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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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70년 전, 영국의 무역 회사인 동인도 회사가 인도 대부분을 다스렸어요. 이 회사는 자기 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병사 대부분은 ‘세포이’라고 불린 인도 사람들이었어요. 많은 인도 사람은 회사가 자기들의 땅과 나라, 자존심을 빼앗고 있다고 느꼈어요.
1857년, 병사들에게 새 총알 꾸러미(탄약포)가 지급되었어요. 그런데 탄약포에 소와 돼지 기름이 발라져 있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이걸 이로 물어뜯으면, 소를 신성하게 여기는 힌두교도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교도 모두의 종교 규칙을 어기게 되지요. 병사들은 영국인이 자기들의 신앙을 무시한다고 느꼈어요.
1857년 5월, 메러트라는 도시의 병사들이 들고일어났어요. 그들은 델리로 달려가 늙은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에게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했어요. 곧 인도 북부의 병사와 왕, 왕비, 농민들이 봉기에 함께했어요.
싸움은 양쪽 모두 몹시 잔인했어요. 봉기군은 몇몇 곳에서 영국인 남자와 여자, 아이들을 죽였고, 영국군은 끔찍한 보복을 했어요. 마을을 불태우고 수많은 인도 사람을 재판도 없이 죽였지요.
1858년 영국이 이겼어요.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없애고 빅토리아 여왕의 정부가 인도를 직접 다스렸어요. 오랜 세월이 지나 인도의 독립운동가들은 1857년을 자유를 위한 첫 번째 큰 싸움으로 기억했어요.
한눈에 보기
- 기간
- 1857년 5월 10일(메러트 봉기, 2–3월에 전조 사건) – 1858년(주요 전투). 1859년 7월 8일 공식 평정 선언
- 장소
- 주로 갠지스강 상류 평원과 중부 인도: 델리, 메러트, 아와드(오우드)와 러크나우, 칸푸르(카운포어), 잔시, 괄리오르, 비하르 일부. 펀자브·벵골·남인도 대부분은 전투가 적었음
- 교전 세력
- 벵골군의 봉기 연대, 여러 왕족·지주, 농촌·도시 민중 대 동인도 회사, 영국 정규군, 충성을 지킨 인도인 부대(특히 시크·펀자브·구르카 부대)와 동맹 번왕국
- 주요 인물
- 봉기 측: 바하두르 샤 2세(자파르), 나나 사히브, 잔시의 라니 락슈미바이, 탄티아 토페, 베굼 하즈라트 마할, 쿤와르 싱, 마울비 아흐마둘라 샤. 영국 측: 캐닝 총독, 콜린 캠벨, 헨리 해블록, 휴 로즈
- 결과
- 영국 승리. 동인도 회사 폐지, 인도는 영국 왕실 직할이 됨(1858년 인도 통치법). 무굴 왕조 종말
- 희생
- 영국인 약 6,000명(민간인 포함). 인도인 사망자는 훨씬 많고 불확실함. 기근·질병 포함 80만 명 이상이라는 추정이 널리 인용되며, 그보다 큰 수치는 논란 중
- 명칭
- 이름부터 논쟁적이다. ‘세포이의 반란(Mutiny)’(옛 영국식), ‘대반란·봉기’(학계에서 흔함), ‘제1차 독립 전쟁’(인도에서 흔함). 한국 교과서에서는 주로 ‘세포이 항쟁’
쉬움
1857년 봉기란 무엇인가
1857–1858년 인도에서 일어난 거대한 봉기는 영국의 인도 지배를 뿌리째 흔들었다. 처음에는 남아시아 대부분을 다스리게 된 영국 무역 회사, 동인도 회사의 군대에 속한 인도인 병사(세포이)들의 반란이었다. 그러나 곧 인도 북부와 중부 곳곳에서 왕족, 지주, 종교 지도자, 농민, 도시민이 무기를 든 폭넓은 봉기로 커졌다.
한동안 봉기군은 옛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와 갠지스 평원의 넓은 지역을 장악했다. 영국과 그 인도인 동맹 세력은 본국의 증원군과 충성을 지킨 부대로 반격해, 1857년 9월 델리, 1858년 3월 러크나우, 1858년 중반까지 중부 인도의 봉기 거점을 되찾았다.
이 봉기로 동인도 회사의 통치는 끝났다. 1858년 영국 의회는 인도 통치권을 왕실로 넘겼고, 이로써 1947년까지 이어진 ‘영국령 인도(브리티시 라지)’ 시대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무굴 황제는 유배되었고, 1526년부터 인도를 다스려 온 왕조가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무엇이라고 부를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영국 저술가들은 오랫동안 병사들의 명령 불복종을 강조해 ‘인도 반란(Indian Mutiny)’이라고 불렀다. 많은 인도인은 외세 지배에 대한 저항을 강조해 ‘제1차 독립 전쟁’이라고 부른다. 많은 역사학자는 하나의 민족 운동이었다고 전제하지 않으면서 군사적·민간적 측면을 모두 담기 위해 ‘대봉기’ 또는 ‘반란’이라는 말을 쓴다. 한국에서는 흔히 ‘세포이 항쟁’이라고 한다.
쉬움
왜 일어났을까: 배경과 원인
동인도 회사는 무역 회사로 출발했지만, 1757년 플라시 전투 뒤 먼저 벵골에서, 이어 인도 아대륙 전역에서 영토를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다. 1850년대에는 직접 또는 종속된 번왕(藩王)을 통해 남아시아 거의 전부를 다스리며 지세(地稅)를 걷고, 주로 인도인 병사로 이루어진 대군을 유지했다.
영토 병합은 많은 통치자를 분노하게 했다. 댈하우지 총독(재임 1848–1856)은 ‘실권 원칙(失權原則, doctrine of lapse)’을 내세워, 친아들 없이 죽은 통치자의 나라는 양자를 인정하지 않고 병합했다. 1853년 잔시, 1854년 나그푸르가 그렇게 병합되었다. 1856년 2월에는 실정(失政)을 이유로 큰 왕국 아와드(오우드)를 병합했다. 마라타 동맹의 마지막 페슈와의 양자 나나 사히브는 양아버지의 연금을 받지 못했다. 이런 결정은 왕족 가문과 그 가신들의 지위를 위협했다.
농촌 사회도 흔들렸다. 새로운 지세 사정(査定), 특히 1856년 이후 아와드의 조치로 많은 대지주(탈루크다르)가 영지를 잃었고, 무거운 지세 때문에 빚더미에 앉는 농민도 생겼다. 벵골군 세포이 상당수가 아와드와 비하르의 높은 카스트 출신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불만은 곧바로 군대로 이어졌다.
병사들에게는 따로 불만이 있었다. 승진 기회는 제한되었고 수당은 깎였으며, 1856년 일반 복무 징병법은 신병에게 해외 복무를 요구했는데, 많은 상층 카스트 힌두교도는 바다를 건너면 카스트 규범을 어긴다고 믿었다. 선교 활동, 과부 재혼 합법화(1856) 같은 개혁, 서양식 제도의 도입은 영국이 인도의 종교를 무너뜨리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는 두려움을 키웠다. 기름 바른 탄약포에 관한 소문이 이 두려움에 불을 붙였다.
쉬움
봉기의 시작: 탄약포, 메러트, 델리
새로 도입된 1853년식 엔필드 소총은 종이 탄약포를 찢어 장전했는데, 관례상 이로 물어뜯었다. 1857년 초 벵골군 사이에 탄약포에 바른 기름에 소기름이나 돼지기름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힌두교도에게 소는 신성하고 이슬람교도에게 돼지고기는 금기이므로, 탄약포를 무는 일은 두 신앙 모두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국은 장전 방식을 바꾸고 병사들이 직접 기름을 바르게 했지만, 이미 신뢰는 무너진 뒤였다. 같은 무렵 인도 북부에서는 정체 모를 차파티(납작한 빵)가 마을에서 마을로 전달되는 일이 벌어져 영국 관리들을 불안하게 했는데, 그 의미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1857년 3월 콜카타 근처 바락푸르에서 세포이 망갈 판데이가 장교들을 공격했다가 교수형을 당했다. 델리 근처 메러트에서는 탄약포를 거부한 벵골 경기병 제3연대 기병 85명이 장기 징역형을 받고 5월 9일 공개적으로 족쇄를 찼다. 이튿날인 5월 10일 저녁 동료들이 들고일어나 그들을 풀어 주고 영국인 장교와 민간인 여럿을 죽인 뒤, 밤새 말을 달려 델리로 향했다.
5월 11일 봉기군이 델리에 들어가자 시내에 주둔하던 연대들도 합류했다. 시내의 유럽인과 인도인 기독교도 상당수가 살해되었다. 세포이들은 붉은 성(레드 포트)으로 가서, 궁 밖으로는 실권이 거의 없던 82세의 시인 황제 바하두르 샤 2세(자파르)에게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청했고, 황제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무굴 황제를 내세움으로써 봉기군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가 인정하던 정통성을 얻었다.
이후 몇 주 동안 갠지스 평원과 중부 인도에서 벵골군 연대가 잇달아 봉기했다. 벵골 정규 보병 74개 연대 가운데 과반이 봉기하거나 무장 해제되었다. 많은 곳에서 민간 봉기가 뒤따랐다. 지방 통치자들이 권력을 되찾았고, 농민들은 대금업자와 관청을 습격했으며, 정부 기록이 불태워졌다.
중급
전쟁의 경과: 델리, 칸푸르, 러크나우, 중부 인도
델리(1857년 5–9월). 영국군은 6월부터 델리 북쪽 능선(리지)에 진을 쳤지만, 처음에는 공격할 힘이 없었다. 도시 안에서는 황제의 궁정과 병사 회의가 이끄는 봉기 정부가 돈과 식량 부족, 세포이·궁정 관리·시민 사이의 갈등에 시달렸다. 시크·펀자브 부대 등 펀자브에서 온 증원군으로 힘을 얻은 영국군은 9월 14일 델리를 공격해 일주일간의 시가전 끝에 점령했다. 도시는 약탈당했고 많은 주민이 죽거나 쫓겨났으며, 영국 장교 윌리엄 호드슨은 항복한 무굴 왕자 세 명을 총살했다.
칸푸르(1857년 6–7월). 칸푸르(카운포어)에서는 휴 휠러 장군이 이끄는 영국 수비대와 많은 민간인이 6월 5일부터 포위되었다. 6월 25일 이들은 강을 따라 알라하바드로 안전하게 보내 주겠다는 나나 사히브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6월 27일 사티차우라 가트에서 배에 오르던 중 총격이 시작되어 남자 대부분이 죽었다. 살아남은 여성과 아이 약 200명은 ‘비비가르’라는 집에 갇혀 있다가, 영국 구원군이 다가오던 7월 15일 살해되었다. 나나 사히브가 이 학살을 직접 명령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비비가르 학살은 영국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제임스 닐 준장 등이 이끄는 영국군은 혐의자들을 재판 없이 교수형에 처하는 잔혹한 보복을 벌였다.
러크나우(1857년 6월–1858년 3월). 아와드의 수도 러크나우에서는 영국군과 충성을 지킨 인도인 병사, 많은 민간인이 6월 말부터 요새화된 레지던시(영국 주재관 관저) 구역에서 버텼다. 지휘관 헨리 로런스는 포위 초기에 전사했다. 헨리 해블록과 제임스 아우트럼의 구원군이 9월 25일 진입했지만 오히려 함께 포위되었고, 11월 콜린 캠벨이 수비대를 구출해 철수시켰다. 아와드는 가장 폭넓은 민중 봉기의 중심지가 되었다. 어린 아들을 대신한 베굼 하즈라트 마할, 탈루크다르들, 종교 지도자 마울비 아흐마둘라 샤가 봉기를 이끌었다. 캠벨은 1858년 3월 러크나우를 되찾았지만, 농촌에서는 게릴라 저항이 계속되었다.
중부 인도와 종결(1858–1859). 휴 로즈의 중부 인도 야전군은 1858년 4월 잔시를 함락했다. 라니 락슈미바이는 탈출해 탄티아 토페와 합류해 괄리오르를 점령했으나, 1858년 6월 괄리오르 근처 전투에서 전사했다. 비하르에서는 늙은 지주 쿤와르 싱이 1858년 4월 숨질 때까지 싸웠다. 탄티아 토페는 오랜 게릴라전을 벌이다 배신당해 붙잡혀 1859년 4월 교수형을 당했다. 나나 사히브는 아마도 네팔로 사라졌다. 1858년 11월 1일 빅토리아 여왕의 선언은 대부분의 봉기 참가자에게 사면을 약속했고, 1859년 7월 8일 공식적으로 평정이 선언되었다.
중급
누가 어느 편에서 싸웠나
봉기 세력은 다양했다. 중심에는 무기와 조직을 갖춘 훈련된 병사, 곧 벵골군의 봉기 연대가 있었다. 잔시의 라니와 나나 사히브 같은 왕족과 그 가신, 아와드의 탈루크다르와 지주, 성전을 외친 종교 지도자, 저마다의 불만을 품은 농민과 도시민이 함께 싸웠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모두 참여했고, 봉기 측 선언문은 두 공동체에 함께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봉기군은 끝내 단일 지휘 체계를 만들지 못했다. 델리·러크나우·칸푸르·잔시 등 각 중심지는 제각기 목표를 추구했고, 많은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잃은 지위를 되찾는 일이었다. 이를 약점으로 보는 역사학자도 있지만, 봉기가 지역에 뿌리를 두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근대 민족 운동의 기준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영국 쪽도 상당 부분 인도인이었다. 마드라스·봄베이 관구의 군대는 대체로 충성을 지켰다. 얼마 전 정복된 펀자브에서 새로 모집한 시크·펀자브·파탄 병사들은 무굴 제국의 부활이나, 자기들을 정복하는 데 앞장섰던 벵골 세포이에게 공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델리 탈환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구르카 연대와 네팔의 정 바하두르 라나가 보낸 군대는 아와드에서 싸웠다. 하이데라바드·카슈미르 같은 주요 번왕국은 영국 편에 섰고, 괄리오르의 통치자는 자기 군대가 봉기에 가담했는데도 영국을 지지했다.
영국 본국, 크림반도, 그리고 원래 중국으로 향하던 부대에서 증원군이 왔다. 전신과 강·도로의 장악, 조용했던 지방에서 걷는 세수가 한 지역에 집중된 봉기에 대해 영국에 결정적인 우위를 주었다.
중급
폭력, 민간인, 그리고 인명 피해
이 전쟁에서는 양쪽 모두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봉기군은 메러트·델리·잔시·칸푸르 등지에서 영국인 장교와 그 가족, 인도인 기독교도 등 회사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였다. 특히 칸푸르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살해된 일은 영국 대중이 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중심이 되었다. 영국인 여성이 대규모로 강간당했다는 보도가 영국에 널리 퍼졌으나, 뒤의 조사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보도는 복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부추겼다.
영국의 보복은 훨씬 큰 규모였다. 갠지스강을 따라 진군하던 부대들은 봉기에 동조했다고 의심되는 마을 사람들을 목매달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붙잡은 세포이를 교수형에 처하거나 대포 포구에 묶어 쏘아 처형했다. 델리 주민들은 쫓겨났고 건물 다수가 파괴되었으며, 특히 이슬람교도가 집단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 무차별 처벌을 자제시키려 한 캐닝 총독은 영국에서 ‘관용의 캐닝(Clemency Canning)’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영국인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6,000명이 죽었다. 인도인 사망자는 훨씬 많았지만 집계된 적이 없다. 전쟁으로 인한 기근과 전염병 사망자를 포함해 약 80만 명 이상이라는 추정이 널리 인용되며, 그보다 훨씬 많게 보는 주장도 있으나 다른 역사학자들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 정확한 수가 얼마이든 희생자 대부분은 인도인 병사와 민간인이었다.
중급
결과: 동인도 회사의 종말과 영국령 인도의 시작
1858년 8월의 인도 통치법(Government of India Act)은 동인도 회사의 통치를 끝내고 그 권한을 왕실로 넘겼다. 런던의 인도 담당 국무장관이 인도 평의회의 자문을 받아 통치를 맡았고, 총독은 왕실을 대리하는 부왕(副王, Viceroy)을 겸하게 되었다. 1858년 11월 1일 빅토리아 여왕의 선언은 종교적 관용, 법 앞의 평등한 대우, 번왕들의 권리와 존엄 존중, 번왕국의 추가 병합 중단을 약속했다. 사실상 실권 원칙은 폐기되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1858년 영국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버마(미얀마)의 랑군(양곤)으로 유배되었고, 1862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와 함께 무굴 왕조는 끝났다. 상실을 노래한 그의 시는 델리 함락에 대한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군대도 재편되었다. 인도인 병사에 대한 영국인 병사의 비율을 높이고, 포병은 대부분 영국인에게 맡겼으며, 옛 벵골군의 상층 카스트 병사 대신 영국이 ‘전투 종족(martial races)’이라 부른 시크, 펀자브 무슬림, 파탄, 구르카를 주로 모집했다. 영국은 인도 사회에 대한 정책도 바꾸어, 아와드의 탈루크다르 같은 번왕·대지주와 손잡고 사회 개혁에는 더 신중해졌다.
장기적으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는 더 멀어지고 노골적으로 인종적이 되었다. 영국인은 더 분리된 공간에서 살았고, 많은 이들이 인도인을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 인도인 가운데 개혁가 사이이드 아흐마드 칸은 『인도 봉기의 원인(The Causes of the Indian Revolt)』(1859)을 써서 영국이 피지배자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했고, 뒤에 알리가르에 학교를 세웠다. 1857년의 기억은 훗날 민족 운동의 강력한 자원이 되었다.
심화
기억과 서술: 영국, 인도, 그리고 그 밖
영국.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인도 반란’을 배신과 영웅적 인내의 이야기로 기억했다. 러크나우 방어전, 구원군의 진격, 칸푸르의 희생자들이 그 중심이었다. 기념비와 그림, 시, 수많은 소설이 이 이야기를 퍼뜨렸다. 칸푸르의 비비가르 우물 위에는 카를로 마로케티가 조각한 대리석 천사상이 세워졌는데, 인도 독립 뒤 근처 교회 정원으로 옮겨졌다. 러크나우 레지던시의 영국 국기는 1947년까지 추모의 뜻으로 밤낮없이 게양되었다. 이 서사는 영국의 잔학 행위와 인도인의 동기를 대부분 지워 버렸다.
인도 민족주의. 1909년 사바르카르(V. D. Savarkar)는 『1857년 인도 독립 전쟁(The Indian War of Independence of 1857)』을 펴내 봉기를 계획된 민족 해방 전쟁으로 그렸고, 영국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이보다 앞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봉기에 관한 기사를 썼는데, 이 글들은 뒤에 소련에서 『제1차 인도 독립 전쟁』으로 묶여 나왔다. 라니 락슈미바이는 용기와 애국의 상징이 되어, 수바드라 쿠마리 차우한의 유명한 힌디어 시 「잔시의 라니」로 노래되었고, 1943년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은 여성 연대에 그녀의 이름을 붙였다.
독립 인도. 1957년 100주년을 맞아 인도 정부는 센(S. N. Sen)에게 공식 역사서 집필을 맡겼는데, 이 책은 1857년을 단순한 군대 반란 이상으로 보면서도 완전한 민족 전쟁으로 보는 데는 신중했다. 같은 해 역사학자 마줌다르(R. C. Majumdar)는 이것이 제1차 독립 전쟁도, 단순한 반란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2007년 150주년은 인도에서 국가적 행사로 기념되었다. 파키스탄에서도 1857년은 독립 전쟁으로 기억되며, 무슬림의 참여와 고통이 강조된다. 봉기의 책임을 무슬림에게 돌리던 영국의 경향은 이후 남아시아 무슬림 정치에 영향을 주었다.
논쟁적인 이름. 이름마다 관점이 담겨 있다. ‘반란(Mutiny)’은 군사적 불복종을 강조하며 영국 통치의 정당성을 전제하고, ‘제1차 독립 전쟁’은 후대의 민족주의를 1857년에 투영하며, ‘대봉기’·‘항쟁’은 하나의 해석에 묶이지 않고 그 폭을 담으려 한다. 이름을 둘러싼 논쟁 자체가 1857년이 기억되어 온 역사의 일부다.
심화
1차 사료와 연구사
영국 사료. 공문서, 군사 보고서, 의회 문서, 조사 과정에서 모은 증언이 풍부하다. 장교·병사·민간인, 특히 러크나우 생존자들의 편지·일기·회고록도 많다. 이 사료들은 풍부하지만 일방적이며, 상당수는 공포와 분노가 한창일 때 쓰였다. 존 케이와 맬러슨(G. B. Malleson)의 여러 권짜리 역사서(1864–1880)는 여러 세대에 걸쳐 빅토리아 시대의 이해를 형성했다.
인도 사료. 봉기 측 문서는 흔히 파기되었고 생존자들은 침묵할 이유가 있었기에, 인도인의 목소리는 되살리기 어렵다. 중요한 예외로는 인도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존된 델리 봉기 정부의 문서 수천 점인 이른바 ‘반란 문서(Mutiny Papers)’가 있으며, 윌리엄 달림플은 『최후의 무굴(The Last Mughal)』(2006)에서 이를 폭넓게 활용했다. 그 밖에 봉기 측 선언문, 바하두르 샤 2세의 재판 기록, 영국인 독자를 의식해 조심스럽게 쓴 시인 갈리브의 페르시아어 델리 포위 일기 『다스탄부이(Dastanbuy)』, 사이이드 아흐마드 칸의 『인도 봉기의 원인』 등이 있다.
연구사. 20세기 학자들은 ‘군대 반란인가 민족 전쟁인가’라는 물음에서 ‘누가 왜 봉기했는가’라는 물음으로 옮겨 갔다. 에릭 스토크스는 사후 출간된 『무장한 농민(The Peasant Armed)』(1986)에서 농촌 참여의 지역별 차이를 연구했다. 루드랑슈 무케르지의 『봉기하는 아와드(Awadh in Revolt)』(1984)는 아와드의 탈루크다르와 농민이 어떻게 회사에 맞서 하나가 되었는지 보여 주었다. 라나지트 구하로 시작된 서발턴 연구 학파는 농민의 자율적 정치를 강조했다. 킴 와그너(Kim Wagner)의 『1857년의 대공포(The Great Fear of 1857)』(2010) 같은 최근 연구는 소문과 공황을 다루며, 주요 전장 밖의 지역을 살피는 연구도 늘고 있다.
남은 질문들. 봉기가 얼마나 계획된 것이었는지, 종교와 물질적 불만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했는지, 어디까지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칸푸르 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인도인이 얼마나 죽었는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진다. 영국과 민족주의 양쪽의 서사가 워낙 큰 영향을 끼쳤기에, 최근 연구는 모든 편의 평범한 병사·농민·여성의 경험을 되살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주요 전투 (13)
핵심 개념
- 회사 통치
- 영토 지배 세력이 되어 자기 군대를 거느린 영국 무역 회사, 동인도 회사가 인도 대부분을 다스린 체제.
- 군대 반란에서 대봉기로
- 병사들의 반란으로 시작했지만, 저마다 불만을 품은 왕족·지주·농민이 가담해 폭넓은 봉기가 되었다.
- 정통성과 무굴 황제
- 봉기군은 바하두르 샤 2세를 지도자로 추대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가 인정하던 무굴 왕조의 권위를 끌어왔다.
- 병합과 실권 원칙
- 잔시·아와드 등을 병합한 회사의 정책은 왕족과 지주 가운데 강력한 적을 만들었다.
- 보복
- 영국의 진압은 대량 처형과 파괴를 동반해, 봉기군이 죽인 영국인보다 훨씬 많은 인도인을 죽였다.
- 왕실 직할 통치(라지)
- 1858년 이후 인도는 영국 왕실이 직접 다스렸고, 군대가 재편되었으며 번왕·지주와 새로운 동맹이 맺어졌다.
- 갈라진 기억
- 이 사건은 반란, 대봉기, 제1차 독립 전쟁으로 달리 기억되며, 이름마다 관점이 담겨 있다.
기록
- 1757년 — 플라시 전투. 동인도 회사가 벵골에서 영토 지배 세력이 됨.
- 1853년 — 왕이 죽은 뒤 잔시가 실권 원칙에 따라 병합됨.
- 1856년 — 2월 회사의 아와드 병합. 7월 일반 복무 징병법.
- 1857년 — 3월 29일 바락푸르에서 망갈 판데이의 공격. 5월 10일 메러트 봉기. 5월 11일 봉기군이 델리에 들어가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함.
- 1857년 — 6월 칸푸르·러크나우 포위 시작. 6월 27일 사티차우라 가트 학살. 7월 15일 칸푸르 비비가르 학살.
- 1857년 — 9월 14–20일 영국군의 델리 탈환. 9월 25일 러크나우 1차 구원. 11월 캠벨이 러크나우 레지던시를 철수시킴.
- 1858년 — 3월 러크나우 탈환. 4월 잔시 함락. 6월 라니 락슈미바이가 괄리오르 근처에서 전사함.
- 1858년 — 8월 인도 통치법. 11월 1일 빅토리아 여왕의 선언. 바하두르 샤 2세가 랑군으로 유배됨.
- 1859년 — 4월 탄티아 토페 처형. 7월 8일 공식 평정 선언.
- 1862년 — 바하두르 샤 2세가 유배지 랑군에서 사망함.
- 1909년 — 사바르카르가 『1857년 인도 독립 전쟁』을 펴냄.
- 1957년 — 100주년. 센의 공식 역사서 간행과 ‘민족 전쟁’ 여부를 둘러싼 논쟁.
용어 풀이
- 세포이
- 동인도 회사 군대의 인도인 병사. ‘병사’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시파히’에서 왔다.
- 동인도 회사
- 1600년에 세워져 남아시아 대부분을 다스리게 된 잉글랜드(뒤에 영국)의 무역 회사.
- 벵골군
- 회사의 세 관구 군대 가운데 가장 큰 군대로, 봉기가 시작된 곳.
- 실권 원칙(doctrine of lapse)
- 친아들 후계자 없이 죽은 통치자의 나라를 병합한 회사의 정책.
- 아와드(오우드)
- 1856년 병합된 갠지스 평원의 왕국. 수도 러크나우는 봉기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 탈루크다르
- 아와드에서 여러 마을의 지세를 걷던 대지주.
- 라지(Raj)
- ‘통치’라는 뜻. 1858–1947년 영국 왕실의 인도 직할 통치 시기를 가리킨다.
- 부왕(Viceroy)
- 1858년 이후 왕실을 대리한 인도 총독의 칭호.
- 무굴 제국
- 1526년부터 남아시아 대부분을 다스린 왕조. 1857년에는 황제가 델리에서 상징적 권위만 지녔다.
- 전투 종족(martial races)
- 특정 집단이 타고난 군인이라는 영국 식민 당국의 관념. 1857년 이후 수십 년간 병사 모집을 좌우했다.
묻고 답하기
기름 바른 탄약포가 뭐였나요?
병사들이 보통 이로 물어뜯어 여는 새 총알 꾸러미였어요. 소와 돼지 기름을 발랐다는 소문이 돌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 분노했지요. 이것은 봉기의 불씨였지,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어요.
군대 반란이었나요, 독립 전쟁이었나요?
군대 반란으로 시작했지만 많은 민간인이 가담한 폭넓은 봉기가 되었어요. ‘민족’ 독립 전쟁이었는지는 논쟁 중이에요. 많은 봉기 참가자는 지방 통치자나 자기 권리를 되찾으려고 싸웠고, 하나의 지도부도 없었거든요.
라니 락슈미바이는 누구인가요?
남편이 죽은 뒤 나라를 병합당한 잔시의 왕비예요. 봉기에 가담해 영국군과 싸우다 1858년 괄리오르 근처에서 전사했고,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영웅 가운데 한 명이 되었어요.
칸푸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1857년 6월 포위된 영국 수비대가 안전한 철수를 약속받고 항복했지만 강가에서 공격을 받았어요. 뒤에 붙잡혀 있던 영국인 여성과 아이 약 200명이 살해되었지요. 이후 영국군은 그 지역 주민에게 잔혹한 복수를 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요?
영국인은 약 6,000명이에요. 인도인 사망자는 집계된 적이 없지만 훨씬 많았어요. 기근과 질병을 포함해 약 80만 명 이상이라는 추정이 널리 인용되고, 더 큰 수치도 제기되었지만 논란이 있어요.
남인도 대부분과 펀자브는 왜 가담하지 않았나요?
불만은 벵골군과 아와드처럼 최근 병합된 북부 지역에서 가장 컸어요. 마드라스·봄베이 군대는 모집 방식과 처우가 달랐고, 많은 펀자브·시크 병사는 벵골 세포이나 무굴 제국의 부활에 공감하지 않았어요.
1857년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요?
동인도 회사가 없어지고 영국 왕실이 인도를 다스렸어요. 군대가 재편되었고, 영국은 번왕·지주와 손잡았으며, 무굴 왕조는 끝났어요.
인도 쪽 주요 사료에는 무엇이 있나요?
델리 봉기 정부의 문서(‘반란 문서’), 선언문, 재판 기록, 갈리브의 일기 『다스탄부이』, 사이이드 아흐마드 칸의 『인도 봉기의 원인』 등이 있어요. 역사학자들은 이것들을 훨씬 방대한 영국 기록과 함께 읽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Indian Rebellion of 1857. Wikipedia
- Siege of Delhi. Wikipedia
- Siege of Cawnpore. Wikipedia
- Siege of Lucknow. Wikipedia
- Rani of Jhansi. Wikipedia
- Government of India Act 1858. Wikipedia
- 세포이 항쟁. 위키백과
- Rudrangshu Mukherjee, Awadh in Revolt, 1857–1858: A Study of Popular Resistance.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 Eric Stokes (ed. C. A. Bayly), The Peasant Armed: The Indian Revolt of 1857. Clarendon Press, 1986
- William Dalrymple, The Last Mughal: The Fall of a Dynasty, Delhi, 1857. Bloomsbury, 2006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