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앵글로-줄루 전쟁

Anglo-Zulu War · Impi yamaNgisi (1879)

1879년 ·

한 문장으로

1879년 대영제국이 아프리카 남동부의 독립 왕국 줄루를 침공한 전쟁으로, 줄루군은 이산들와나에서 이름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섯 달 만에 케츠와요 왕이 패하고 뒤이은 전후 처리로 왕국은 산산이 무너졌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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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50년 전, 아프리카 남동쪽의 푸른 언덕에 줄루 왕국이라는 힘센 아프리카 나라가 있었어요. 왕의 이름은 케츠와요였어요. 바로 옆에는 영국이 다스리는 나탈이라는 식민지가 있었지요. 영국은 아프리카 남쪽 전체를 차지하고 싶었고, 줄루의 군대를 걸림돌로 여겼어요.

1879년, 영국 관리 한 사람이 케츠와요 왕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보냈어요. 예를 들면 30일 안에 군대를 모두 해산하라는 것이었지요. 기한이 지나자 영국군이 줄루 땅으로 쳐들어왔어요.

영국군에게는 소총과 대포가 있었어요. 줄루 병사들은 대부분 소가죽 방패와 짧은 찌르는 창을 들었고, 총을 가진 사람도 조금 있었어요. 하지만 줄루 병사들은 용감하고 빠르고 잘 훈련되어 있었어요. 이산들와나라는 언덕에서 그들은 영국군의 큰 진지를 기습해, 아프리카 군대가 유럽 군대를 상대로 거둔 가장 큰 승리 가운데 하나를 이뤄 냈어요.

그러자 영국은 훨씬 더 많은 군대를 보냈어요. 1879년 7월, 영국군은 왕궁이 있던 울룬디 근처에서 줄루군을 이기고 왕궁을 불태웠어요. 케츠와요 왕은 붙잡혀 먼 곳으로 보내졌어요.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왕국을 열세 조각으로 나누고 조각마다 다른 추장을 앉혔어요. 추장들은 서로 다투고 싸웠고, 전쟁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어요. 오늘날 줄루 사람들은 이산들와나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영국 사람들은 로크스 드리프트라는 작은 기지를 용감하게 지킨 일을 기억해요. 두 기억 모두 이 이야기의 일부랍니다.

한눈에 보기

기간
1879년 1월 11일 – 7월 4일(주요 전투), 케츠와요 체포 1879년 8월 28일
장소
줄룰란드(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 콰줄루나탈주)
참전 세력
케츠와요 카음판데 왕의 줄루 왕국 대 대영제국(식민지 의용병과 나탈의 아프리카인 보조병 포함)
주요 인물
케츠와요, 은치잉와요 카마홀레, 마부멩과나 카은들렐라, 다불라만지 카음판데 왕자 / 바틀 프리어, 첼름스퍼드 경, 가닛 울즐리
주요 전투
이산들와나·로크스 드리프트(1월 22–23일), 흘로바네·캄불라(3월 28–29일), 깅긴들로부(4월 2일), 울룬디(7월 4일)
사망자(추정)
영국 측 약 1,900명(아프리카인 보조병 다수 포함), 줄루 병사 약 6,000–10,000명, 민간인 피해는 기록되지 않음
결과
영국의 군사적 승리. 왕국은 13개 추장령으로 쪼개져 내전에 빠졌고 1887년 영국에 병합됨

쉬움

앵글로-줄루 전쟁이란?

앵글로-줄루 전쟁은 1879년 대영제국과 줄루 왕국 사이에 벌어진 짧지만 매우 중요한 전쟁이다. 줄루 왕국은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 콰줄루나탈 지역에 있던 독립 아프리카 국가였다. 전쟁은 약 여섯 달 동안 이어졌고, 줄루 왕이 먼저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영국이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이 널리 알려진 것은 1879년 1월 22일 같은 날 벌어진 두 전투 때문이다. 이산들와나에서는 줄루군이 영국군 진지를 거의 전멸시켜 병사와 보조 인력 1,300명 이상이 죽었다. 몇 시간 뒤 로크스 드리프트라는 작은 선교 기지에서는 영국·식민지 병사 약 150명이 수천 명의 줄루군을 밤새 막아 냈다. 앞의 전투는 아프리카 군사력의 상징이 되었고, 뒤의 전투는 영국인의 용기를 기리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전투 이야기만이 아니다. 두 세대에 걸쳐 세워진 당당한 아프리카 왕국이 어떻게 독립을 잃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며, 19세기 후반 유럽 제국이 최후통첩·동맹·무력을 동원해 아프리카 땅을 차지해 간 방식과 이에 맞선 아프리카인의 저항을 보여 준다.

[1][3][2]

쉬움

줄루는 누구였고, 왕국은 어떻게 짜여 있었나

19세기 초 줄루는 드라켄스버그산맥과 인도양 사이에 흩어져 살던 여러 응구니어 사용 공동체 가운데 작은 추장국이었다. 샤카 카센장가코나(재위 약 1816–1828) 시대에 줄루는 크고 강력한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샤카와 그 후계자들은 이웃 여러 집단을 때로는 합의로, 많은 경우 전쟁으로 복속시켰다.

왕국의 핵심은 아마부토(amabutho) 제도였다.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들을 연령 연대(단수 이부토 ibutho)로 묶어 왕을 섬기게 했다. 이들은 일정 기간 왕실 거점(아마칸다)에 머물며 왕의 소를 치고 밭을 일구고 전쟁에 나갔다. 남자는 왕이 자기 연대에 허락을 내려야 결혼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모든 가구를 왕과 이어 주었고, 왕국에 재빨리 모일 수 있는 훈련된 군대를 안겨 주었다.

소는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 신붓값(일로볼로), 선물, 조상에게 바치는 제물, 먹을거리가 모두 소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대개 가축 우리를 둘러싸고 원형 초가집이 늘어선 가옥 단지(이미지)에 살았다. 전쟁의 피해를 이야기할 때 소를 빼앗기고 집이 불탄 일은 전사자 못지않게 중요하다.

케츠와요 카음판데는 아버지 음판데가 1872년에 죽은 뒤 왕이 되었다. 그는 1856년 은돈다쿠수카 전투에서 동생 음부야지와 피비린내 나는 왕위 다툼을 벌여 이겼다. 왕이 된 뒤에는 왕권을 다시 강화하면서도 남쪽의 영국 식민지 나탈, 북서쪽의 보어인 공화국 트란스발과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6][8]

쉬움

영국은 왜 전쟁을 일으켰나

1870년대 영국 식민지 장관 카나번 경은 캐나다에서처럼 남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보어 공화국·아프리카 왕국들을 영국 지배 아래 하나의 ‘연방’으로 묶으려 했다. 1877년 영국은 보어 공화국 트란스발을 병합했는데, 이로써 트란스발과 줄루 사이의 오랜 국경 분쟁까지 떠안게 되었다.

1877년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한 헨리 바틀 프리어는 대군을 거느린 독립 줄루 왕국이 연방 구상의 걸림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1878년에 꾸려진 국경 위원회는 분쟁 지역 대부분이 줄루 땅이라고 판정했고, 이는 프리어에게 곤란한 결과였다. 그는 판정 발표를 미루고 다른 사건들을 개입의 명분으로 삼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1878년 줄루 추장 시하요의 아들들이 나탈로 넘어가 그곳으로 달아난 아버지의 아내 두 사람을 붙잡아 죽인 사건이다.

1878년 12월 11일, 투겔라(투켈라)강 하류에서 프리어 측 대표들은 국경 판정과 함께 최후통첩을 읽었다. 시하요의 아들들을 넘길 것, 소로 벌금을 낼 것, 아마부토 제도를 해체할 것, 젊은이의 자유로운 결혼을 허용할 것, 영국 주재관을 받아들일 것 등이 담겨 있었다. 이를 받아들이면 왕국의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런던의 영국 정부는 새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통신이 느린 틈을 타 프리어는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기한이 지나자 영국군은 1879년 1월 11일 국경을 넘었다.

줄루 쪽에서 보면 이 전쟁은 왕이 사이좋게 지내려 애써 온 이웃의 침략이었다. 케츠와요는 백성에게 줄루 땅에서만 싸우고 나탈을 침범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전쟁 중에도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화평을 청했다.

[1][6][7]

쉬움

두 군대

영국군 사령관 첼름스퍼드 경 중장은 1차 침공에 약 16,000–17,000명을 동원했다. 이 가운데 후장식 마티니-헨리 소총과 약간의 포를 갖춘 영국 정규군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상당수는 백인 식민지 의용병과 기마 경찰이었고, 수천 명은 나탈에서 모집한 아프리카인으로 이루어진 나탈 원주민 부대(Natal Native Contingent)였다. 이 아프리카인 병사들은 장비가 형편없었고(처음에는 열 명에 한 명꼴로만 총이 있었다), 대중적인 서술에서 그들의 역할과 희생은 자주 빠진다.

줄루군은 35,000–40,000명쯤을 모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소가죽 방패와 짧은 찌르는 창(이클와), 던지는 창으로 싸웠다. 상인에게서 사들인 낡은 머스킷 같은 화기를 가진 병사도 많았지만 훈련과 탄약이 부족했다. 줄루군은 빠르고 규율이 서 있었으며 실전 경험이 많았다. 전형적인 공격 대형은 ‘물소의 뿔’로, 가운데(가슴)가 적을 붙잡아 두는 사이 양 날개(뿔)가 돌아 들어가 포위하고, 뒤에는 예비대(허리)가 대기했다.

첼름스퍼드는 병력을 여러 종대로 나누어 여러 방향에서 줄룰란드로 들어가 왕도 온디니(영국인은 울룬디라 불렀다)에서 합류하게 했다. 그는 줄루군이 금방 무너지리라 예상했다.

[1][9]

중급

이산들와나와 로크스 드리프트, 1879년 1월 22–23일

첼름스퍼드가 직접 이끈 중앙 종대는 로크스 드리프트에서 음지냐티강(버펄로강)을 건너 바위산 이산들와나 아래에 진을 쳤다. 진지에는 방어 시설이 없었다. 1월 22일 이른 아침 첼름스퍼드는 줄루 주력군이 더 동쪽에 있다고 보고 병력 절반가량을 이끌고 수색에 나섰다. 그러나 실제로는 은치잉와요 카마홀레와 마부멩과나 카은들렐라가 지휘하는 줄루 주력군 2만–2만 5천 명이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영국 정찰대가 줄루군을 발견하자 줄루군은 곧바로 공격에 나섰다. 연대들은 뿔 대형으로 펼쳐져 소총 사격을 뚫고 탁 트인 벌판을 전진했다. 헨리 펄린 중령과 앤서니 더너퍼드 대령이 이끈 영국·식민지 방어선은 너무 얇게 퍼져 있었다. 몇 시간 만에 양 뿔이 진지를 에워쌌고 방어군은 무너졌다. 영국 측에서는 나탈 원주민 부대 병사를 포함해 1,300명 이상이 죽었고 살아서 빠져나간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지막 국면에 부분 일식이 일어나 하늘이 어두워졌고, 이 일은 영국과 줄루 양쪽의 증언에 모두 남았다. 줄루군의 손실도 커서 1,000–3,000명이 죽고 훨씬 많은 사람이 다친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수집된 줄루인의 증언은 영국인을 경악하게 한 행동, 예컨대 전사자의 배를 가르는 관습을 설명해 준다. 줄루인의 믿음에서 이는 죽은 이의 영혼을 풀어 주고 그를 죽인 전사를 보호하는 의례였지 단순한 잔혹 행위가 아니었다. 케츠와요는 이 승리를 두고, 너무 많은 젊은이가 죽었기에 ‘나라의 배에 창이 꽂힌 것’과 같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날 오후부터 밤까지, 왕의 이복동생 다불라만지 카음판데 왕자가 이끄는 줄루 예비대 3,000–4,000명이 케츠와요의 명령을 어기고 나탈로 건너가 로크스 드리프트의 작은 기지를 공격했다. 옥수수 자루와 비스킷 상자로 쌓은 벽 뒤에서 약 150명의 방어군이 열 시간 가까이 버텼다. 이 방어전으로 영국 최고 무공 훈장인 빅토리아 십자 훈장이 11개나 수여되었는데, 한 번의 교전으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수다. 역사가들은 영국 정부가 이산들와나의 참패에서 관심을 돌리기 위해 로크스 드리프트를 크게 기릴 이유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3][4][8]

중급

교착에서 울룬디까지

이산들와나는 영국의 침공을 멈춰 세웠다. 해안에서는 찰스 피어슨 대령의 우익 종대가 1월 22일 니예자네에서 이겼으나, 이후 에쇼웨 선교 기지에 두 달 넘게 갇혔다. 북서쪽에서는 에벌린 우드 대령의 종대가 줄루 마을과 소 떼를 약탈했다. 나탈은 공포에 휩싸였지만 줄루군은 케츠와요의 지시대로 식민지를 침범하지 않았다.

영국은 제국 곳곳에서 증원군을 보냈고, 3월 말 전세가 뒤집혔다. 3월 28일 줄루군은 현지 아바쿨루시와 함께 흘로바네산에서 영국 기병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튿날 줄루 주력군이 캄불라에 있던 우드의 요새화된 진지를 공격했다가 방벽 뒤에서 쏘아 대는 소총과 포화에 큰 손실을 입었다. 4월 2일 또 다른 줄루군이 깅긴들로부에서 패했고, 에쇼웨의 포위가 풀렸다.

2차 침공에서 첼름스퍼드는 요새화된 진지를 쌓으며 천천히,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6월 1일 관전 장교로 영국군에 합류해 있던 프랑스의 망명 황태자 루이 나폴레옹이 정찰 도중 줄루 병사들에게 목숨을 잃어 유럽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사이 영국 정부는 첼름스퍼드를 대신할 가닛 울즐리를 보냈으나, 첼름스퍼드는 그 전에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1879년 7월 4일 울룬디에서 첼름스퍼드는 약 5,000명의 병력을 포와 개틀링 기관총을 갖춘 거대한 방진으로 세웠다. 줄루 연대들은 용감하게 돌격했지만 방진에 닿지 못했고, 30분쯤 뒤 물러났다. 영국군은 왕궁 온디니를 불태웠다. 케츠와요는 몸을 피했지만 추격 끝에 1879년 8월 28일 은고메 숲에서 붙잡혔다.

[1][5]

중급

사상자,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치른 대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영국 기록에는 자기 쪽 전사자가 약 1,900명으로 나오는데, 나탈 출신 아프리카인 병사의 죽음은 백인 병사보다 덜 꼼꼼하게 집계되었다. 줄루군 전사자는 영국 장교들이 시신을 세거나 어림잡은 추정치뿐이다. 흔히 6,000–7,000명이라는 수치가 제시되지만, 부상 뒤에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실제로는 더 많아 1만 명 가까이 되었으리라 보는 역사가도 있다. 줄루군에는 의료 체계가 없어 많은 부상자가 집에서 숨졌다.

민간인도 전쟁의 타격을 받았다. 영국 종대와 그 아프리카인 동맹군은 가옥과 왕실 거점을 불태우고, 왕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수만 마리의 소를 빼앗았다. 줄루 가정에게 이는 먹을거리와 재산, 그리고 혼인과 종교 의례에 필요한 가축을 한꺼번에 잃는 일이었다. 씨뿌리기와 추수도 흐트러졌다.

나탈의 아프리카인들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줄루 왕가와의 오랜 갈등 때문에 자원해서 나탈 원주민 부대에 들어간 이도 있었지만, 강제로 끌려가거나 수송 마부·인부로 일한 이도 있었다. 그들의 경험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고, 최근 수십 년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1][7]

중급

전후 처리와 왕국의 붕괴

울즐리는 줄룰란드를 병합하지 않았다. 대신 1879년 9월 이 땅을 13개 추장령으로 나누고 추장을 임명했다. 그중에는 영국을 도운 지브헤부 카마피타, 케츠와요의 형제 하무, 심지어 백인 상인이자 사냥꾼인 존 던도 있었다. 다시는 어떤 줄루 통치자도 강해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마부토 제도는 금지되었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임명된 추장들이 왕가 지지 세력인 우수투(uSuthu)와 싸우기 시작했다. 케이프타운에 억류된 케츠와요는 귀환 운동을 벌였고, 1882년 런던을 방문해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다. 1883년 영국은 그를 옛 왕국의 일부에만 복위시키고 바로 옆에 지브헤부를 독립 세력으로 남겨 두었다. 지브헤부는 1883년 7월 온디니를 공격해 파괴하고 많은 유력자를 죽였다. 케츠와요는 달아났다가 1884년 2월 에쇼웨에서 죽었는데, 사인은 분명하지 않으며 독살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의 아들 디누줄루는 보어인의 도움을 얻어 지브헤부에 맞섰지만, 그 대가로 보어인은 줄루 땅의 넓은 부분을 차지해 ‘새 공화국(New Republic)’을 세웠다. 1887년 영국은 남은 줄룰란드를 병합했고, 1897년 이를 나탈에 합쳤다. 이후 줄루 땅의 상당 부분이 백인 정착지로 열렸다. 제프 가이 같은 역사가는 전후 처리와 내전이 침공 자체보다 줄루 사회에 더 큰 피해를 주었다고 본다.

이 전쟁은 더 넓은 흐름의 일부이기도 했다. 1880–81년 트란스발의 보어인은 영국 지배에 맞서 봉기해 제1차 보어 전쟁에서 독립을 되찾았다. 1906년 나탈에서 식민지 세금에 반대해 일어난 밤바타 반란은 많은 아프리카인의 목숨을 앗아 가며 진압되었다. 어느 경우든 아프리카 국가들의 군사적 패배는 20세기 남아프리카의 토지법과 노동 체제로 가는 길을 열었다.

[6][7][8]

중급

전쟁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영국에서 이 전쟁은 주로 로크스 드리프트와 영웅적인 병사들의 이미지로 기억되었다. 그림과 시, 그리고 훗날의 영화, 특히 「줄루」(1964)와 「줄루 던」(1979)이 대중의 인상을 만들었다. 로크스 드리프트를 그린 「줄루」는 영화로서는 높이 평가받지만, 줄루 전사들을 대개 이름 없는 무리로 그렸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 영화에서 케츠와요 역은 실제 줄루 왕가의 후손이자 뒷날 남아프리카의 대표적 정치인이 된 망고수투 부텔레지가 맡았다.

줄루 사람들에게 이산들와나는 자부심의 원천이자, 아프리카 군대가 근대 유럽 군대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준 증거다. 찬가(이지봉오)와 구전은 연대와 지휘관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전한다. 지금도 해마다 전장에서 추모 행사가 열리며 줄루 왕이 참석하는 경우가 많고, 이산들와나에는 수많은 영국 기념비 옆에 줄루 전사자를 기리는 기념물도 서 있다. 이 전쟁의 기억은 줄루 민족주의 운동 같은 현대 정치에도 쓰였는데, 기억이 오늘의 목적에 맞게 다듬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남아프리카 전체로 보면,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문화유산 정책은 영국 편에서 싸운 흑인 병사들까지 포함해 전장을 공동의 역사로 제시하려 해 왔다. 당시 영국 안에서도 비판이 있었다. 나탈의 존 윌리엄 콜렌소 주교와 그 딸들은 케츠와요를 변호하며 프리어가 그에게 전쟁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쟁이 정당한 방어였는지, 도발 없는 침략이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1879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4][3]

심화

1차 사료: 누구의 목소리가 남았나

문헌 기록은 영국 측 자료가 압도적이다. 공식 전황 보고, 이산들와나 사건 조사 법정 기록, 의회 문서, 연대 기록, 병사의 편지와 일기, 신문 특파원의 기사 등이 그것이다. 풍부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줄루군의 규모는 부풀리고 아프리카인 보조병과 줄루군 사상자는 적게 세는 경우가 많으며, 당시의 인종적 편견이 배어 있다.

줄루인의 관점은 몇 가지 형태로 남아 있다. 전쟁 뒤 영국 관리와 선교사들은 이산들와나 등지에서 싸운 줄루 참전자들의 진술을 기록했다. 케츠와요 자신도 억류 중에 줄루의 역사와 관습을 구술했으며, 이는 뒤에 콜린 웹과 존 라이트가 『줄루 왕이 말하다(A Zulu King Speaks)』(1978)로 엮어 냈다. 나탈 관리 제임스 스튜어트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기록한 방대한 구술 증언 모음인 『제임스 스튜어트 아카이브』(웹과 라이트가 여러 권으로 간행)는 줄루 사회와 기억을 연구하는 핵심 자료다. 다만 질문을 고르고 답을 번역한 사람이 스튜어트였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질 자료도 보탬이 된다. 이산들와나와 울룬디 전장은 조사가 이루어졌고, 탄피·단추 같은 유물은 실제 전투가 벌어진 위치를 보여 준다. 이런 증거는 이산들와나에서 영국군 방어선이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관한 전통적인 문헌 서술을 검증하는 데 쓰여 왔다.

[10][3][8]

심화

역사가들의 논쟁

초기 역사서는 영국 지휘부 안의 책임 문제에 집중했다. 이산들와나 패배의 책임은 병력을 나누고 진지를 요새화하지 않은 첼름스퍼드에게 있는가, 아니면 현장을 지휘하다 전사한 더너퍼드와 펄린에게 있는가? 첼름스퍼드 지지자들은 더너퍼드를 탓하는 경향이 있었다. 탄약 보급을 둘러싼 논쟁도 오래 이어졌다. 예비 탄약 상자를 빨리 열지 못해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옛 이야기가 있지만, 많은 후대 역사가는 이를 의심하고 대신 지나치게 넓게 벌린 방어선, 줄루군의 빠른 진격, 그리고 줄루군의 압도적 규모를 강조한다.

도널드 모리스의 『창의 세례(The Washing of the Spears)』(1965)는 줄루 민족의 흥망을 다룬 대단히 인기 있는 서사였지만, 주로 영국 측 자료에 기대어 식민주의적 고정관념을 되풀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70년대 말부터 새로운 세대의 역사가들, 특히 『줄루 왕국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Zulu Kingdom)』(1979)를 쓴 제프 가이는 줄루 사회, 소와 노동의 경제, 전후 처리로 관심을 옮겼다. 가이는 이 전쟁이 독립 아프리카 국가를 무너뜨리고 그 주민을 식민지 남아프리카의 노동력 공급원으로 바꾸려는 제국 정책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존 라반드 등은 줄루 군사 제도와 전략을 상세히 연구하며, 케츠와요를 ‘야만적’ 전제군주가 아니라 방어전을 치르며 협상을 모색한 합리적 통치자로 다루었다. 오늘날 연구는 영국 편 아프리카인 병사, 여성과 민간인, 그리고 이 전쟁이 이후 남아프리카 정치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이용되었는지에도 주목한다. 프리어가 어디까지 독단으로 움직였고 어디까지 영국 정책의 큰 목표를 수행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7][8][9]

주요 전투 (9)

  1.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1879년
  2. 이산들와나 전투1879년
  3. 울룬디 전투1879년
  4. 캄불라 전투1879년
  5. 인톰베 전투1879년
  6. 흘로바네 전투1879년
  7. 긴긴들로부 전투1879년
  8. 에쇼웨 공방전1879년
  9. 이니에자네 전투1879년

핵심 개념

연방 정책
남아프리카의 식민지·보어 공화국·아프리카 국가들을 영국 지배 아래 묶으려던 1870년대 영국의 구상. 독립 줄루 왕국은 그 걸림돌이었다.
구실로서의 최후통첩
1878년 12월 프리어의 요구는 케츠와요가 받아들일 수 없도록 짜여, 영국에 침공 명분을 주었다.
아마부토
전시와 평시에 줄루 왕을 섬긴 연령 연대. 가구를 왕권과 이어 주었고, 영국 요구의 주된 표적이었다.
승리와 패배의 공존
이산들와나는 아프리카 군대가 근대 유럽 군대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었지만, 줄루에게는 장기전을 치를 화력과 자원이 없었다.
분할 통치
전후 영국은 줄룰란드를 13개 추장령으로 쪼갰고, 이것이 내전을 불러 전투보다 더 크게 왕국을 약화시켰다.
엇갈리는 기억
영국의 기억은 로크스 드리프트에, 줄루의 기억은 이산들와나에 모인다. 현대 역사가들은 잊힌 아프리카인 보조병과 함께 두 기억을 모두 품으려 한다.

기록

  1. 약 1816년 — 샤카가 줄루 왕국을 세우기 시작한다.
  2. 1856년 — 케츠와요가 은돈다쿠수카에서 동생 음부야지를 꺾고 후계자가 된다.
  3. 1873년 — 케츠와요 즉위. 나탈을 대표해 시어필러스 셉스톤이 참석한다.
  4. 1877년 — 영국이 트란스발을 병합하고, 바틀 프리어가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한다.
  5. 1878년 — 국경 위원회 보고. 12월 11일 프리어의 최후통첩이 전달된다.
  6. 1879년 — 영국군 침공(1월 11일). 이산들와나에서 줄루군 승리, 로크스 드리프트 방어전(1월 22–23일).
  7. 1879년 — 흘로바네·캄불라(3월 28–29일), 깅긴들로부(4월 2일), 울룬디에서 영국군 승리(7월 4일), 케츠와요 체포(8월 28일).
  8. 1879년 — 울즐리가 줄룰란드를 13개 추장령으로 나눈다(9월).
  9. 1882년 — 케츠와요가 복위를 호소하러 런던을 방문한다.
  10. 1883년 — 케츠와요 부분 복위. 지브헤부가 온디니를 파괴하고 내전이 벌어진다.
  11. 1884년 — 케츠와요가 에쇼웨에서 사망한다(2월).
  12. 1887년 — 영국이 줄룰란드를 병합하고, 1897년 나탈에 합친다.

용어 풀이

줄룰란드
투겔라강 북쪽의 줄루 왕국 영토.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 콰줄루나탈주의 일부.
이부토 / 아마부토
줄루의 연령 연대. 복수형은 연대 제도 전체를 가리킨다.
이클와
샤카 시대 이래 줄루 전투와 결부된, 날이 넓은 짧은 찌르는 창.
온디니(울룬디)
케츠와요의 주 왕실 거점이자 수도. 1879년 7월 영국군이 불태웠다.
나탈 원주민 부대
영국 식민지 나탈에서 모집해 이 전쟁에 투입한 아프리카인 병사들.
고등판무관
케이프 식민지 밖의 남아프리카 국가·주민과의 관계를 맡은 영국 최고위 관리.
우수투
1879년 이후 내전에서 케츠와요와 그 아들 디누줄루를 따른 세력.
빅토리아 십자 훈장
영국 최고의 무공 훈장. 로크스 드리프트 방어전으로 11개가 수여되었다.

묻고 답하기

줄루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나요?

아니요. 군대 해체와 독립 포기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케츠와요가 받아들이지 못하자 영국이 쳐들어왔어요. 줄루군은 주로 자기 땅에서 싸웠어요.

이산들와나에서 어떻게 창이 소총을 이길 수 있었나요?

줄루군은 수가 훨씬 많았고 매우 빠르게 움직였으며, 뛰어난 포위 전술을 썼어요. 게다가 진지를 요새화하지 않고 방어선을 너무 얇게 편 영국 쪽 실수도 있었지요. 총을 가진 줄루 병사도 많았어요.

로크스 드리프트는 왜 그렇게 유명한가요?

작은 수비대가 훨씬 큰 병력의 밤샘 공격을 버텨 냈기 때문이에요. 이산들와나의 참패 직후였기에 영국 정부와 언론이 크게 기렸고, 뒤에 유명한 영화가 나오면서 더 널리 알려졌어요.

케츠와요 왕은 어떻게 되었나요?

붙잡혀 케이프타운에 억류되었다가 1882년 런던을 방문했고, 1883년 왕국 일부로 돌아왔지만 경쟁자 지브헤부에게 패한 뒤 1884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몇 명이나 죽었나요?

영국 측 약 1,900명, 줄루 병사는 아마 6,000–10,000명이에요. 굶주림·피란·뒤이은 내전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은 집계되지 않았고, 규모가 컸을 수 있어요.

이산들와나 패배 원인에 대해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나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첼름스퍼드의 종대 분할 결정, 더너퍼드와 펄린의 역할, 사격선의 전개, 탄약 보급에 관한 옛 주장 등이 논쟁 대상이다. 최근에는 영국의 실수뿐 아니라 줄루 지휘부의 역량과 전술을 함께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줄루 측 사료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참전자 진술과 구전은 매우 귀중하지만, 대부분 식민지 관리나 선교사가 영어로, 때로는 여러 해 뒤에 기록했다. 역사가들은 이를 영국 측 기록 및 물질 자료와 꼼꼼히 대조한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Anglo-Zulu War. Wikipedia
  2. 줄루 전쟁. 위키백과
  3. Battle of Isandlwana. Wikipedia
  4. Battle of Rorke’s Drift. Wikipedia
  5. Battle of Ulundi. Wikipedia
  6. Cetshwayo. Wikipedia
  7. Jeff Guy, The Destruction of the Zulu Kingdom: The Civil War in Zululand, 1879–1884. Longman, 1979
  8. John Laband, Rope of Sand: The Rise and Fall of the Zulu Kingdom in the Nineteenth Century. Jonathan Ball, 1995
  9. Donald R. Morris, The Washing of the Spears. Simon and Schuster, 1965
  10. C. de B. Webb and J. B. Wright (eds.), A Zulu King Speaks: Statements Made by Cetshwayo kaMpande on the History and Customs of His People. University of Natal Press, 1978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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