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파라과이 전쟁(삼국 동맹 전쟁)

Guerra de la Triple Alianza · Guerra do Paraguai · Guerra Guasu

1864–1870년 ·

한 문장으로

파라과이 전쟁은 1864년부터 1870년까지 파라과이가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동맹과 싸운,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국가 간 전쟁으로, 파라과이는 점령당하고 영토를 잃었으며 인구의 아주 큰 부분을 잃었어요.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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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60년 전, 남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있는 네 나라가 전쟁을 했어요. 파라과이는 바다에 닿지 않은 작은 나라여서, 큰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가야만 바다에 갈 수 있었어요. 이웃에는 아주 큰 제국인 브라질, 그리고 강이 바다로 나가는 어귀를 차지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있었어요.

파라과이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너무 강해질까 봐 걱정했어요. 1864년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군대를 보내자, 로페스는 이것이 지역의 균형을 깨뜨린다며 브라질을 공격했고, 곧 아르헨티나도 공격했어요. 그러자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는 파라과이에 맞서 ‘삼국 동맹’을 맺었어요.

전쟁은 5년 넘게 이어졌어요. 싸움은 주로 강가의 늪과 숲에서 벌어졌고, 병사들은 홍수와 굶주림, 콜레라 같은 무서운 병에 시달렸어요. 파라과이는 우마이타라는 튼튼한 요새를 짓고 오래 버텼지만, 동맹군은 병사와 배가 훨씬 많았어요.

결국 파라과이는 거의 다 무너졌어요. 로페스는 소년과 노인까지 전투에 보내면서 끝까지 싸웠고, 1870년에 죽었어요. 너무 많은 남자가 죽어서, 전쟁 뒤에는 여성들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일을 대부분 맡았어요.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몰라요. 역사가들은 숫자를 두고 논쟁하지만, 파라과이가 인구의 아주 큰 부분을 잃었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해요. 파라과이·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는 이 전쟁을 서로 아주 다르게 기억해요.

한눈에 보기

기간
1864년 11월(파라과이의 브라질 선박 나포)부터 1870년 3월 1일(세로코라에서 솔라노 로페스 사망)까지
장소
파라과이, 브라질 마투그로수주, 아르헨티나 코리엔테스주, 브라질 남부. 특히 파라과이강과 파라나강 유역
참전 세력
파라과이 대 브라질 제국·아르헨티나 공화국·우루과이의 삼국 동맹
나라별 이름
스페인어권: 삼국 동맹 전쟁 / 브라질: 파라과이 전쟁 / 파라과이: 대전쟁(Guerra Grande, 과라니어 Guerra Guasu)
주요 인물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 페드루 2세 황제, 카시아스 공작, 외 백작 / 바르톨로메 미트레 / 베난시오 플로레스
사망자
매우 불확실. 전체 15만~30만 명 이상으로 흔히 인용되며, 파라과이 인구 손실 추정은 20% 미만에서 약 60~69%까지 갈린다.
결과
동맹의 승리. 파라과이는 1876년까지 점령되었고, 주장하던 영토의 약 40%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잃었다.

쉬움

파라과이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

파라과이 전쟁은 1864년부터 1870년까지 파라과이와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세 나라가 1865년 맺은 조약의 이름을 따서 ‘삼국 동맹 전쟁’이라고도 한다. 브라질에서는 ‘파라과이 전쟁’, 파라과이에서는 흔히 ‘대전쟁(Guerra Grande)’, 과라니어로는 ‘게라 과수(Guerra Guasu)’라고 부른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전쟁을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국가 간 전쟁으로 본다. 수십만 명의 병사가 동원되었고, 긴 포위전과 큰 하천 전투가 벌어졌으며, 남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철갑선이 본격적으로 쓰인 전쟁 가운데 하나였다. 파라과이에게 결과는 재앙이었다. 군대는 무너졌고, 인구의 상당 부분이 죽었으며, 수도는 점령되고 주장하던 영토를 잃었다.

전쟁의 무대는 큰 강들이 만든 지역이었다. 파라나강과 파라과이강은 남쪽으로 흘러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사이의 넓은 하구인 라플라타강으로 들어간다. 이 강들을 쥔 쪽이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내륙, 그리고 파라과이를 거쳐 배로 가는 것이 가장 쉬웠던 브라질 마투그로수주의 교역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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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배경: 거인들 사이의 작은 내륙국

파라과이는 1811년 스페인에서 독립했다. 독재자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아래에서 파라과이는 수십 년 동안 이웃과 거의 교류를 끊었다. 뒤를 이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는 나라를 열고 외국 기술자를 불러 철도·제철소·조선소를 세웠으며 군대를 키웠다. 그가 1862년 죽자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파라과이는 국가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교역을 통제하는 사회였고, 대부분의 사람이 스페인어와 함께, 또는 스페인어 대신 과라니어를 썼다.

이웃 나라들은 훨씬 컸다. 브라질은 페드루 2세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으로, 영토가 넓고 경제는 여전히 노예제에 기대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지방 사이의 수십 년에 걸친 내전에서 막 벗어나고 있었고, 바르톨로메 미트레 대통령이 나라를 통일하려 애쓰고 있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작은 나라 우루과이는 블랑코당과 콜로라도당으로 갈라져 이웃의 도움을 받아 자주 싸웠다.

오래된 국경 분쟁도 있었다. 파라과이는 북쪽 땅을 두고 브라질과, 차코와 미시오네스 지역을 두고 아르헨티나와 다퉜다. 또 교역이 바다에 닿을 수 있도록 강의 자유로운 항행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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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불씨는 우루과이에서 나왔다. 1864년 콜로라도당 지도자 베난시오 플로레스가 블랑코당 정부에 맞서 봉기했다. 우루과이에 사는 브라질 목장주들이 박해를 받는다고 주장한 브라질은 플로레스를 지원했고, 아르헨티나 정부도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블랑코당은 파라과이에 도움을 청했다. 솔라노 로페스는 브라질이 우루과이를 침공하면 지역의 세력 균형이 무너진다고 경고했지만, 1864년 10월 브라질군은 우루과이로 들어갔다.

로페스는 1864년 11월 파라과이강에서 브라질 증기선 마르케스 데 올린다호를 나포하고, 12월에는 마투그로수를 침공했다. 이어 브라질과 우루과이로 가기 위해 아르헨티나 코리엔테스주를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트레가 거절하자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선전 포고하고 1865년 4월 코리엔테스시를 점령했다. 그 사이 플로레스는 브라질의 도움으로 우루과이의 권력을 잡았다.

1865년 5월 1일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는 삼국 동맹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로페스가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에는 강화하지 않겠다고 규정했고, 파라과이의 분쟁 국경을 어떻게 다시 그을지를 비밀리에 정해 두었다. 1866년 영국 정부가 비밀 조문을 공개하자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로페스가 왜 전쟁을 택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어떤 역사가는 그를 자기 군대를 과대평가하고 파라과이를 지역 강국으로 만들려 한 야심가로 본다. 다른 역사가들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를, 이어 파라과이를 지배하리라는 그의 두려움에 실제 근거가 있었다고 강조한다. 대부분은 모든 당사자가 심각한 오판을 했다는 데 동의한다. 로페스는 우루과이 블랑코당과 미트레에 반대하는 아르헨티나 지방들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그 도움은 오지 않았고, 동맹국들은 전쟁이 짧게 끝나리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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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전쟁의 전개(1864–1870)

첫 단계(1864–1865)는 파라과이의 공세였다. 파라과이는 마투그로수 일부를 점령하고 코리엔테스와 브라질 남부로 진군했다. 그러나 1865년 6월 11일 파라나강의 리아추엘루 해전에서 브라질 해군이 파라과이 함대 대부분을 격파했고, 9월에는 브라질 남부 우루과이아나에서 포위된 파라과이군이 항복했다. 이때부터 파라과이는 수세에 몰렸다.

둘째 단계(1866–1868)에 동맹군은 파라과이로 쳐들어갔다. 1866년 4월 파라나강을 건넌 동맹군은 5월 24일 투유티에서 싸웠는데,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투 가운데 하나로 파라과이군이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1866년 9월 22일 쿠루파이티 참호에 대한 동맹군의 공격은 참담하게 실패해, 파라과이 쪽 피해는 아주 적었던 데 비해 동맹군 사상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후 전쟁은 파라과이강을 지키는 우마이타 요새 주변 늪지대에서 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이 양쪽 병사를 엄청나게 쓰러뜨렸다. 미트레는 국내 반란을 수습하러 전선을 떠났고, 뒷날 카시아스 공작이 되는 브라질의 루이스 아우베스 지 리마 이 시우바 원수가 동맹군 지휘를 맡았다.

1868년 2월 브라질 철갑선들이 우마이타를 돌파했고, 요새는 그해 뒤에 버려졌다. 1868년 12월 카시아스가 이끈 ‘데젬브라다(12월 작전)’는 이토로로·아바이·로마스 발렌티나스 전투에서 남은 파라과이군 대부분을 무너뜨렸다. 동맹군은 1869년 1월 수도 아순시온을 점령했고, 동맹의 지원을 받는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로페스는 항복을 거부하고 내륙의 구릉과 숲으로 물러나, 소년·노인·부상병이 많이 섞인 새 군대를 꾸렸다. 브라질군 지휘는 페드루 2세의 사위인 외 백작 가스통 도를레앙에게 넘어갔다. 1869년 8월 16일 아코스타 뉴(캄포 그란데)에서 주로 어린이와 십대로 이루어진 파라과이군이 짓밟혔다. 마지막 단계는 파라과이 북부를 가로지르는 추격전이 되었고, 1870년 3월 1일 세로코라에서 브라질군이 로페스를 따라잡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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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병사와 민간인, 후방의 전쟁

파라과이는 사실상 모든 남성 인구를 동원했다. 동맹군도 규모가 컸지만 서로 매우 다른 사회에서 병력을 모았다. 브라질은 ‘조국 의용병(Voluntários da Pátria)’을 모집했고 뒤에는 강제 징집도 했다. 일부 노예는 입대를 조건으로 해방되었는데, 주인의 아들 대신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브라질 병사 가운데는 흑인과 혼혈인이 많았고, 이들의 복무는 뒷날 브라질의 노예제 논쟁에 영향을 주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여러 지방에서 전쟁이 인기가 없었고, 신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하기도 했다.

파라과이 민간인에게 이 전쟁은 총력전이었다. 정부는 진격해 오는 적을 피해 주민을 옮겼고, 여성·어린이·노인은 군대를 따라가거나 내륙으로 강제 이주해야 했으며, 많은 이가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다. 군대를 따르거나 정부와 함께 피란한 여성들은 뒷날 ‘레시덴타스(residentas)’라 불렸다. 반역 혐의자의 가족 등 불충하다고 지목된 여성들은 ‘데스티나다스(destinadas)’로 내륙 유배를 당해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여성들은 농사를 짓고 보급품을 만들며 부상자를 돌보았다.

1868년 산페르난도에서 로페스는 자신을 노리는 음모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친형제들과 고위 관리, 외국인을 포함한 수백 명이 고문을 받고 서둘러 진행된 재판 끝에 처형되었다. 실제로 음모가 있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의 의견은 갈리며, 대부분은 이 숙청을 극한 압박 속에서 정권이 보인 편집증의 징후로 본다.

동맹군도 민간인에게 폭력을 저질렀으며, 특히 마지막 작전에서 그랬다. 파라과이의 전승은 예컨대 1869년 8월 피리베부이의 야전 병원이 불탄 일을 기억한다. 이런 사건의 세부는 논란이 있지만, 전쟁의 마지막 해가 파라과이 주민에게 참혹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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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몇 명이 죽었나: 인구학의 수수께끼

사망자 수는 이 전쟁을 둘러싼 가장 뜨거운 논쟁 가운데 하나다. 가장 큰 문제는 1864년 파라과이에 몇 명이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예전에 쓰이던 130만 명이라는 수치는 이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현대의 전쟁 전 인구 추정은 약 30만 명에서 45만 명 안팎까지 걸쳐 있고, 최근에는 더 높은 추정도 몇 가지 나왔다.

그래서 파라과이의 손실 추정도 크게 엇갈린다. 역사가 베라 블린 리버는 1988년 파라과이가 인구의 비교적 적은 부분, 대략 7~18.5%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토머스 휘검과 바버라 포트하스트는 1999년 새로 발견된 1870~71년 인구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파라과이가 인구의 약 60~69%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인 40~50% 안팎을 제시한 학자들도 있다. 죽음의 대부분은 전투가 아니라 병, 굶주림, 탈진 때문이었다.

동맹국의 손실도 불확실하다. 브라질은 아마 수만 명을 잃었고 대부분 병으로 죽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절대 손실은 그보다 적었다. 전체 사망자는 흔히 15만~30만 명 또는 그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수치든 폭이 넓은 추정으로 다뤄야 한다. 전쟁 뒤 파라과이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았다는 말이 흔히 전해지지만, 정확한 성비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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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결과와 영향

파라과이. 나라는 브라질군과 아르헨티나군에게 점령되었고, 브라질군은 1876년까지 머물렀다. 파라과이는 아파강 북쪽 땅을 브라질에, 미시오네스와 차코 중부의 땅을 아르헨티나에 넘겼다. 필코마요강과 베르데강 사이 차코 일부를 둘러싼 분쟁은 미국 대통령 러더퍼드 B. 헤이스의 중재에 맡겨졌고, 그는 1878년 이 땅을 파라과이에 주었다. 비야 아예스라는 도시 이름은 그에게서 왔다. 1870년 새 헌법이 채택되었지만 국가는 파산 상태였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많은 국유지가 국내외 구매자에게 팔렸고, 파라과이는 오랫동안 지역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브라질. 전쟁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 브라질의 대외 부채가 늘었다. 또 군대가 강력한 국가 기관으로 성장했는데, 장교들은 제국의 정치가들에게 무시당한다고 느꼈다. 해방 노예 병사들의 복무와 다른 나라와의 비교는 노예제 폐지 운동을 키웠다. 1871년 ‘자유 출생법’이 통과되었고, 1888년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1889년에는 군 장교들이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전쟁이 이런 변화를 얼마나 직접 불렀는지는 논쟁이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본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에서 전쟁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 정부가 지방에 대한 권위를 굳히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반란을 부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미시오네스와 포르모사를 얻었다. 사건의 발단이 된 내전을 겪은 우루과이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콜로라도당 정부 아래 있었다. 전쟁은 지역 전체의 상호 불신을 깊게 했고, 해결되지 않은 땅을 두고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는 뒷날 차코 전쟁(1932–1935)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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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나라마다 다른 기억

파라과이에서 이 전쟁은 가장 큰 민족적 비극이자 저항의 자부심이다. 1870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로페스는 흔히 재앙의 책임자로 비난받았다. 20세기 초 민족주의 작가들, 특히 후안 E. 오리어리는 그를 조국을 지킨 영웅으로 다시 해석했고, 1936년 새 정부가 그를 공식적으로 국가 영웅으로 선포했다.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1954–1989 집권)는 로페스 숭배를 국가 이념의 일부로 삼았다. 파라과이의 어린이날은 아코스타 뉴의 소년병을 기리기 위해 8월 16일이고, 로페스가 세로코라에서 죽은 3월 1일은 ‘영웅의 날’이다. 대중의 기억 속에서 과라니어의 생존도 흔히 이 전쟁과 연결된다.

브라질에서 전쟁은 오랫동안 위대한 승리로 기려졌고, 카시아스 공작은 브라질 육군의 수호자로 받들어졌다. 비토르 메이렐리스의 「리아추엘루 해전」, 페드루 아메리쿠의 「아바이 전투」 같은 대형 역사화가 이를 찬양했다. 뒷날 브라질 안에서도 전쟁의 대가를 묻고 동맹군이 파라과이 민간인에게 잔학 행위를 저질렀는지를 따지는 비판적 목소리가 나왔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처음부터 전쟁이 정치적으로 나라를 갈랐다. 많은 지방 지도자가 미트레의 브라질 동맹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일부 아르헨티나 역사가는 뒷날 이 전쟁을 같은 스페인어권 민족에 대한 범죄로 보았다. 쿠루파이티에서 오른팔을 잃고 왼손으로 그림을 익힌 화가 칸디도 로페스는 정밀한 전투 장면 연작을 남겼다. 전쟁이 내전에서 시작된 우루과이에서는 국가 기억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네 나라의 역사가와 정부는 공동 연구와 화해의 행사를 이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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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차 사료

공식 사료로는 동맹군의 군사 보고서, 카시아스와 미트레 같은 지휘관의 서신, 브라질·아르헨티나 의회 토론, 그리고 아순시온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낸 영국·미국 외교 보고서를 포함한 외교 문서가 있다. 공개된 삼국 동맹 조약문은 동맹국의 전쟁 목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다. 파라과이 국가 문서의 상당수는 전쟁 중에 사라지거나 노획되었고, 일부는 브라질로 옮겨졌다. 파라과이 문서고가 사라진 탓에 파라과이 쪽을 연구하기가 더 어렵다.

파라과이는 눈에 띄는 전시 선전물도 남겼다. 전선에서 목판화 삽화와 함께 인쇄되고 일부가 과라니어로 쓰인 『카비추이(Cabichuí)』 같은 참호 신문은 정권이 병사들에게 전쟁을 어떻게 보여 주었는지를 드러낸다. 파라과이에서 일했던 외국인들도 영향력 있는 기록을 남겼다. 로페스 군대에서 복무한 영국인 기술자 조지 톰프슨은 『파라과이 전쟁(The War in Paraguay)』(1869)을 펴냈고, 산페르난도 숙청 때 투옥되었던 약제사 조지 프레더릭 매스터먼은 같은 해 적대적인 회고록을 냈다. 영국 탐험가 리처드 버턴은 동맹군 쪽에서 편지를 썼다. 이런 기록은 생생하지만 저자의 경험과 충성심이 짙게 배어 있다.

인구 사료는 특히 문제가 많다. 전쟁 전 인구 집계는 불완전하거나 믿기 어려웠고, 휘검과 포트하스트가 쓴 1870~71년 인구 조사 자료가 발견된 뒤에도 그 포괄 범위와 빈틈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려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루과이의 사진 회사 베이트 사(Bate & Co.)가 찍은 사진 등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이른 전쟁 사진에 속하며, 야영지와 전장의 상황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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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연구사와 쟁점

초기 역사 서술은 승자의 시각을 반영했다. 로페스는 백성을 파멸로 끌고 간 잔혹한 폭군으로, 동맹국은 해방자로 그려졌다. 반대로 파라과이에서는 20세기 초부터 민족주의적 ‘로피스타(lopizta)’ 서술이 로페스를 주권의 수호자로 복권했고, 이 시각은 군사 정부와 스트로에스네르 시대에 공식 역사가 되었다.

1960~70년대부터는 ‘수정주의’ 해석이 남아메리카에서 크게 유행했다. 아르헨티나의 레온 포메르, 브라질의 줄리우 조제 키아베나투 같은 저자들은 파라과이가 자급자족적이고 비교적 평등한 국가였으며, 전쟁은 파라과이를 외국 자본에 열려는 영국 제국주의가 부추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키아베나투는 이를 제노사이드라고 불렀다. 이 주장은 교과서와 대중문화에 널리 퍼졌다.

1990년대 이후 여러 나라의 문서고를 연구한 역사가들은 영국 제국주의설을 강하게 비판했다. 프란시스쿠 도라치오투의 『저주받은 전쟁(Maldita guerra)』(2002)과 토머스 휘검의 여러 권짜리 연구는 전쟁이 주로 지역 경쟁, 라플라타 지역의 국가 형성, 로페스와 동맹국 지도자들의 결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으며, 영국이 전쟁을 계획하거나 밀어붙였다는 증거는 거의 찾지 못했다. 로페스의 목표, 전쟁 전 파라과이의 성격, 민간인 죽음에 대한 동맹국의 책임, 파라과이 인구가 겪은 일에 제노사이드라는 말을 쓸 수 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새로운 연구는 사회사·젠더사·문화사의 눈으로 전쟁을 본다. 여성과 아프리카계 브라질 병사의 경험, 차코와 마투그로수 원주민, 질병의 역할, 국가 기억이 만들어진 방식 등이 그 주제다. 인구 문제는 불확실한 증거가 얼마나 다른 결론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예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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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 (11)

  1. 리아추엘로 해전1865년
  2. 야타이 전투1865년
  3. 우루과이아나 공성전1865년
  4. 쿠루파이티 전투1866년
  5. 투유티 전투1866년
  6. 에스테로베야코 전투1866년
  7. 우마이타 공방전1867–1868년
  8. 로마스발렌티나스 전투1868년
  9. 우마이타 통과전1868년
  10. 라구나 철수1868년
  11. 세로코라 전투1870년

핵심 개념

라플라타 지역의 세력 균형
국경·하천·우루과이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싼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의 경쟁이 전쟁을 불렀다.
무조건적 전쟁 목표
삼국 동맹 조약이 로페스가 다스리는 한 강화를 거부해, 전쟁이 길고 총력적인 것이 되었다.
강의 전쟁
파라나강·파라과이강 장악, 우마이타 같은 요새, 새로운 철갑선이 전쟁의 상당 부분을 좌우했다.
인구학적 재앙
파라과이는 인구의 매우 큰, 그러나 규모가 논쟁적인 부분을 주로 병과 굶주림으로 잃었다.
국가 형성
전쟁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중앙 국가와 군대를 강화했고, 브라질 군주정과 노예제의 종말에 영향을 주었다.
엇갈리는 국가 기억
파라과이는 영웅적 저항과 비극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찬양에서 점차 비판적 시각으로 옮겨 가며 기억한다.
수정주의와 그 비판
1970년대에 유행한 영국 제국주의설은 이후 문서고 연구로 대체로 부정되었다.

기록

  1. 1862년 —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가 파라과이 대통령이 된다.
  2. 1864년 — 브라질의 우루과이 개입(10월), 파라과이의 마르케스 데 올린다호 나포(11월)와 마투그로수 침공(12월).
  3. 1865년 — 파라과이의 코리엔테스 점령(4월), 삼국 동맹 조약(5월 1일), 리아추엘루 해전(6월 11일), 우루과이아나 항복(9월).
  4. 1866년 — 동맹군의 파라과이 침공, 투유티 전투(5월 24일), 쿠루파이티에서 동맹군 참패(9월 22일).
  5. 1868년 — 브라질 철갑선의 우마이타 돌파, 산페르난도 숙청, 데젬브라다 작전으로 파라과이군 궤멸.
  6. 1869년 — 동맹군의 아순시온 점령(1월), 아코스타 뉴 전투(8월 16일).
  7. 1870년 — 세로코라에서 로페스 사망(3월 1일), 파라과이 새 헌법.
  8. 1876년 — 아르헨티나와 조약 체결, 브라질 점령군 철수.
  9. 1878년 — 헤이스 중재로 차코 일부가 파라과이에 귀속된다.
  10. 1888년 — 브라질 노예제 폐지. 이듬해 군주정이 무너진다.

용어 풀이

삼국 동맹
1865년 파라과이에 맞서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가 맺은 동맹.
라플라타강
파라나강과 우루과이강이 만나 이루는 하구, 또는 그 주변 지역.
우마이타
2년 넘게 동맹군의 진격을 막은 파라과이강의 요새 진지.
철갑선
쇠 장갑판으로 보호한 증기 군함.
블랑코당과 콜로라도당
우루과이의 두 전통 정당. 두 당의 내전이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레시덴타스
전쟁 중 군대를 따르거나 피란했고 전후 나라를 다시 일으킨 파라과이 여성들.
과라니어
파라과이에서 널리 쓰이는 원주민 언어. 전시 선전에 쓰였고 지금도 공용어다.
중재
중립적인 제3자에게 판단을 맡겨 분쟁을 해결하는 일. 1878년 헤이스 판정이 그 예다.

묻고 답하기

왜 ‘삼국 동맹 전쟁’이라고 해요?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세 나라가 1865년 조약을 맺고 동맹해서 파라과이와 싸웠기 때문이에요.

정말 어린이들도 싸웠어요?

네. 마지막 단계에서 파라과이는 소년들을 전투에 보냈어요. 1869년 아코스타 뉴 전투가 가장 유명해요. 파라과이는 지금 8월 16일 어린이날에 그들을 기려요.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요?

먼저 군사 행동을 한 것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공격한 파라과이예요. 하지만 그것은 브라질이 우루과이를 침공한 뒤였어요. 역사가들은 로페스의 야심과 오판, 그리고 큰 이웃 나라들이 만든 압박을 함께 저울질해요.

영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1960~70년대에 유행한 이론이지만, 여러 나라 문서고를 연구한 최근 역사가들은 대부분 그 증거를 거의 찾지 못했고, 지역 내부의 원인을 강조해요.

파라과이 사망자 추정은 왜 이렇게 차이가 나요?

전쟁 전 인구를 모르고 남은 인구 조사 자료도 불완전하기 때문이에요. 어떤 가정을 하느냐에 따라 인구의 5분의 1이 안 되는 손실부터 3분의 2 가까운 손실까지 결과가 달라져요.

이 전쟁은 브라질의 노예제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복무한 노예는 해방되었고, 전쟁은 브라질이 노예제 제국이라는 비판을 받게 만들었어요. 이것이 폐지 운동에 힘을 실어 1871년 자유 출생법과 1888년 노예제 폐지로 이어졌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Paraguayan War. Wikipedia
  2. 파라과이 전쟁. 위키백과
  3. Paraguayan War casualties. Wikipedia
  4. Treaty of the Triple Alliance. Wikipedia
  5. Francisco Solano López. Wikipedia
  6. Battle of Acosta Ñu. Wikipedia
  7. Thomas L. Whigham, The Paraguayan War, Volume 1: Causes and Early Conduct.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2002
  8. Francisco Doratioto, Maldita guerra: nova história da Guerra do Paraguai. Companhia das Letras, 2002
  9. Vera Blinn Reber, The Demographics of Paraguay: A Reinterpretation of the Great War, 1864–70. Hispanic American Historical Review 68, no. 2, 1988
  10. Thomas L. Whigham and Barbara Potthast, The Paraguayan Rosetta Stone: New Insights into the Demographics of the Paraguayan War, 1864–1870. Latin American Research Review 34, no. 1, 1999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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