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백년 전쟁

프랑스어: guerre de Cent Ans

1337–1453년 ·

한 문장으로

백년 전쟁(1337~1453)은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이 땅과 프랑스 왕위를 두고 오랫동안 싸우다 쉬다를 되풀이한 전쟁으로, 잉글랜드가 프랑스 땅에서 거의 모두 밀려나며 끝났고 두 나라가 더 강한 국가와 뚜렷한 국민 의식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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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700년 전,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에도 커다란 땅을 가지고 있었어요. 맛있는 포도주가 나는 보르도라는 도시 주변이었지요. 그런데 그 땅 때문에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에게 신하로서 고개를 숙여야 했어요. 우리 집 한쪽 방에서는 옆집 사람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다툼이 끊이지 않았겠지요?

그러다 1328년 프랑스 왕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어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우리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였으니 내가 프랑스 왕이 되어야 해!”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은 필리프라는 다른 사촌을 왕으로 뽑았지요. 1337년 두 왕은 전쟁을 시작했고, 이 전쟁은 싸웠다 쉬었다 하며 116년이나 이어졌어요. 나중에 사람들은 이를 ‘백년 전쟁’이라 불렀어요. 실제로는 백 년보다 길었고, 한 번의 긴 싸움도 아니었지만요.

긴 활(장궁)을 든 잉글랜드 궁수들은 크레시와 아쟁쿠르 같은 유명한 전투에서 이겼어요. 하지만 전쟁의 대부분은 큰 전투가 아니었어요. 병사들이 시골을 돌아다니며 농가를 불태우고 원하는 것을 빼앗았지요. 마을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었고, 같은 시기에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어요.

프랑스가 몹시 어려워졌을 때, 잔 다르크라는 농촌 소녀가 하느님이 자신을 프랑스 왕자를 도우라고 보냈다고 말했어요. 잔은 1429년 병사들을 이끌고 오를레앙을 구해 냈고, 왕자가 왕관을 쓰도록 도왔어요. 나중에 적에게 붙잡혀 화형을 당했지만,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어요.

결국 프랑스는 거의 모든 땅을 되찾았어요. 1453년 잉글랜드에게 남은 것은 칼레 항구뿐이었지요. 전쟁을 겪으며 두 나라 사람들은 전보다 더 ‘잉글랜드 사람’, ‘프랑스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었어요.

한눈에 보기

시기
1337~1453년. 중간에 긴 휴전이 여러 번 있었다
주요 세력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뒤에 랭커스터) 왕가 대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 시기에 따라 부르고뉴, 플랑드르, 브르타뉴, 스코틀랜드, 카스티야 등이 한쪽에 가담했다
주요 무대
프랑스(특히 가스코뉴, 노르망디, 브르타뉴, 루아르 지역), 플랑드르, 스코틀랜드, 이베리아반도, 영국 해협
국면
에드워드 전쟁(1337~1360), 카롤린 전쟁(1369~1389), 랭커스터 전쟁(1415~1453)
주요 전투
슬로이스 해전(1340), 크레시(1346), 푸아티에(1356), 아쟁쿠르(1415), 오를레앙 포위전(1428~1429), 포르미니(1450), 카스티용(1453)
결과
발루아 왕가의 승리. 잉글랜드는 칼레(1558년 상실)를 빼고 프랑스의 모든 영지를 잃었다
민간 피해
약탈과 급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 때문에 극심한 황폐화. 흑사병 피해와 겹쳐 전쟁 사망자를 정확히 셀 수 없다
이름
‘백년 전쟁’은 후대의 이름으로, 19세기 역사가들부터 쓰였다

쉬움

백년 전쟁이란 무엇인가

백년 전쟁은 1337년에 시작해 1453년에 끝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여러 전쟁을 역사가들이 한데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쉬지 않고 이어진 하나의 전쟁이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진 몇 개의 국면 사이에 휴전과 평화 조약이 있었고, 그 가운데 몇몇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핵심에는 두 가지 물음이 있었다. 첫째,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 보유한 프랑스 남서부의 땅은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둘째, 프랑스의 정당한 왕은 누구인가. 에드워드 3세 이후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공주의 혈통을 근거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고, 헨리 5세와 그 아들 헨리 6세 때에는 한때 정말로 왕위를 차지할 것처럼 보였다.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1453년까지 잉글랜드는 노르망디와 가스코뉴를 잃고 칼레만 남겼다. 이 전쟁은 두 왕국의 세금, 군대, 언어, 영웅,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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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왜 시작되었나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에서도 대영주였다. 14세기 초에는 그 땅 대부분을 잃었지만,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아키텐 공국, 흔히 가스코뉴라 불리는 땅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 공국 때문에 잉글랜드 왕은 봉신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신종 서약(오마주)을 해야 했다. 프랑스 왕들은 재판을 통해 가스코뉴 문제에 개입했고, 잉글랜드 왕들은 이를 못마땅해했다.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죽었다. 그의 누이를 통해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은 누이의 아들, 곧 젊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법률가와 귀족들은 남계로 이어진 사촌 발루아의 필리프를 택했고, 그가 필리프 6세가 되었다. 뒷날 프랑스 법학자들은 여성을 통한 상속을 배제하는 이른바 살리카법을 근거로 이를 정당화했는데, 이 논리는 사후에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다른 갈등도 불을 지폈다. 부유한 플랑드르의 모직물 도시들은 잉글랜드산 양모에 의존했기에 잉글랜드 쪽으로 기울었지만, 그곳 백작은 프랑스에 충성했다. 프랑스는 ‘오랜 동맹’으로 스코틀랜드를 도와 잉글랜드에 맞섰다. 1337년 5월 필리프 6세가 가스코뉴 몰수를 선언하자 에드워드 3세는 전쟁으로 맞섰고, 1340년에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 칭호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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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누가 어떻게 싸웠나

잉글랜드는 인구가 프랑스보다 적었지만, 계약을 통해 급료를 받는 군대를 모으는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말에서 내려 싸우는 중무장 병사와, 빠르게 많은 화살을 쏠 수 있는 장궁을 쓰는 궁수를 대규모로 결합했다. 프랑스는 기사도 많고 더 부유했으며, 뒤에는 상비 유급 부대와 강력한 대포를 발전시켰다.

싸움의 상당 부분은 큰 전투가 아니라 ‘슈보시(chevauchée)’였다. 적의 땅을 말을 타고 누비며 마을을 불태우고 작물을 망치고 약탈해, 적의 왕이 백성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기습 원정이었다. 도시와 성의 포위전도 흔했다.

두 왕 모두 동맹 세력과 지방 영주에게 기댔다. 브르타뉴와 뒤에는 부르고뉴 등의 일부 프랑스 귀족은 잉글랜드 편에 섰고, 가스코뉴 사람들은 대체로 멀리 있는 주군인 잉글랜드 왕에게 충성했다. 여러 나라 출신의 용병 부대는 돈을 받고 싸웠으며, 평화 시기에도 제멋대로 약탈을 이어 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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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에드워드 전쟁 국면(1337~1360)

잉글랜드는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서 이겨 해협의 제해권을 얻었다. 1346년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에 상륙해 파리 쪽으로 진군했다가 북쪽으로 향했고, 8월 26일 크레시에서 훨씬 큰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이어 칼레를 약 1년 동안 포위해 1347년 항복을 받아 냈다. 칼레는 이후 두 세기가 넘도록 잉글랜드 땅으로 남는다.

1348년 흑사병이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닥쳐 많은 지역에서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전쟁도 중단되었다. 싸움은 1350년대에 다시 시작되었다. 1356년 에드워드의 맏아들, 뒷날 ‘흑태자’로 불린 우드스톡의 에드워드가 푸아티에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국왕 장 2세를 사로잡았다.

왕이 포로가 되자 프랑스는 위기에 빠졌다. 1358년 파리에서는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개혁 운동이, 농촌에서는 자크리의 난이라는 격렬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브레티니 조약(1360)으로 에드워드는 크게 넓어진 아키텐을 완전한 주권 아래 받고 장 2세의 막대한 몸값도 받기로 했으며, 그 대가로 프랑스 왕위 주장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포기 조항들은 끝내 온전히 이행되지 않았다.

[1][10][8]

중급

프랑스의 반격, 내전, 잉글랜드의 정복(1369~1429)

프랑스 왕 샤를 5세는 1369년 전쟁을 재개했다. 그는 원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조언에 따라 큰 회전(會戰)을 피하고 도시와 성을 하나씩 되찾았다. 1380년대에 이르자 잉글랜드에게는 칼레와 가스코뉴 해안 일부 정도만 남았다. 두 왕국 모두 지쳐 있었다. 잉글랜드는 1381년 농민 반란을 겪었고, 1389년부터 휴전이 이어졌다.

전쟁은 프랑스 밖으로도 번졌다. 1360년대 카스티야 내전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서로 다른 왕위 주장자를 지원했다. 흑태자는 1367년 나헤라 전투에서 이겼지만 결국 프랑스가 지지한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가 왕위에 올랐고, 이후 카스티야 갤리선은 프랑스를 도와 잉글랜드 해안을 습격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동맹은 잉글랜드를 두 전선에서 싸우게 했고, 저지대에서는 양모 교역에 따라 플랑드르 도시들의 충성이 오락가락했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는 이 분쟁을 단순한 영불 전쟁이 아닌 서유럽 전체의 전쟁으로 본다.

프랑스에서는 1392년부터 국왕 샤를 6세가 정신 질환 증세를 되풀이해 보였다. 왕족들이 권력을 다투었고, 1407년 오를레앙 공이 암살된 뒤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이 분열을 이용했다. 1415년 침공해 아르플뢰르를 함락하고, 10월 25일 아쟁쿠르에서 더 큰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1417년부터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1419년 부르고뉴 공 장 상푀르(용맹공 장)가 프랑스 왕세자 샤를과 회견하던 중 살해되었다. 그러자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 동맹했다. 트루아 조약(1420)은 헨리 5세를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삼고 왕세자의 상속권을 박탈했다.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잇따라 죽자 갓난아기 헨리 6세가 두 왕관의 주장자가 되었고, 왕세자는 부르주를 근거지로 루아르강 남쪽을 다스렸다.

[1][4][10]

중급

잔 다르크와 전쟁의 끝(1429~1453)

1428년 잉글랜드군은 루아르강의 요충지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프랑스 동부 동레미 출신의 농민 소녀로서 성인들의 목소리가 자신을 이끈다고 말한 잔은 왕세자를 설득해 구원군에 합류했다. 1429년 5월 포위가 풀렸고, 잉글랜드군은 파테에서 패했으며,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는 프랑스 국왕 대관식의 전통적 장소인 랭스에서 즉위했다.

잔은 1430년 콩피에뉴에서 부르고뉴군에게 사로잡혀 잉글랜드에 넘겨졌다. 루앙의 교회 재판소는 그를 이단 혐의로 재판했고, 잔은 1431년 5월 30일 열아홉 살 무렵의 나이로 화형당했다. 1456년에 마무리된 재심은 이 판결을 무효로 했다. 가톨릭교회는 1920년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결정적 전환은 1435년 아라스 회의에서 부르고뉴가 샤를 7세와 화해하면서 찾아왔다. 파리는 1436년 샤를에게 돌아왔다. 휴전 뒤 상비 유급 부대와 효과적인 대포를 갖춘 프랑스는 1450년 포르미니 전투에서 승리하며 노르망디를, 이어 가스코뉴를 되찾았다. 보르도를 탈환하려던 잉글랜드의 시도는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에서 패배로 끝났다.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낸 평화 조약은 없었지만, 잉글랜드에게는 칼레만 남았다.

[3][1][9]

중급

전쟁과 평범한 사람들

프랑스의 대다수 사람에게 이 전쟁은 영광스러운 전투가 아니라 공포였다. 슈보시는 일부러 마을과 곡식을 불태웠다. 긴 휴전 동안에는 해산된 병사들이 ‘자유 용병대’를, 뒤에는 ‘에코르셰르(가죽 벗기는 자들)’라 불린 무리를 이루어 시골에서 약탈하고 사람을 납치하고 돈을 뜯었다. 많은 농촌 공동체가 교회를 요새로 만들거나 성벽이 있는 도시로 피란했다.

믿을 만한 사망자 수를 제시하기는 불가능하다. 전쟁은 흑사병과 이후의 역병, 기근, 경제 침체와 겹쳤고, 기록은 이 원인들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 14세기 중엽부터 15세기 중엽 사이 프랑스 북부와 서부 일부가 인구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는 데는 역사가들이 동의하지만, 그 가운데 전쟁 자체의 몫이 얼마인지는 논쟁 중이다.

잉글랜드는 남부 해안에 대한 프랑스와 카스티야의 습격을 빼면 육지 침공을 겪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으로 대가를 치렀다. 1370년대 말과 1381년의 인기 없던 인두세는 농민 반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병사들, 그 가운데 다수를 차지한 평범한 궁수들은 전리품과 몸값, 그리고 무용담을 안고 돌아오기도 했다.

[5][6][9]

중급

전쟁이 남긴 것

프랑스에서는 전쟁 비용을 대야 했기에 왕실이 신분회의의 동의를 매번 구하지 않고 타유세 같은 정기 세금을 확립할 수 있었고, 1440년대에 샤를 7세는 급료를 받는 상설 부대, 곧 초기 상비군을 만들었다. 프랑스 왕정은 전쟁을 거치며 더 강해지고 더 중앙집권화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돈이 필요했기에 세금 승인에서 의회, 특히 서민원(하원)의 비중이 커졌다. 패배는 헨리 6세의 랭커스터 정부의 권위를 떨어뜨렸고, 1455년에 시작된 장미 전쟁의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잉글랜드 왕들은 1801년까지 ‘프랑스 왕’ 칭호를 계속 썼다.

전쟁은 국민 정체성도 뚜렷하게 했다. 14세기 말~15세기에 걸쳐 잉글랜드의 궁정·법정·행정에서 영어가 점점 프랑스어를 대신했다. 프랑스에서는 왕에 대한 충성과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감이 사람들이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의 일부가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잘 조직된 보병, 그리고 끝 무렵에는 화약 대포의 위력이 드러났지만, 이 변화가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또 다른 승자는 부르고뉴였다. 저지대의 상당 부분도 다스린 발루아 가문의 부르고뉴 공들은 전쟁과 프랑스 내전을 이용해 화려한 궁정 문화를 지닌 부유한 반(半)독립 국가를 세웠다. 이들이 편을 바꿀 때마다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마지막 공작 샤를 르테메레르(용담공 샤를)가 1477년 죽은 뒤 그 영토는 프랑스 왕실과 합스부르크 가문에 나뉘었고, 이는 수백 년 동안 유럽 정치를 좌우했다.

[1][9][10]

중급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어떻게 기억하는가

잉글랜드에서 이 전쟁은 무엇보다 크레시, 푸아티에, 특히 아쟁쿠르의 승리로 기억되며, 흔히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통해 떠올려진다. 『헨리 5세』(1599년 무렵)는 아쟁쿠르를 작은 ‘형제의 무리’가 오만한 적을 무찌른 이야기로 만들었다. 로런스 올리비에의 1944년 영화판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사기를 북돋우려고 만들어졌다. 최종 패배는 상대적으로 덜 기억된다.

프랑스에서 이 전쟁은 고난과 회복의 이야기가 되었고, 그 중심에 잔 다르크가 있다. 19세기부터 잔은 여러 집단이 저마다 자기 것으로 삼았다. 가톨릭은 성녀로, 공화주의자는 민중의 딸로, 민족주의자는 외세 침략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런 쓰임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 갈등을 낳았고, 역사가들은 15세기의 잔과 후대의 이미지를 구분하려 애쓴다.

‘백년 전쟁’이라는 이름 자체도 19세기에야 쓰이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이 되돌아보며 이 분쟁들을 하나의 국민적 드라마로 묶은 것이다. 현대 학자들은 당대 사람들이 두 국민 사이의 단일한 전쟁이 아니라, 충성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왕조·봉건·내전적 분쟁들을 겪었다고 자주 지적한다.

[1][3][2]

심화

1차 사료

가장 유명한 서술 사료는 14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어로 쓰이고 여러 차례 고쳐 쓰인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다. 프루아사르는 앞선 장 르벨의 연대기와 기사·전령관들과의 면담을 바탕으로 썼다. 생생한 기사도적 이야기 솜씨는 이 전쟁의 대중적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숫자는 믿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편이 다른 후원자들에 맞추어 서술을 바꾸기도 했다. ‘온라인 프루아사르’ 프로젝트는 여러 필사본 판본을 공개하고 있다.

그 밖에 15세기 초를 다룬 앙게랑 드 몽스트를레의 연대기,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지배 아래 수도의 생활을 기록한 작자 미상의 『파리 부르주아의 일기』, 그리고 『헨리 5세 행적기(Gesta Henrici Quinti)』 같은 잉글랜드 문헌이 있다. 잔 다르크의 유죄 재판(1431)과 무효 재심(1455~1456) 기록에는 잔 자신의 답변과 수많은 증언이 담겨 있지만, 이 역시 저마다 의도를 지닌 법정이 만든 기록이다.

행정 문서도 그만큼 중요하다. 잉글랜드 재무부 회계, 병사 명부, 조약, 세금 기록, 편지 등이다. 이를 통해 역사가들은 군대 규모·급료·보급에 관한 연대기 작가들의 주장을 검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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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역사가들의 논쟁

첫째 논쟁은 전쟁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국민 사이의 전쟁이었나, 가스코뉴를 둘러싼 봉건적 분쟁이었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조 다툼이었나, 아니면 잉글랜드 왕이 여러 대제후 가운데 하나로 참여한 프랑스 내전이었나?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시기에 따라 이 모두였다고 보며, ‘국민 전쟁’이라는 틀은 상당 부분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긴다.

둘째 논쟁은 전투와 숫자에 관한 것이다. 연대기 작가들은 거대한 프랑스군이 아주 작은 잉글랜드군에게 졌다고 전하곤 했다. 앤 커리는 특히 아쟁쿠르에 관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행정 기록을 연구해, 양군의 규모 차이가 전통적 서술보다 작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대기를 더 신뢰하는 다른 연구자들은 여전히 프랑스군의 큰 수적 우위를 옹호한다. 클리퍼드 J. 로저스 같은 군사사가들은 이 전쟁에서 유럽 전쟁의 ‘보병 혁명’이 일어났는지를 논의했다.

2023년에 완간된 조너선 섬션의 여러 권짜리 서술과 크리스토퍼 올먼드의 간결한 종합서는 영어권의 표준적 현대 연구이며, 20세기 중엽 에두아르 페루아의 연구로 거슬러 올라가는 프랑스 학계는 이 전쟁이 프랑스 국가와 사회에 끼친 영향을 강조해 왔다. 역사가들은 15세기의 종교·젠더·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잔 다르크 재판 기록도 계속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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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 (40)

  1. 카셀 전투1328년
  2. 카드잔 전투1337년
  3. 아르너마위던 해전1338년
  4. 슬로이스 해전1340년
  5. 생토메르 전투1340년
  6. 모를레 전투1342년
  7. 오베로슈 전투1345년
  8. 크레시 전투1346년
  9. 칼레 공성전1346–1347년
  10. 캉 전투1346년
  11. 네빌스 크로스 전투1346년
  12. 블랑슈타크 전투1346년
  13. 윈첼시 전투1350년
  14. 삼십인의 전투1351년
  15. 푸아티에 전투1356년
  16. 오레 전투1364년
  17. 코슈렐 전투1364년
  18. 나헤라 전투1367년
  19. 몬티엘 전투1369년
  20. 라로셸 해전1372년
  21. 로즈베커 전투1382년
  22. 아톨레이로스 전투1384년
  23. 알주바로타 전투1385년
  24. 아쟁쿠르 전투1415년
  25. 아르플뢰르 공성전1415년
  26. 루앙 공성전 (1418년)1418–1419년
  27. 보제 전투1421년
  28. 모 공성전1421–1422년
  29. 크라방 전투1423년
  30. 베르뇌유 전투1424년
  31. 오를레앙 공방전1428–1429년
  32. 파테 전투1429년
  33. 청어 전투1429년
  34. 파리 공방전1429년
  35. 보장시 전투1429년
  36. 자르조 전투1429년
  37. 묑쉬르루아르 전투1429년
  38. 콩피에뉴 공성전1430년
  39. 포르미니 전투1450년
  40. 카스티용 전투1453년

핵심 개념

봉신인 왕
잉글랜드 왕은 가스코뉴 때문에 프랑스 왕의 봉신이기도 했다. 이 봉건적 얽힘이 충돌을 부르기 쉬웠다.
왕위 계승 주장
에드워드 3세와 후계자들은 프랑스 공주의 혈통을 근거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고, 발루아 왕가는 남계 혈통에 권리를 두었다.
슈보시
적의 땅과 위신에 타격을 주려는 파괴적 기마 약탈. 이 때문에 민간인이 전쟁의 주된 피해자가 되었다.
장궁과 보병
궁수와 하마(下馬) 중장병의 결합이 잉글랜드의 유명한 승리를 낳았지만, 전투는 약탈과 포위전보다 드물었다.
국가 형성
전쟁 비용 조달이 정기 세금, 상비군, 더 강한 왕정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국민 정체성
전쟁은 왕조 분쟁을 잔 다르크와 헨리 5세 같은 영웅이 등장하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라는 ‘국민’의 이야기로 바꾸는 데 한몫했다.
나중에 붙은 이름
당대 사람들은 ‘백년 전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이 이름은 19세기의 역사 서술 방식을 반영한다.

기록

  1. 1328년 —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죽고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즉위하다.
  2. 1337년 — 필리프 6세가 가스코뉴를 몰수하고 전쟁이 시작되다.
  3. 1346년 —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하다(8월 26일). 칼레 포위가 시작되다.
  4. 1348년 — 흑사병이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닥치다.
  5. 1356년 — 푸아티에 전투. 프랑스 왕 장 2세가 포로가 되다.
  6. 1369년 — 샤를 5세가 전쟁을 재개하고 프랑스가 꾸준히 영토를 되찾기 시작하다.
  7. 1415년 — 헨리 5세가 아쟁쿠르에서 승리하다(10월 25일).
  8. 1420년 — 트루아 조약으로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다.
  9. 1429년 —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포위를 푸는 데 기여하고, 샤를 7세가 랭스에서 즉위하다.
  10. 1431년 — 잔 다르크가 루앙에서 화형당하다(5월 30일).
  11. 1435년 — 아라스 회의. 부르고뉴가 샤를 7세와 화해하다.
  12. 1453년 —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고 잉글랜드에는 칼레만 남다.

용어 풀이

가스코뉴(아키텐)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남서부의 공국.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의 봉신으로서 보유했다.
신종 서약(오마주)
봉신이 땅을 받는 대가로 주군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
발루아 왕가
1328년 필리프 6세로 시작된 프랑스 왕조.
플랜태저넷 / 랭커스터 왕가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 왕가와, 헨리 4세·5세·6세가 속한 그 방계.
장궁(롱보)
잉글랜드와 웨일스 궁수들이 쓴 키 큰 나무 활. 먼 거리에 빠르게 쏠 수 있었다.
도팽(왕세자)
프랑스 왕위 계승자의 칭호.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15세기 초 내전을 벌여 잉글랜드 정복의 길을 열어 준 프랑스 왕족의 두 파벌.
에코르셰르
‘가죽 벗기는 자들’. 특히 1430~1440년대 프랑스 농촌을 약탈한 실직 병사 무리.
살리카법
옛 프랑크 법전으로, 뒷날 프랑스 법학자들이 여성과 그 후손을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는 근거로 내세웠다.

묻고 답하기

정말 백 년 동안 싸웠나요?

그보다 길어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이에요. 하지만 날마다 싸운 것은 아니에요. 중간에 휴전과 평화의 해가 많았어요.

잉글랜드 왕은 왜 프랑스 왕이 되고 싶어 했나요?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가 옛 왕가의 마지막 프랑스 왕의 누이였기 때문에, 왕관이 자기에게 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프랑스는 남자 쪽으로 이어진 사촌을 골랐지요. 에드워드는 가스코뉴의 땅도 지키고 싶었어요.

잔 다르크는 누구인가요?

성인들이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고 믿은 농촌 소녀예요. 1429년 오를레앙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고 왕세자가 왕관을 쓰게 도왔어요. 잉글랜드와 그 편의 프랑스 사람들이 1431년 재판을 열어 화형에 처했지만, 뒤에 무죄가 선언되었고 1920년 성인이 되었어요.

크레시와 아쟁쿠르에서 이긴 잉글랜드가 왜 전쟁에서 졌나?

전투는 드물었고, 전쟁의 승패는 돈·포위전·동맹·영토 장악으로 갈렸다. 프랑스는 더 크고 부유했으며, 내전이 끝나고 1435년 부르고뉴가 편을 바꾸자 잉글랜드는 정복지를 지킬 수 없었다.

프루아사르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분위기와 세부 묘사에서는 매우 귀중하지만 조심해서 써야 한다. 귀족 독자를 즐겁게 하려고 썼고, 후원자에 따라 글을 고쳤으며, 숫자는 부풀려진 경우가 많다. 역사가들은 행정 기록과 대조해 검증한다.

두 국민 사이의 전쟁이었나?

처음에는 현대적 의미의 국민 전쟁이 아니었다. 왕조·봉건 분쟁으로 시작했고 많은 ‘프랑스’ 귀족이 잉글랜드 편에서 싸웠다. 그러나 긴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잉글랜드인·프랑스인이라는 의식이 더 강해졌다.

잉글랜드는 왜 칼레를 그렇게 오래 지켰나요?

칼레는 해협의 가장 좁은 곳 건너편이라 잉글랜드와 가까웠고, 튼튼한 요새였으며, 잉글랜드 양모를 외국에 파는 공식 시장이었어요. 전쟁이 끝나고 100년도 더 지난 1558년에야 프랑스가 되찾았어요.

잉글랜드 장궁병이 정말 승패를 갈랐나?

크레시와 아쟁쿠르처럼 튼튼한 진지에서 공격해 오는 적을 막을 때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지형, 규율, 날씨, 지휘, 프랑스의 실수도 중요했고, 장궁만으로 포위전을 이기거나 영토를 지킬 수는 없었다. 전쟁 후반에는 프랑스의 대포와 상비군이 잉글랜드를 압도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Hundred Years’ War. Wikipedia
  2. 백년 전쟁. 위키백과
  3. Joan of Arc. Wikipedia
  4. Treaty of Troyes. Wikipedia
  5. Chevauchée. Wikipedia
  6. Black Death. Wikipedia
  7. Froissart’s Chronicles. Wikipedia
  8. The Online Froissart. Digital Humanities Institute, University of Sheffield
  9. Christopher Allmand, The Hundred Years War: England and France at War c.1300–c.14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10. Jonathan Sumption, The Hundred Years War (5 vols.). Faber and Faber, 1990–2023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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