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일 전쟁

中國抗日戰爭 (중국 항일 전쟁) · 日中戦争 (닛추 센소) · Second Sino-Japanese War

1937–1945년 ·

한 문장으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이 중국을 상대로 벌인 전면적 침략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중국 민간인과 군인이 목숨을 잃었고 난징 대학살 같은 잔학 행위가 벌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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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 일본은 아시아에 큰 제국을 세우려는 지도자들이 다스리고 있었어요. 일본은 이미 한국과 타이완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1년에는 중국 동북쪽의 만주를 차지했어요.

1937년 7월, 베이징 근처 다리에서 일어난 작은 총격 사건이 거대한 전쟁으로 번졌어요. 일본의 현대식 군대는 상하이와 난징 같은 중국의 큰 도시를 빠르게 점령했어요. 중국은 땅은 넓었지만 가난했고 무기도 부족했어요. 그래도 항복하지 않았지요. 중국 정부는 멀리 내륙의 충칭으로 옮겨 가서 계속 싸웠어요.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붙잡힌 중국 군인과 평범한 사람들을 엄청나게 많이 죽였고, 수많은 여성에게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어요. 이것을 ‘난징 대학살’이라고 해요.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끔찍한 사건 가운데 하나예요.

한국 사람들도 이 이야기와 깊이 얽혀 있어요.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일본은 많은 한국인을 강제로 끌고 가 일을 시키거나 전쟁에 내보냈어요. 하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되찾으려고 싸운 한국인들도 있었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중국에서 일본과 싸우기 위해 한국광복군을 만들었어요.

전쟁은 8년 동안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어요.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천만 명이 집을 잃었어요.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고, 한국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어요. 중국, 일본, 한국 사람들은 지금도 이 전쟁을 강하게 기억하고, 때로는 이야기하는 방식을 두고 의견이 갈리기도 해요.

한눈에 보기

시기
1937년 7월 7일(루거우차오 사건) – 1945년 9월 9일(난징 항복 조인). 중국 공식 역사는 1931년부터 ‘14년 항전’으로 본다
장소
중국 동부·북부·중부·남부와 만주, 관련 작전으로 미얀마(버마)
참가 세력
일본 제국(만주국·왕징웨이 정권 등 괴뢰 정권 포함) 대 중화민국(국민정부와 공산당 군대). 뒤에 소련·미국·영국이 지원
주요 사건
상하이 전투(1937), 난징 대학살(1937–38), 타이얼좡·우한 전투(1938), 충칭 폭격(1938–43), 진주만 공격(1941), 이치고 작전(1944)
사망자
중국인 사망자는 군인·민간인을 합쳐 흔히 1,400만–2,000만 명 이상으로 추정. 중국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는 약 45만–70만 명. 모든 수치는 불확실하다
피란민
수천만 명, 흔히 8,000만–1억 명으로 추정
한국과의 관계
일제 강점하의 한국은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고,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1940)
결과
1945년 8–9월 일본 항복, 타이완의 중국 반환, 한국의 광복, 국공 내전 재개

쉬움

중일 전쟁이란

중일 전쟁은 1937년 7월에 시작되어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끝난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사이의 전쟁이다. 1894–1895년 일본과 청나라가 벌인 청일 전쟁(제1차 중일 전쟁)과 구별해 영어권에서는 ‘제2차 중일 전쟁’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항일 전쟁’(抗日戰爭)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전쟁 중 공식적으로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보통 ‘일중 전쟁’(日中戦争)이라고 한다.

이 전쟁은 아시아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었다. 1937년부터 1941년 12월까지 4년 넘게 중국은 사실상 홀로 일본과 싸웠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과 영국·네덜란드 식민지를 공격하자,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고 중국은 미국·영국·소련과 함께 싸웠다.

중국에게 이 전쟁은 재앙이었다. 수백만 명이 죽고, 도시가 폭격당하고, 수천만 명이 피란민이 되었다. 전쟁은 중국 정치도 바꾸어, 공산당이 1949년 내전에서 이기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게 이 전쟁은 안으로는 가혹한 강제 동원을, 밖으로는 무장 독립 투쟁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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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배경과 원인

19세기 말부터 일본은 산업·제국주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1895년 청으로부터 타이완을 빼앗았고, 1904–1905년 러일 전쟁 뒤 남만주의 권익을 얻었으며,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했다. 1915년에는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어 영향력을 넓혔다. 많은 일본 지도자는 중국, 특히 자원이 풍부한 만주를 일본의 안보와 경제에 꼭 필요한 곳으로 보았다.

한편 중국은 분열되어 있었다. 1912년 청이 무너진 뒤 군벌들이 권력을 다투다가, 1928년 장제스의 국민당이 나라의 상당 부분을 통일했다. 국민당은 이어 중국 공산당과 격렬한 내전을 벌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 장교들은 선양(펑톈) 근처 철도에서 폭발 사건을 꾸며 내고 이를 구실로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만주 사변). 일본은 1932년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앞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이 이를 비판하자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그 뒤 몇 해 동안 일본의 화북 압박은 점점 거세졌다. 1936년 12월 장제스는 휘하 장군 두 명에게 감금된 시안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토벌을 멈추고 항일 통일전선을 결성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1937년 무렵 중국 여론은 항전을 요구했고, 일본에서는 군부가 큰 정치적 힘을 쥔 가운데 많은 지도자가 중국을 금방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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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누가 싸웠나

일본은 잘 훈련되고 장비가 좋은 육군과 강력한 해군·공군으로 싸웠다. 점령지에는 협력 정권을 만들어 이용했다. 동북의 만주국, 그리고 1940년부터 국민당 지도자였던 왕징웨이(汪精衛)를 앞세운 난징의 ‘국민정부’가 그것이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타이완의 사람들도 점점 더 많이 병사와 노동자로 동원되었다.

중국 쪽에서는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주력군을 이끌며 대규모 정규전을 대부분 치렀다. 중국 공산당은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주로 화북·화중의 일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근거지를 넓혔다. 두 당의 통일전선은 늘 긴장 상태였고, 1941년 1월의 신사군 사건(환남 사변) 같은 공공연한 충돌로 무너지기도 했다.

외국의 도움도 중요했다. 소련은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비행기·고문단·차관을 제공했다. 미국은 차관과 무기 대여, ‘플라잉 타이거스’라 불린 의용 비행대를 보냈고, 1941년 이후에는 히말라야를 넘는 공수(‘험프’ 항로)나 버마 공로(公路)로 물자를 보냈다.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등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망명 투사들도 중국 편에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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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1937–1938: 전면 침략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남서쪽 루거우차오(노구교, 마르코 폴로 다리) 근처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총격이 오갔다.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았고, 몇 주 만에 일본은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했다. 8월에는 전투가 상하이로 번졌고, 장제스는 독일식 훈련을 받은 정예 사단을 투입했다. 상하이 전투는 약 석 달 동안 이어지며 양측에 막대한 사상자를 낸 끝에 11월 중국군의 퇴각으로 끝났다.

일본군은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으로 진격했고, 난징은 1937년 12월 13일 함락되었다. 그 뒤에 벌어진 난징 대학살은 다음 절에서 다룬다. 중국 정부는 먼저 우한으로, 나중에는 창장강 상류 쓰촨의 충칭으로 옮겨 갔고, 충칭은 전시 수도가 되었다.

1938년 봄 중국군은 산둥의 타이얼좡에서 뚜렷한 승리를 거두어 일본군도 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일본은 계속 진격했다. 1938년 6월 국민당군은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려고 화위안커우 근처의 황허 제방을 터뜨렸는데, 이 홍수로 수십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죽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었다. 우한과 광저우는 1938년 10월에 함락되었다. 이 무렵 일본은 중국의 해안 대부분과 주요 도시·철도를 장악했지만, 중국은 항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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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난징 대학살

1937년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약 6주에 걸쳐 중국인 포로와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고, 광범위한 강간·약탈·방화를 저질렀다. 주변 농촌에서의 잔학 행위는 그보다 먼저 시작되어 1938년 초까지 이어졌다. 무장 해제된 병사와 병사로 의심받은 남성들이 대규모로, 흔히 창장강 가에서 총살·총검 등으로 처형되었다. 모든 연령대의 여성과 소녀가 강간당했고 그 뒤 살해된 경우도 많았다. 강간 피해는 약 2만 건이라는 추정이 가장 널리 인용되지만, 이보다 훨씬 많거나 적게 보는 추정도 있다.

도시에 남은 소수의 서양인, 곧 독일인 사업가 욘 라베, 미국인 선교사 미니 보트린 등은 난징 안전구를 조직했고, 2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이 이곳으로 피신했다. 이들의 일기·편지·보고서, 선교사 존 매기가 찍은 영상, 외국 기자들의 보도는 가장 중요한 당대 증거에 속한다. 일본 병사들의 진중 일기와 중국인 생존자의 증언도 증거를 더한다.

희생자 수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은 2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결론지었다. 1947년 난징 전범 재판은 30만 명 이상이라는 수치를 제시했고,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수치다. 많은 일본·서양 역사가는 지역·기간·희생자의 범위(예컨대 처형된 포로를 포함하는지)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수만 명에서 약 20만 명까지의 추정치를 내놓는다. 일부 일본 저술가는 학살 자체를 부정하지만, 이는 주류 역사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마쓰이 이와네 대장은 도쿄 재판 뒤, 다니 히사오 중장은 난징 재판 뒤 처형되었다. 난징에서 부대를 지휘한 황족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끝내 기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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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939–1945: 교착, 세계대전, 그리고 종전

1939년부터 전쟁은 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본은 동부의 도시와 철도를 장악했지만 광대한 내륙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충칭을 거듭 폭격해 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중국군은 여러 차례의 창사 전투에서 도시를 지켜 냈다. 1940년 공산당 팔로군은 화북의 일본군 철도와 거점을 공격한 백단대전을 벌였다. 일본은 공산당 근거지에 잔혹한 ‘소탕’ 작전으로 맞섰고, 중국에서는 이를 ‘삼광 정책’(모두 죽이고, 모두 태우고, 모두 빼앗는다)이라 불렀다. 이 작전으로 수많은 마을이 초토화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중국은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고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1943년 영국과 미국은 중국에서의 치외법권을 포기했고, 같은 해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는 루스벨트·처칠과 만났다. 카이로 선언은 만주·타이완 등 중국에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고,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중국군은 버마에서 영국·미국군과 함께 싸우기도 했다.

1944년 일본은 중국을 가로지르는 육상 통로를 확보하고 미국 공군 기지를 파괴하려고 전쟁 중 최대 규모의 공세인 이치고 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국민당군에 큰 패배를 안기고 장제스 정부를 약하게 만들었다. 종전은 바깥에서 왔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소련은 8월 9일 만주를 침공했다.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이 항복을 발표했고, 9월 2일 도쿄만에서 항복 문서가 조인되었으며, 중국 주둔 일본군은 1945년 9월 9일 난징에서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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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사상자와 민간인의 고통

사상자 수는 불확실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하다. 1937–1945년 중국인 사망자(군인·민간인) 추정치는 흔히 약 1,400만 명에서 2,000만 명 이상에 이른다. 중국 정부는 1931–1945년 사상자(사망·부상)를 3,500만 명으로 발표했다. 국민당군 기록에는 130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올라 있고, 공산당군도 수십만 명의 손실을 보고했다. 중국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는 약 45만–70만 명으로 추정된다. 많은 죽음은 전투가 아니라 기근·질병·피란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쟁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피란민 위기를 낳았다. 집을 떠난 중국인 수는 흔히 8,000만–1억 명으로 추정된다. 1938년 의도적인 황허 제방 파괴로 일어난 홍수의 사망자는 약 40만–90만 명으로 추정된다. 전쟁과 징발, 정부의 실정이 겹친 1942–1943년 허난 대기근으로는 약 100만–3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난징 밖에서도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하얼빈 근처의 731부대는 치명적인 인체 실험을 하고 생물 무기를 개발해 중국의 도시와 마을에 사용했다. 일본은 화학 무기도 썼다. 일본군은 ‘위안소’ 제도를 만들어 한국·중국·타이완·필리핀·인도네시아 등지의 여성과 소녀를 성노예로 삼았다. 한국 여성은 가장 큰 피해 집단 가운데 하나였지만, 정확한 수는 알 수 없고 추정치는 수만 명에서 그보다 훨씬 많은 수까지 다양하다. 수백만 명의 중국인도 중국과 일본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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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과 중일 전쟁

한국은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였고, 중일 전쟁은 식민지 조선의 삶을 크게 바꾸었다. 일본은 조선을 전쟁의 병참 기지로 삼고, 조선인을 충성스러운 ‘황국 신민’으로 만들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폈다. 조선인은 ‘황국 신민 서사’를 외우고 신사를 참배해야 했으며, 조선어 교육은 축소되었고, 1940년부터는 일본식 성명을 쓰라는 창씨개명이 강요되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조선에도 적용되었고, 1939년부터 수십만 명의 조선인이 흔히 강제적인 방식으로 일본·조선 등지의 광산·공장·토목 현장에 동원되었다. 일본은 1938년 육군 특별지원병 제도를, 1944년에는 징병제를 시행했다. 많은 한국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피해자가 되었다.

같은 시기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에서 투쟁을 이어 갔다.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뒤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일본군이 진격할 때마다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다가 1940년 충칭에 자리 잡았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대일 선전 성명을 발표했다.

또 다른 무장 조직인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한커우(우한)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창설되었다. 대원 상당수는 뒤에 화북의 공산당 지역으로 옮겨 가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고, 남은 대원들은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광복군은 1943년 인도·버마 전선에 공작대를 보내 영국군과 협력했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훈련하며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지만,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실행 직전에 무산되었다. 광복 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대한민국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나라의 뿌리로 기려지며,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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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결과와 영향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 제국은 끝났다. 타이완은 중국에 반환되었고, 한국은 광복을 맞았지만 38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의 점령 지역으로 나뉘었으며, 일본은 연합국의 점령을 받았다. 도쿄 재판(1946–1948)과 중국 등지의 재판에서 일본 지도자와 군인들이 전쟁 범죄로 처벌받았지만, 황족과 731부대 지휘부 같은 핵심 인물 일부는 재판을 받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전쟁으로 국민정부가 군사적 손실과 인플레이션, 부패로 지쳐 버린 반면, 공산당은 일본군 후방에서 군대와 지역을 넓혔다. 1946년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고,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으며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물러났다. 많은 역사가는 항일 전쟁을 이 결과를 가른 결정적 요인으로 본다.

전쟁에서의 역할로 중국의 국제적 지위도 높아져, 중화민국은 새로 생긴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교는 1972년에야 정상화되었다. 사과·배상·교과서·추모를 둘러싼 문제는 그 뒤로도 중국·한국·일본 사이 긴장의 원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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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나라마다 다른 기억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항일 전쟁은 국가적 기억과 애국주의 교육의 중심에 있다. 수십 년 동안 공산당은 자신의 유격전을 강조하고 국민당의 역할을 축소했지만, 1980년대 이후 국민당군의 기여도 더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은 1985년에 문을 열었고, 2014년 중국은 9월 3일을 항전 승리 기념일로, 12월 13일을 난징 대학살 희생자 국가 추모일로 정했다. 2017년에는 교과서에 1931년부터의 ‘14년 항전’으로 서술하도록 했다. 타이완에서는 국민당 전통이 오랫동안 장제스의 지도력을 항전의 핵심으로 내세웠지만, 많은 타이완 가족은 일본의 신민으로서 전쟁을 겪었다.

일본의 기억은 갈라져 있다. 많은 일본인은 공습과 원폭 같은 자신들의 고통을 중심으로 전쟁을 기억한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담화 등 공식 담화는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 한편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정치인들의 참배, 그리고 정부의 교과서 검정에 맞선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의 오랜 소송 같은 교과서 논쟁은 계속되는 갈등을 보여 준다. 일부 민족주의 단체는 난징 대학살과 ‘위안부’ 강제성을 축소하거나 부정하지만, 많은 일본 역사가와 시민이 이 범죄들을 조사하고 기록해 왔다.

한국에서 이 전쟁은 식민지 시기와 해방 투쟁의 일부로 기억되며, 8월 15일 광복절에 기념된다. 강제 동원 노동자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은 한일 관계의 주요 쟁점으로 남아 있다. 한국 안에서 논란이 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2018년 이후의 강제 동원 배상 판결 등이 그 예다. 서양에서 중국 전선은 오랫동안 제2차 세계대전의 ‘잊힌’ 부분이었으나, 1997년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과 이후의 연구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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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차 사료

이 전쟁의 사료는 방대하지만 고르지 않다. 일본 군·정부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만, 1945년 8월 항복 결정부터 연합군 도착까지 사이에 상당수가 의도적으로 소각되어 잔학 행위와 ‘위안부’ 제도 연구를 어렵게 한다. 국민정부 문서는 주로 타이베이의 국사관과 난징의 중국 제2역사당안관에 있다. 2000년대에 후버 연구소에서 연구자에게 공개된 장제스 일기는 그의 결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공산당 기록은 접근이 더 어렵다.

난징 대학살에 관한 가장 중요한 당대 사료로는 욘 라베의 일기, 미니 보트린의 일기, 안전구 위원회 기록, 기자 틸먼 더딘과 아치볼드 스틸의 보도, 존 매기의 영상, 홍만자회 같은 자선 단체의 매장 기록, 일본 병사들의 일기와 전후 증언, 전후에 수집된 생존자 증언이 있다. 도쿄 재판과 난징 재판 기록에도 많은 증거가 있지만, 법정이라는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 관련 사료로는 임시정부의 기록과 간행물, 한국광복군 문서와 OSS 문서, 동원에 관한 조선총독부 통계, 강제 동원 노동자와 ‘위안부’ 생존자의 구술이 있다. 생존자 상당수는 1991년 김학순의 공개 증언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야 공개적으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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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역사 서술과 논쟁

난징의 희생자 수는 이 전쟁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숫자 문제가 되었다. 일본 역사학계는 흔히 세 갈래로 설명된다. 10만 명 이상에서 20만 명 안팎 또는 그 이상을 인정하는 ‘대학살파’(호라 도미오, 후지와라 아키라, 가사하라 도쿠시 등), 약 4만 명으로 추정한 하타 이쿠히코 같은 ‘중간파’, 그리고 ‘환상파’ 또는 부정론이다. 중국 학자들은 대체로 30만 명이라는 수치를 지지한다. 2010년 보고서가 나온 중일 역사 공동 연구에서는 일본 측 학자들의 추정이 2만–20만 명, 중국 측 수치가 30만 명 이상으로 기록되었다. 차이는 지리적·시간적 범위, 처형된 포로를 어떻게 다루는지, 매장 기록과 증언의 신뢰성, 전쟁 전 도시 인구 추정에서 생긴다. 그러나 대규모 잔학 행위가 있었다는 점에는 역사가들이 폭넓게 동의한다. 조슈아 포겔이 엮은 책(2000)과 다카시 요시다의 연구는 이 학살이 중국·일본·미국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논쟁되었는지를 살핀다.

두 번째 논쟁은 누가 전쟁을 치렀느냐는 것이다. 래나 미터의 『잊힌 동맹』(Forgotten Ally, 2013)과 한스 판더벤 등의 연구는 국민당이 정규전의 무게를 대부분 짊어졌고, 중국의 오랜 항전이 대규모 일본군을 붙잡아 두었다고 주장한다. 이 기여는 서양에서,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과소평가되었다. 시기 구분도 논쟁거리다. 중국 공식 역사의 ‘14년 항전’(1931–1945)은 만주 사변부터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반면, 많은 국제 역사가는 여전히 1937년을 전면전의 시작으로 본다.

한국사 연구자들은 강제 동원의 규모와 성격, 협력과 저항의 문제,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문제 등 전쟁이 식민지 사회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다. ‘위안부’와 강제 동원 노동자의 강제성을 둘러싼 논쟁은 학계와 정치 양쪽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생존자 증언, 요시미 요시아키 같은 역사가가 찾아낸 일본군 문서, 일본 정부가 군의 관여를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가 논의의 중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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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 (40)

  1. 만주사변1931년
  2. 만주국 치안숙정1931–1941년
  3. 731부대1933년
  4. 난징 대학살1937–1938년
  5. 루거우차오 사건1937년
  6. 상하이 전투1937년
  7. 난징 전투1937년
  8. USS 파나이 사건1937년
  9. 타이위안 전투1937년
  10. 핑싱관 전투1937년
  11. 신커우 전투1937년
  12. 사행창고 전투1937년
  13. 광안먼 사건1937년
  14. 우한 전투1938년
  15. 타이얼좡 전투1938년
  16. 쉬저우 전투1938년
  17. 충칭 대공습1938–1943년
  18. 광저우 작전1938년
  19. 아모이 작전1938년
  20. 창사 전투 (1939년)1939년
  21. 난창 전투1939년
  22. 남광시 전투1939–1940년
  23. 수조 전투1939년
  24. 백단대전1940년
  25. 짜오양-이창 전투1940년
  26. 우위안 전투1940년
  27. 창사 전투1941년
  28. 상가오 전투1941년
  29. 남허난 전투1941년
  30. 중탸오산 전투1941년
  31. 창사 전투1942년
  32. 윈난-버마 도로 전투1942년
  33. 예난자웅 전투1942년
  34. 쓰촨 침공 계획1942년
  35. 타웅우 전투1942년
  36. 창더 전투1943년
  37. 창자오 학살1943년
  38. 서후베이 전투1943년
  39. 북버마와 서윈난 전투1943–1945년
  40. 구이린-류저우 전투1944년

핵심 개념

침략 전쟁
일본의 침공은 중국을 지배하고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으며, 도쿄 재판은 이를 침략 전쟁으로 판단했다.
버티기로 싸운 항전
중국은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얻는’ 전략으로 정부를 내륙으로 옮기고, 막대한 손실에도 항복하지 않았다.
잔학 행위와 기억
난징 대학살, 731부대, ‘위안부’ 제도는 이 전쟁을 기억하고 논쟁하는 방식의 중심에 있다.
민간인의 재앙
폭격·학살·홍수·기근·피란으로 희생자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식민지 동원
한국과 타이완은 강제 동화, 노동력 동원, 징병을 통해 일본의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
한국 독립 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중국에서 한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다.
세계대전에서 내전으로
전쟁은 국민당을 약하게 하고 공산당을 강하게 해 국공 내전의 결과를 좌우했다.

기록

  1. 1931년 — 9월 18일 만주 사변,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다.
  2. 1932년 — 만주국 수립,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4월).
  3. 1936년 — 시안 사건으로 국공 통일전선의 길이 열린다.
  4. 1937년 — 루거우차오 사건(7월 7일), 상하이 전투, 난징 함락(12월 13일)과 대학살 시작.
  5. 1938년 — 타이얼좡 승리, 황허 제방 파괴, 조선의용대 창설, 우한·광저우 함락.
  6. 1940년 — 난징에 왕징웨이 정권 수립,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9월 17일), 백단대전.
  7. 1941년 — 신사군 사건(1월), 진주만 공격(12월 7일), 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
  8. 1943년 — 카이로 선언, 만주·타이완 반환과 ‘적당한 시기’의 한국 독립을 약속.
  9. 1944년 — 일본의 이치고 작전, 조선에서 징병제 시행.
  10. 1945년 — 원폭 투하와 소련의 만주 침공(8월), 일본 항복(8월 15일), 난징 항복 조인(9월 9일).
  11. 1946년 — 도쿄 재판 개정(1948년까지), 국공 내전 재개.

용어 풀이

국민당
장제스의 지도 아래 중화민국을 통치한 정당.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이 이끌며 주로 유격전으로 일본과 싸웠고 1949년 내전에서 이긴 정당.
통일전선(국공 합작)
일본에 맞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맺은 전시 협력 관계.
만주국
1932년 일본이 중국 동북부에 세운 괴뢰국.
괴뢰 정권
난징의 왕징웨이 정권처럼 점령국에 협력한 정부.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의 성노예로 강제 동원된 여성과 소녀를 가리키는 말. ‘위안부’는 당시 일본군의 완곡어다.
황국 신민화 정책
식민지 주민에게 일본어·일본식 이름·신사 참배를 강요한 일본의 동화 정책.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되어 1940년부터 충칭에 자리한 한국의 망명 정부.
한국광복군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도쿄 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1946–1948년 일본 지도자들을 전쟁 범죄로 심판한 국제 군사 재판.

묻고 답하기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1931년 만주 점령 등 일본의 팽창이 몇 년 동안 이어진 끝에,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처 루거우차오에서 일어난 일본군과 중국군의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졌어요.

난징 대학살은 무엇인가요?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몇 주 동안 수많은 포로와 민간인을 죽이고, 대규모 강간과 약탈을 저지른 사건이에요. 이 전쟁에서 가장 끔찍한 잔학 행위 가운데 하나예요.

난징 희생자 수는 왜 서로 다르게 말하나요?

기록이 부족하고, 지역·기간·희생자의 범위를 다르게 정하기 때문이에요. 전후 재판은 20만 명 이상, 30만 명 이상으로 판단했고, 많은 역사가는 수만 명에서 약 20만 명까지로 추정해요. 학살이 있었다는 점에는 주류 역사가들이 동의해요.

전쟁 동안 한국인들은 어떻게 지냈나요?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이 일본을 위해 강제로 일하거나 싸워야 했고, 한국 여성들은 성노예로 끌려갔어요. 동시에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일본과 싸웠어요.

중국은 혼자 싸웠나요?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중국은 소련 등의 도움을 조금 받았지만 거의 혼자 싸웠어요. 진주만 공격 뒤에는 미국·영국·소련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어요.

전쟁은 1931년에 시작됐나요, 1937년에 시작됐나요?

전면전은 1937년에 시작되었지만, 중국 공식 역사는 1931년 만주 사변부터 ‘14년 항전’으로 봐요. 역사가들은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두 연도를 모두 써요.

왜 이 전쟁이 지금도 갈등의 원인이 되나요?

사과, ‘위안부’와 강제 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교과서, 야스쿠니 신사 같은 추모 시설을 둘러싼 논쟁이 중국·한국·일본의 관계에 계속 영향을 주기 때문이에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요?

정확한 숫자는 없어요. 중국인 사망자는 흔히 1,400만–2,0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그 대부분이 민간인이에요. 중국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는 약 50만 명 이상이에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Second Sino-Japanese War. Wikipedia
  2. Nanjing Massacre. Wikipedia
  3. Nanjing Massacre denial. Wikipedia
  4. Comfort women. Wikipedia
  5. Korean Liberation Army. Wikipedia
  6. 한국광복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7. 조선의용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8. 조선인 강제동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9. Rana Mitter, Forgotten Ally: China's World War II, 1937–1945.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3
  10. Joshua A. Fogel (ed.), The Nanjing Massacre in History and Historiograph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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