다. 집권당은 자신이 하나로 이어지는 이 혁명을 구현한다고 주장했다.

문화가 이 기억을 실어 날랐다. 1920년대 교육부 장관 호세 바스콘셀로스 아래에서 국가는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에게 혁명·원주민의 역사·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그린 벽화를 의뢰했다. 마리아노 아수엘라의 『천민들(Los de abajo)』(1915), 마르틴 루이스 구스만의 『독수리와 뱀(El águila y la serpiente)』(1928), 넬리 캄포베요의 『카르투초(Cartucho)』(1931), 후안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1955),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1962) 같은 소설은 더 환멸 어린 시각을 보여 주었다. 코리도(서사 민요)와 사진, 특히 카사솔라 사진 기록 보관소에 남은 사진들이 혁명의 이미지를 곳곳에 퍼뜨렸다.

기억은 다툼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파타의 이미지는 후대의 농민 운동에서 되살아났고, 1994년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혁명의 약속이 배신당했다며 그의 이름을 내걸었다. 오랫동안 공식 추모에서 빠져 있던 비야는 1976년에야 혁명 기념탑으로 옮겨졌다. 미국에서 비야는 처음에는 뉴스 영화에서 영웅처럼 다뤄졌다가 컬럼버스 습격 뒤 산적으로 비난받았다. 징벌 원정도 국경 양쪽에서 매우 다르게 기억된다.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멕시코 혁명은 민족주의적·농업적 개혁의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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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차 사료

핵심 문서로는 각 세력의 목표를 밝힌 혁명 ‘계획’들, 곧 산루이스포토시 계획(1910), 아얄라 계획(1911), 과달루페 계획(1913), 아과프리에타 계획(1920)과 케레타로 제헌 회의 토론, 그리고 1917년 헌법 자체가 있다. 멕시코 정부 문서, 미국 국무부와 군 기록, 영국·독일·프랑스 외교 문서는 최고위 정치와 외국 개입을 연구하는 데 중요하다. 프리드리히 카츠의 연구는 유럽 문서고가 강대국의 개입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려 주는지 보여 주었다.

개인과 지역의 사료도 그만큼 중요하다. 혁명가와 장군의 회고록, 사파타 본부의 서신, 지방 사법·행정 기록, 1960년대부터 퇴역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사 사업 등이 있다. 비야 군대를 그린 『반란의 멕시코(Insurgent Mexico)』(1914)의 저자인 미국인 존 리드를 비롯한 기자들은 생생하지만 편파적인 기록을 남겼다. 사진과 초기 영화 덕분에 멕시코 혁명은 시각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혁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비야는 1914년 미국 영화사와 계약을 맺기까지 했다.

이 모든 사료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혁명 계획은 지도자들이 늘 지키지는 않은 이상을 밝힌 것이었고, 회고록은 흔히 수십 년 뒤 자기변호를 위해 쓰였으며, 미국 보고서는 미국의 이익을 반영했다. 전쟁 중에 모은 통계는 불완전했고, 그래서 인구 추정이 크게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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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연구사: 정말 혁명이었나

수십 년 동안 지배적이던 ‘공식’ 해석은 혁명을 1917년 헌법과 혁명 후 국가로 완성된 민중적·농업적·민족주의적 운동으로 보았다. 존 워맥 주니어의 『사파타와 멕시코 혁명(Zapata and the Mexican Revolution)』(1968)은 “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을 일으킨” 농민 운동을 그린 고전이 되었는데, 모렐로스 마을 사람들 자신의 목표를 강조했다.

1968년 틀라텔롤코 학생 학살 이후 많은 학자가 집권당의 주장을 의심하게 되었다.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포르피리아토와의 연속성, 중간층과 북부 엘리트의 역할,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의 건설을 강조했다. 어떤 이들은 결과가 사회 혁명이라기보다 ‘대반란’에 가까웠다고 주장했는데, 라몬 에두아르도 루이스의 『대반란(The Great Rebellion)』(1980)이 그 예다. 아돌포 길리의 『중단된 혁명(La revolución interrumpida)』(1971)은 도중에 끊긴 혁명이라는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내놓았다. 루이스 곤살레스의 미시사 『흔들리는 마을(Pueblo en vilo)』(1968) 같은 지역 연구는 곳에 따라 혁명의 경험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 주었다.

앨런 나이트의 두 권짜리 『멕시코 혁명(The Mexican Revolution)』(1986)은 수정주의에 맞서, 결과가 새로운 엘리트에게 유리했더라도 주로 농업적 불만이 이끈 진정한 민중 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카츠는 『멕시코의 비밀 전쟁(The Secret War in Mexico)』(1981)에서 혁명을 국제적 맥락 속에 놓았고, 대표적인 비야 전기(1998)를 썼다. 존 메이슨 하트는 외국, 특히 미국 자본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후의 ‘탈수정주의’와 문화사 연구자들은 아래로부터의 국가 형성, 공동체와 새 국가 사이의 협상, 젠더, 원주민, 종교와 크리스테로 전쟁, 혁명 기억의 형성을 연구해 왔다.

혁명이 언제 끝났는지(1917, 1920, 1940), 사망자가 몇 명인지, 토지·노동권·민주주의의 약속이 이루어졌는지 배신당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된다. 이 질문들은 학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멕시코 정치는 지금도 혁명의 유산을 두고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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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 (11)

  1. 리판티틀란 전투1835년
  2. 토레온 학살1911년
  3. 콰우틀라 전투1911년
  4. 시우다드후아레스 전투1911년
  5. 메히칼리 함락1911년
  6. 제1차 토레온 전투1913년
  7. 사라고사 전투1913년
  8. 게레로 전투1916년
  9. 제3차 토레온 전투1916년
  10. 암보스노갈레스 전투1918년
  11. 시우다드후아레스 전투1919년

핵심 개념

실질적 선거권, 재선 금지
디아스의 장기 집권에 맞선 마데로의 구호로, 지금도 멕시코 정치의 원칙이다.
땅과 자유
마을에 땅을 돌려주고 대농장을 해체하라는 사파타파의 요구.
여러 개의 혁명
지도자·사회적 기반·목표가 다른 지역 운동들이 옛 체제뿐 아니라 서로와도 싸웠다.
입헌주의
카란사 세력은 법을 통해 정당성을 주장했고, 그 결실이 1917년 헌법이다.
사회권
1917년 헌법은 토지 개혁, 자원의 국가 소유, 노동권, 세속 교육을 법에 담았다.
제도화된 혁명
승자들은 20세기 대부분 동안 스스로 혁명을 구현한다고 주장한 국가와 정당을 세웠다.
논쟁적 유산
혁명이 멕시코를 바꾸었는지, 아니면 주로 한 엘리트를 다른 엘리트로 바꾸었는지를 두고 역사가와 정치 운동이 맞선다.

기록

  1. 1876년 —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권력을 잡고 포르피리아토가 시작된다.
  2. 1908년 — 디아스의 크릴먼 인터뷰. 마데로가 대통령 승계를 다룬 책을 펴낸다.
  3. 1910년 — 디아스 재선 선언. 마데로의 산루이스포토시 계획이 11월 20일 봉기를 호소한다.
  4. 1911년 — 반군의 시우다드후아레스 점령, 디아스 사임(5월), 마데로 대통령 취임, 사파타의 아얄라 계획(11월).
  5. 1913년 — 비극의 10일, 마데로 살해, 우에르타 집권, 카란사의 과달루페 계획.
  6. 1914년 — 미국의 베라크루스 점령, 비야의 사카테카스 승리, 우에르타 망명, 아과스칼리엔테스 회의에서 혁명 세력 분열.
  7. 1915년 — 오브레곤이 셀라야에서 비야를 격파, 미국이 카란사를 승인.
  8. 1916년 — 비야의 뉴멕시코주 컬럼버스 습격, 퍼싱의 징벌 원정.
  9. 1917년 — 2월 5일 헌법 공포, 치머만 전보.
  10. 1919년 — 사파타가 치나메카에서 살해된다(4월 10일).
  11. 1920년 — 아과프리에타 계획, 카란사 살해, 오브레곤 대통령 당선.
  12. 1929년 — 국민혁명당 창당, 크리스테로 전쟁 종결.

용어 풀이

포르피리아토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다스린 시기(1876–1911).
아시엔다
빚에 묶인 상주 노동자를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던 대농장.
에히도
농촌 공동체가 함께 보유하는 토지. 혁명 후 토지 개혁의 주요 형태.
계획(Plan)
봉기와 그 목표를 선포하는 정치 선언문. 아얄라 계획이 그 예다.
입헌파
우에르타의 쿠데타 이후 헌정 질서 회복을 내세운 카란사 세력.
솔다데라
혁명군을 따라다니며 지원하고 때로는 싸운 여성.
코리도
혁명 이야기를 전하는 데 널리 쓰인 멕시코의 서사 민요.
벽화 운동
역사적·사회적 주제를 담은 대형 공공 벽화를 그린 멕시코 미술 운동.
반교권주의
교회의 권력과 특권을 제한하는 정책.

묻고 답하기

멕시코 혁명에서 ‘착한 편’은 누구였어요?

한마디로 답하기 어려워요. 지도자마다 목표가 달랐고 모든 군대가 폭력을 저질렀어요. 오늘날 멕시코는 서로 싸웠던 이들을 함께 기려요.

사파타는 무엇을 원했나요?

무엇보다 모렐로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마을에 땅을 돌려주고 대농장을 해체하는 것이었어요. 아얄라 계획에 그 내용이 담겨 있어요.

미국은 왜 끼어들었나요?

미국 시민과 투자를 보호하고, 누가 멕시코를 다스릴지에 영향을 주려 했으며, 비야의 컬럼버스 습격에 대응하려 했기 때문이에요. 멕시코에서는 이런 개입을 주권 침해로 기억해요.

혁명은 언제 끝났나요?

많은 역사가는 오브레곤이 집권한 1920년을 꼽지만, 전투와 헌법과 새 국가 건설 가운데 무엇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1917·1924·1929·1940년을 쓰기도 해요.

몇 명이 죽었나요?

아무도 정확히 몰라요. 초과 사망 추정은 수십만 명에서 100만 명 이상까지이고, 이민과 줄어든 출생까지 포함한 전체 인구 손실은 200만 명에 이르렀을 수도 있어요.

진짜 사회 혁명이었나요, 아니면 지배자만 바뀐 건가요?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려요. 수정주의자들은 연속성과 엘리트의 통제를 강조하고, 앨런 나이트 같은 학자들은 많은 약속이 늦어지거나 지켜지지 않았어도 민중의 농업적 동원이 그것을 진정한 혁명으로 만들었다고 봐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Mexican Revolution. Wikipedia
  2. Plan of Ayala. Wikipedia
  3. Constitution of Mexico. Wikipedia
  4. Emiliano Zapata. Wikipedia
  5. Pancho Villa. Wikipedia
  6. Soldaderas. Wikipedia
  7. Alan Knight, The Mexican Revolution (2 vo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8. John Womack Jr., Zapata and the Mexican Revolution. Alfred A. Knopf, 1968
  9. Friedrich Katz, The Secret War in Mexico: Europe, the United States, and the Mexican Revolu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
  10. Friedrich Katz, The Life and Times of Pancho Vill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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